테마 종교, 사상

[스크랩] 2001년 세계 지식인 지도 제3부 -중앙일보연재

공전과 자전 2007. 6. 27. 20:51

 

세계 지식인 지도 제3부 - ‘기로에 선 모더니티’

 

 

 

1. 단턴과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 (2001․5․3)

 

‘모더니티(modernity)’를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참 어렵다. 학자마다 정의와 해석이 제각각인 데다 발생시점과 완성시기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역사학계나 문학계는 주로 ‘근대성’으로, 사회학계는 ‘현대성’으로 번역하는 등 이해방식도 다르다. 그럼에도 이를 정의한다면, 모더니티는 19세기 말~20세기 초 서구를 중심으로 완성된 '근대적인 가치관' 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개인적 이성을 바탕으로 한 합리성을 추구한다. 근대적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의 탄생, 계급의 형성과 노동의 성적(性的) 분화 등은 모더니티의 산물이다. 그러나 모더니티 담론은 20세기 중반 이후 인간의 이성에 대한 불신이 거세지면서 타격을 받기 시작했다. 기존 가치관의 해체를 내세우며 이를 극복하려는 '포스트모더니티'(탈근대성 혹은 탈현대성)에 대한 논의가 등장했다. 제3부에서는 이런 가치관의 격변기에 맞춰 세계의 지식인들이 모더니티와 포스트모더니티를 어떻게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학문세계를 구축하고, 세계화시대를 해석하는지 살펴본다.

 

1730년대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학대받던 인쇄공들이 눈에 보이는 고양이들을 모두 때려죽이는 소동이 벌어졌다. 한 견습공이 이 소동을 기록했고 그것에 근거해 미국 프린스턴대의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 교수는 1984년에 『고양이 대학살』이라는 저서를 출간해 18세기 노동자들의 정신 세계를 훌륭하게 되살려 놓았다. 많은 찬사를 받았던 이 책은 역사학에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를 연 저작의 하나로 꼽힌다. 그 이유는 이 책이 19세기 후반에 확립되었던 모더니티에 근거하는 학문적 규범을 넘어서는 대안을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간략하게 말해 독일의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가 선도하여 확립한 역사학의 전통적인 규범은 역사학이란 과거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찾는 학문이며, 그 방법에 있어서는 제도화된 틀을 따라야 하며, 그것을 통해 연구해야 하는 것은 ‘국가’와 같은 거대한 주제라는 것이다. 역사학은 이렇게 확립된 규범 속에 안주해 왔다.

 

  그런데 단턴은 그 모든 것을 부정했다. 첫째, 그는 무명의 인쇄공들에게 벌어졌던 한낱 소동에 불과한 일을 주제로 삼았고 둘째, 역사학의 인습적인 방법을 넘어 인류학이나 문학비평의 이론을 거침없이 차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전개시켰고 셋째, 그렇게 도달한 결론을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자신의 해석인 것으로 제시했다.

 

  만일 이 책이 단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역사학의 전당(殿堂)에 하나 더 등재시킨 것에 불과하다면, 단턴은 서양의 역사학계에 있어서 새로운 이론이 만들어지고 논쟁이 가다듬어지는 핵심의 근처에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로 대표되는 새로운 경향의 역사는 종래의 역사학이 다루려 하였던 거대한 설명의 틀에 매몰되어 잊혀져갔던 개인들의 삶과 생각을 복원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 그 결과 피지배 계층, 여성, 비서구인 등 이른바 ‘타자화(他者化)’된 사람들의 시각으로 역사를 보려는 시도가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고 있다. 그것은 확실히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이루어낸 개가의 하나일 것이다.

 

  1939년생으로서 68년 이래 프린스턴대에 재직하고 있는 단턴은 학문의 국제화를 개인 속에 구현하고 있다. 71년 파리의 사회과학고등연구소 연구원을 시작으로 그는 영국․프랑스․독일․네덜란드 등지의 연구소나 대학교에서 연구 책임자나 학술지의 편집인 혹은 교환교수로 활약하며 오랜 기간을 머물렀다. 그것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서적과 서적유통이 갖는 의미를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였던 그의 저서들이 국경을 초월하는 공감을 얻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프랑스혁명 2백주년 기념 학술연구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던 미셸 보벨이나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인 다니엘 로슈 등 프랑스 역사가들과 책을 공동으로 편집하거나 집필하기도 하였고, 사회과학고등연구소의 로제 샤르티에 교수나 미국 코넬 대학의 도미니크 라카프라 교수 등이 개재된 논쟁의 진앙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그는 주로 영어로 글을 쓰지만 불어․독일어․이탈리아어․스페인어 등으로 씌어진 그의 책이나 논문의 일부가 아직도 영어로 번역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그를 단순히 미국의 프랑스사가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바로 그곳에 역사가로서 단턴의 또 다른 장점이 존재한다. 『백과전서 출판의 역사』(79) ,『구체제의 지하문학 세계』(82) 등 초기의 저작으로 출발하여 『고양이 대학살』을 거쳐 『라무레트의 키스』(90) ,『출판과 선동 : 18세기 비밀 문학의 세계』(91) ,『혁명 이전 프랑스의 금서 베스트셀러』(95) ,『프랑스 비밀문학 대계』(95)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주요 저서들에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관념의 사회사’라고 말할 수 있다. 지식의 보고인 책을 대상(내용보다는 어떻게 유통됐느냐)으로 설정하는 한 그의 연구는 전통적인 사상사나 관념사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책의 내용보다는 대량 인쇄의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을 형성함에 끼친 영향에 초점을 맞추면서 사회사에서 주로 사용하는 통계적 방법을 자유롭게 이용하는 한 그를 종래의 사상사가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그는 ‘관념의 사회사’를 실행하는 역사가다.

 

  그 점에 있어서 단턴은 『프랑스 혁명의 지적 기원』으로 그 방면의 선구적 업적을 남긴 다니엘 모르네와 그의 방법을 계승한 사회과학고등연구소의 프랑수아 퓌레 및 다니엘 로슈 등 프랑스 역사가들의 업적을 미국식의 사상사 전통에 접목시키는 작업을 수행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어쨌든, 그의 접근 방법을 통해 계몽 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뿐 아니라 ‘밑에서’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 작용하던 방식이 연구될 수 있는 한 통로가 뚫렸다. 그것은 ‘민중문화사’를 위한 한 경로를 마련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위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을 서술 대상으로 삼고,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오만한 자세를 유지했던 역사학이 다른 학문으로부터 기꺼이 배워야 한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인 그의 태도는 종래의 역사학과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것은 미국 UCLA의 린 헌트와 카를로 긴즈부르그, 『메타 역사』로 잘 알려진 헤이든 화이트 등 이른바 ‘신문화사’의 주창자들이 내세우는 논지와도 일치하고 있다.

 

  다양한 방식으로 역사의 여러 층위를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그들의 시도가 궁극적인 성공을 거둘지 아직은 예측하기 이르지만, 그들로 인하여 역사학의 연구 대상에서 배제되었던 ‘작은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되찾았고 게다가 역사학이 풍요롭고 흥미로워졌음을 주목한다면 그 전도는 유망하다.

 

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 서양사학) <hocho@cc.knue.ac.kr>

 

 

관련 번역․연구서

 

모리스 아귈롱,『마리안느의 투쟁』, 전수연 역(한길사, 2001).
곽차섭 편,『미시사란 무엇인가』(푸른역사, 2000).
김기봉,『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푸른역사, 2000).
조한욱,『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책세상, 2000).
리처드 에번스,『역사학을 위한 변명』, 이영석 역(소나무, 1999).
린 헌트,『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 조한욱 역(새물결, 1999).
조지 이거스,『20세기 사학사』, 김기봉․임상우 역(푸른역사, 1999).
안병직,『오늘의 역사학』(한겨레신문사, 1998).
로버트 단턴,『고양이 대학살』조한욱 역(문학과지성사, 1996).
린 헌트『문화로 본 새로운 역사』(소나무, 1996).


 

= 모더니즘에 대한 국내 학계의 움직임은

 

20세기 후반 미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새로운 흐름을 아우르는 말이 바로 ‘문화사(Cultural History)’ 혹은 ‘신문화사(New Cultural History)’다. 다양한 연구방법의 유사성을 걸러보니 공통분모로 엮이는 게 ‘문화’였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한마디로 민중들의 시시콜콜한 문화도 역사를 이끌어온 힘이었다고 보고, 그것들의 사료적 가치를 높이 인정하려는 태도다.

 

  한국에 이런 신문화사 연구방법이 도입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후반이다. 96년 한국교원대 조한욱 교수는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과 린 헌트의『문화로 본 새로운 역사』를 거푸 번역․출간하며 이를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그해 이화여대에서는 이화사학연구소 주최로 ‘신문화사, 새로운 역사학인가’를 주제로 학술세미나가 열려 소장 연구자를 중심으로 세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당시 주제 발표자는 조한욱 교수를 비롯해 부산대 곽차섭․서강대 임상우․이화여대 조지형 교수 등이었다. 서양사 전공자들이 주축을 이룬 신문화사 연구 그룹은 지난해 ‘문화사학회’를 창립, 연구 수준과 깊이를 심화시켜나갈 토대를 마련했다.

 

  이 학회의 회원은 주명철(한국교원대) 회장을 비롯해 조한욱․임지현(한양대)․임상우․조지형․황혜성(한성대) 교수와 김기봉(성균관대 강사)․김현식(한양대 강사) 박사 등 30~40대 소장․중견학자 80명(연구회원 50명․일반회원 30명)이다. 서양사 분야의 대부인 차하순 교수로부터 학문적 세례를 받은 서강대 출신들이 신문화사 학맥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게 특징이다. 학회 발족과 함께 문화사학회는 지난해 반년간 학회지인『역사와 문화』도 창간해 이미 제1․2호(푸른숲)를 냈다. 그동안 출판사가 바뀌어 이달 안으로 제3호(푸른역사)가 나온다. ‘민중문화사’를 주제로 한 제3호에는 국사학계의 성과가 반영될 예정으로, 서울대 규장각의 김호 박사가 18세기 피의자 조서인 ‘검안(檢案)’을 주제로 글을 발표한다.

 

  金박사 외에 서강대 백승종 교수가 신문화사 연구방법을 한국사에 적용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임지현 교수는 “아직 신문화사는 서양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국내에 적극적으로 소개되는 단계에 있다”며 “이를 적용한 국사학계의 연구성과가 나오기까지는 시간이 좀 필요하다” 고 말했다.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2.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해체철학(2001․5․10)

 

서양 철학은 끝났다. 이렇게 외친 사람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1900)였고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이상 독일의 실존철학자)였다. 오늘날은 자크 데리다(71, 프랑스의 철학자)가 이 종언의 주제를 다시 한 번 과격하게 밀어붙이고 있으며, 그의 작업은 ‘해체론’ 혹은 ‘탈구축’이라 불린다. 해체론은 서양 철학사 전체를 분해해서 탈(脫)서양적 사유의 지반 위에 재구축하려는 기획이다.

 

  장 뤼크 낭시(Jean-Luc Nancy)와 필립 라쿠라바르트(Philippe Lacoue-Labarthe)는 세계적 인맥을 구축한 데리다 군단(軍團)의 용장으로 이름을 날리다가 점차 독창적인 철학자로 인정받게 된 2세대의 대표적 해체론자다. 특히 정치철학적 측면과 미학적 측면에서 해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노자의 『도덕경』을 여는 첫 구절은 도(道)를 언어적으로 규정할 수 없음을 선언한다. 해체론자가 해체하고자 하는 것도 언어 초월적 사태를 개념적 언어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해하려는 태도이다.

 

  이런 작업은 서양 철학사 전체에 대한 전복(顚覆)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 태도가 플라톤 이래 서양 철학 전체의 기본적 특성이기 때문이다. 서양적 사유에서 개념적 언어에 담기지 않는 것은 미신적이고 신비한 것,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 더 나아가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이 위험한 것이 개념적 질서의 뿌리 아닐까? 해체론자가 되풀이해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 점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가 강조하는 언어 초월적 사태는 무엇보다 정치성(政治性)이다. 이 정치성은 이론적 차원이나 경험적 차원의 정치와 구분된다. 정치를 있게 하는 정치성, 살아 있는 정치성은 일단 ‘이것이다’라고 규정하자마자 사라져 버린다. 대신 거기에는 박제화한 정치성이 남는다. 물론 그렇게 해야 정치적 담론이나 실천이 뒤따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담론과 규칙은 음식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신선한 기운을 포기한 통조림 깡통에 불과하다. 해체론자의 눈에는 서양 사상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정치 이론은 이런 통조림만 생산해왔다. 그리고 그런 제조 공정의 기초 시설을 제공하고 보호해 온 것이 필로소피아라는 이름의 철학, 이론적 사유의 종손(宗孫)인 철학이다.

 

  니체 이래 해체론자들은 이런 철학이 끝났다고 본다. 이는 철학이 자신의 잠재력을 남김없이 실현하는 가운데 완성되었다는 것을, 따라서 더 이상 새로운 가능성과 의미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철학적 사유는 오늘에 이르러 과학과 기술로, 사회 제도로 실현되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다시 말한다. 철학은 정치를 통하여 세상과 일상을 점령했다. 정치적인 것은 생활 속에 일반화되었지만 의미를 결여한 정치, 공허한 정치만이 남았다. 그러나 그 누구도 정치를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진단은 철학과 정치의 상호 공속성(共屬性) 에 대한 인식에 근거한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완성으로서의 끝에 도달한 정치를 전체주의라 부른다. 전체주의 사회는 초월성이 완벽하게 사라진 사회, 총체적으로 표준화되고 동질화된 사회, 따라서 폐쇄성이 강한 사회이다. 이런 의미의 전체주의는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합리주의를 신봉하는 현대 유럽 사회도 역시 이미 일상의 차원에서 혹은 미시적 차원에서 전체주의로 치닫고 있다는 것이 스트라스부르 철학자들의 진단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박제화하는 동시에 전체주의화하는 정치 안으로 초월적 정치성을 다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을 고심한다.

 

  이들이 예술의 문제를 천착하는 것은 이런 문맥을 배후로 한다. 사실 예술적 전통에는 이론적인 것과 경쟁하는 전혀 다른 정치의 가능성이 꿈틀댄다. 서양사상사의 전통이 플라톤에서 확립됐다면, 그의 철학의 궁극적 목표는 정치에 있었다.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그의 ‘철인(哲人) 왕’의 이념이다. 그러나 당시까지 그리스에서 교양세계의 주인이자 정치의 기본 규칙을 제공하던 주역은 시인들이었다. 플라톤의 철학은 시인들이 누리던 권리에 대한 도전이었다. 이후 시적 사유 안에서 정치적 실천이 이루어지던 시대는 이론적 사유가 승승장구하자 그 속에서 망각되었다. 다만 초기 낭만주의자들에 의해 새롭게 구상되었을 뿐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이 낭만주의적 전통을 계승하고자 한다. 물론 이 전통이 대변하는 예술적 정치학도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을 지닌다. 이것은 나치가 어떤 심미주의적 정치 이데올로기였다는 역사적 사실로부터 반추해 볼 수 있다. 하이데거가 나치에 참여했고 또 실망한 것도 그가 시적 사유의 옹호자였다는 것에서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낭시와 라쿠라바르트는 예술적 정치성을 옹호하되 우상제작으로 전락하는 조형적 의지의 위험성을 비판하고 그에 반하는 초월적 사태로부터 출발한다.

 

  이러한 경향은 존재론의 차원에서 ‘재현(再現)주의’ 혹은 ‘표상(表象)주의’로 귀결된다. 재현주의는 개체의 지위를 절대화한 형상을 모방하고 재현하는 ‘모상(模像)’으로 규정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하나의 형상을 중심으로 총체적으로 해석하려는 버릇은 조형적 의지의 속성이다. 따라서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정치철학과 예술론은 다시 존재론적 탐색으로 이어진다. 조형적 의지를 포괄하되 그것의 위험성을 극복할 수 있는 초월적 사유, 탈표상적이고 탈재현적인 사유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때만 그들이 의도한 새로운 정치가 납득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상환 (서울대교수, 철학) <kimsh@snu.ac.kr>

 

 

공동 약력

▶1940년 모두 프랑스 출생.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 철학과에서 교수로 함께 재직했으며 현재 미 UC버클리 초빙교수로 있음.
▶1980~84년 파리고등사범학교에 설치된 정치철학연구소 공동 소장으로 활동.
▶라쿠라바르트는 세계적인 학술잡지 『포에티크』의 편집에 참여.

 

 

공동 저작

『문학적 절대성』(1978) : 독일 초기 낭만주의자들의 문학이론과 철학을 다룬 고전적 저서.
『문자의 지위』(1973) : 라캉에 대한 해체론적 해석.
『나치의 신화』(1991) : 나치의 출현을 게르만 민족의 정체성을 고안해 내려한 조형적 의지의 산물로 해석.

 

 

공동 편집

『인간의 종언』(1981) : 80년 데리다 사상을 주제로 프랑스에서 개최된 국제학술대회의 발표 논문집.
『정치성 재고』(1981) : 정치철학연구소에서 발표한 논문들에 대한 1차 편집서.
『정치성의 후퇴』(1983) : 정치철학연구소에서 발표된 논문들에 대한 2차 편집서.

낭시의 저서
『에고 숨』(1979) : 데카르트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무위의 공동체』(1983) : 동일성의 원리에 기초한 공동체 개념을 비판하고 차이의 정치학을 제시하는 명저.
『자유의 체험』(88) : 근대 철학에서 철학과 정치를 동시에 떠받쳐 왔던 자유의 개념을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중후한 저서.

 

 

라쿠라바르트의 저서

『철학의 주체, 도상적 유형학』1(1979) : 문학과 철학의 대립적 관계 안에서 서양사상사의 흐름을 재구성.
『근대인의 모방, 도상적 유형학』2(1986) : 근대적 미메시스(모방) 개념이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전복적 효과를 띄어가는 과정을 서술하고 비구상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
『정치성의 허구화』(1987) : 하이데거의 나치참여 이유를 그의 심미적 정치학에서 찾고, 철학과 예술의 관계를 성찰.

 

 

<용어 해설>

 

▶해체론과 탈구축〓파괴와 구성을 동시에 함축한다. 해체론은 플라톤이래 확립된 서양사상사의 본질적 유래와 내재적 한계, 그리고 그 한계 안의 공간이 형성되는 역설적 논리를 탐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탈(脫) 서양적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정치성〓정치성(the political)은 정치(the politics)와 구분된다. 정치는 개념․이론․제도의 차원에서 성립한다. 반면 정치성은 정치가 있기 위하여 먼저 있어야 하는 사태이되 정치의 개념이나 제도 안에서 망각되는 초월적 사태이다.

▶조형적 의지〓우상적 형상을 만들어 내려는 의지다. 이질적 것들을 하나로 묶고 거기에서 동질성과 정체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을 포괄하거나 대표할 수 있는 어떤 상징적 도형이나 형상을 고안해 내야한다. 서양사상사는 이런 우상제작의 역사였다.

▶초월성〓우상적 형상이 지배하는 표상을 뛰어넘는 사태다. 이는 곧 이론중심적인 서양적 사유의 한계를 넘어서는 사태이고, 정치성은 그런 초월적 사태에 속한다. 정치적 차원에서 이 초월성의 망각은 전체주의로 귀결된다.

▶재현주의와 표상주의〓어떤 인위적인 형상(원본) 을 정해놓고 이를 절대화하며 개체의 지위 또한 그 신화화 원본과 ‘복사품’의 관계에서 파악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사의 중심 개념이다.

 

 

= 온고지신으로서의 해체론은…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고도 해체론이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한다. 그게 왜 해체론이겠어. 다 부수고 말자는 거니까 해체론이겠지. 진리도, 본질이나 토대 같은 것도 없다는 게 해체론 아냐. 휴머니즘도 끝났고 역사도 끝났다는 그런 허무주의 타령이잖아. 그러나 아니다. 해체론이 끝났다고 할 때는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다 실현되고, 일상화되고, 지겹도록 되풀이되어서 다시 들여다보기도 싫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가령 한국사회에서 유가(儒家)사상은 일상화한 동시에 진부해졌다. 신선한 의미를 잃어버렸고, 그런 뜻에서 끝난 사상이다. 유가사상은 한국인의 정체성과 습관을 조형해온 최고의 형식이지만 한국사회에 새로운 정신적 추동력이 유입되는 것을 가로막는 최대의 장애물이다. 문제는 그것이 한국인의 본성에 내면화된 지 오래여서 그 장애의 무게가 무감각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때문에 한국인은 공자(孔子)를 죽여야 한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이고 살려야 한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논쟁 자체가 헛도는 일상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면 어디에서 신선한 의미를 구해야 하는가? 새 것은 오래된 것에 있다. 옛것을 부수어 새 것을 얻자. 이렇게 말할 때 해체론자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을 믿는 지독한 문헌학자이다. 그러나 해체론자가 해체론자인 것은, 첫째 온고지신 자체의 의미를 묻기 때문이다. 옛것은 무엇이고 새로운 것이란 무엇인가? 온고란 무엇이고, 지신이란 무엇인가? 가령 유가적 전통에서 가르쳐온 방법과 전제 안에서만 온고지신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온고지신해도 끝장난 유가사상은 다시 일어설 수 없다. 유가적 편견을 벗어날 때만 공자 말씀에 대한 온고지신이 가능한 것이다. 해체론은 서양사상사의 주류인 플라톤주의적 전통을 서양적 편견 없이 온고지신하는 방법을 역설한다.

 

  해체론자가 해체론자인 둘째 이유는 아무리 해체하거나 분해․조립해도 잉여로 남는 것, 어떤 해체 불가능한 것이 있다는 믿음에 있다. 역설적이고 모순적이어서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 즉 어떤 초월적 사태가 있다. 그것이 전통적 의미의 진리보다 더 오래된 진리이자 철학이 말해온 토대보다 더 심층적인 토대이다. 그밖에도 해체론자의 변별적 특징은 많다. 해체론자들은 일반적으로 문학․예술․종교․정치․인류학․정신분석 등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담론을 철학적 담론과 구분하지 않거나 혼합한다.

 

  적어도 서구에서 인문학의 전반적 추세는 해체론이 예시한 길을 따르고 있다. 시대, 영역 및 지역을 나누던 경계를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하나의 담론을 문화 전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려는 새로운 인문학적 시각을 확립하는 데 해체론의 공로는 컸다. 게다가 서양사상사를 탈서양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해체론은 그 어떤 서구의 사조보다 동양적 사유의 온고지신을 자극하고 있다(김상환).
 
 

 
3. ‘성찰적 근대화’ 기수 벡․기든스․래시(2001․5․17)

 

= ‘성찰적 근대화론’의 기수들

 

1980년대 중반 체르노빌 핵 발전소 사고는 서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 일으켰다. 막연하게 신뢰했던 현대 사회의 안전 체계가 계산 불가능한 위험에 노출된 것이었음을 확인한 순간 문명의 이름으로 도처에 깔려 있는 생명의 위협에 대해 사람들은 전율했다. 울리히 벡의 『위험 사회』는 바로 그 시점에서 ‘현대 문명이 도달한 지점이 과연 어디인지’를 예리하게 파헤쳐 ‘제도 과학에 유성의 충돌과 같은 충격을 안겨준’ 명저로 각광을 받았다.

 

  이 책에서 벡은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는 삶에 대한 위협”인 ‘위험’이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근대성’ 안에 내재한 자동적 결과임을 날카롭게 보여 주었다. 말하자면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과 산업문명은 자연과 인간의 생명에 대해서 ‘제조된 불확실성과 위협’을 점점 증가시켜 왔다. 문제는 이러한 불확실성에 대해 우리의 지식이 지극히 불완전하고, 위험을 정확히 계산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위험은 전지구적으로 도처에 깔려 있는데 위험의 내용과 범위를 정확히 알 수 없을 때 반응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벡이 ‘위험의 덫’이라고 부른 위험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회적 행동을 옴짝달싹 못하도록 묶어 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을 전면적으로 인식하고 그에 대응하는 시스템들을 비록 불완전하고 다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치적․사회적 결정들을 통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 후자의 과정, 즉 근대 산업사회가 만들어낸 위험한 결과들에 대한 새로운 대응 체계를 사려 깊게 만들어가는 ‘이미 진행된 미래’를 벡은 ‘성찰적 근대화(reflexive modernization)’로 명명했다.


 

미시․하부정치의 확산

 

80년대 벡의 작업이 위험사회에 초점을 맞추어 오늘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자기이해에 초점을 두었다면, 90년대의 벡은 전환기의 세계를 체계적․거시적 수준과 개인적․미시적 삶과 행위의 수준에서 함께 이해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데 열중했다. 그의 생산성은 놀라울 정도여서 거의 일년에 한 권의 책을 낼 정도로 왕성한 집필욕을 보이고 있는 데, 그의 저서들은 난해한 이론서라기 보다는 시대를 사는 지혜를 알려 주는 잠언록과 같은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폭넓게 사랑을 받고 있다.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벡의 지칠 줄 모르는 지적 탐험은 영국의 대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와 스코트 래시의 작업들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90년대에 와서 이들은 서로의 이론이 매우 근접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찰적 근대화』라는 공저는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되었다. 우선 이들은 비록 쓰임새는 약간 다르지만 성찰성이란 개념을 시대의 문제를 풀어갈 새로운 화두로 삼고 있다.

 

  여기서 성찰성이란 이중적 의미로 사용된다. 현대의 모든 제도들과 시스템 속에 자기를 스스로 돌아보게 하는 기제인 성찰성이 내재화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더욱 개인화하고 있는 삶의 조건 속에서 자기 삶에 대한 성찰적 기획이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회가 근대화할 수록 사회 내에 자신의 존재조건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 또한 많이 형성되며, 그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또한 커진다.

 

  그리하여 성찰적 근대화란 이 세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근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다른 눈으로 근대를 봄으로써” 근대를 더욱 ‘인간답고 아름다운 근대’로 만들자는 기획인 것인다. 다만 이러한 기획에 있어 벡이 구조의 자기 창조적인 변화에 좀더 주목하고 있다면, 기든스는 지식과 전문가 체계의 중요성을 더 강조하며, 래시는 삶의 심미적 차원이 자아내는 새로운 지평에 강세를 주고 있다.

 

  이들에게 “세상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물음과 “나의 삶은 어떻게 변화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물음은 분리되지 않는다. 이 물음들에 다가서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어떤 투명한 길을 보물 찾듯 찾는 과정이 아니다. 불확실성으로 휘감긴 ‘후기 근대’는 모든 투명성이 종말을 고한 시대이다. 기존의 좌파처럼 사회주의라는 투명한 길을 전제로 하고, 특정한 지식에 의존해 사회를 가공하려는 사이버네틱 모델로는 적절한 치유책들을 발견할 수 없다. 이 경우 전체주의의 위험 수위는 크게 높아진다. 반대로 계획경제에 대한 시장의 승리에 감격한 나머지, 하이예크의 말대로 역사가 만들어낸 최선의 자생적 질서인 시장에 경외심을 가지고 모든 문제를 시장의 논리로 풀라고 권유하는 신자유주의는 ‘전지구적인 브라질화’ 또는 ‘2대 8의 사회’에 대한 방임으로 일관한다. 이들 역시 시장을 투명한 질서로 보는 나머지, 근대화의 유산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위험들과 대면하는 상황을 볼 수가 없다.

 

 

시민․대화민주주의 강조

 

벡 등에게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정치의 혁신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 다양한 주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통로를 확보하는 것이다. 자아 실현에서부터 구조 개혁에 이르기까지 ‘투명한 길’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치적 결정을 기다리는 영역은 급속히 늘어난다. 가족이나 성․기술․직업․라이프 스타일 등 비정치적인 것으로 간주되던 영역까지도 이제는 정치의 대상이 되었다.

 

  국가․이데올로기․종교․문화를 포함해 전통의 이름으로 자신을 보존하던 모든 것들이 탈(脫)전통화되고 재(再)전통화(새로운 관행과 제도로 굳어지는 것)되는 과정에서 정치는 일상화되고 있다. 이것을 기든스는 ‘생활정치’라는 개념으로, 벡은 ‘하부 정치’라는 개념으로 포착한다. 양자 모두 성찰적 근대화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는 다양한 영역에서 그 영역을 구성하는 사람들이 어떤 선택을 내리기 위해 대화하고 협상하는 데 터잡아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벡에게 이것은 여러 행위 주체들이 참여하여 협상하는 원탁 모델의 시민민주주의로, 기든스에게는 고도로 발달한 전문가체계의 지원을 배경으로 한 대화민주주의로 상정된다.

 

  래시에게 이것은 세계 내 존재들이 위험 환경 속에서 서로를 어떻게 보살피는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 삶을 둘러싼 환경의 복잡성과 위험을 심미적으로 신장시키는 문제로 제기된다. 세밀한 수준에서는 이론적 차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 사람을 연결시켜주는 것은 보다 나은 사회를 향한 꿈의 물질적 근거를 현실 안에서 찾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현실주의이다. 따라서 이 세 사람의 ‘성찰적 근대화론’은 세계화 시대의 사회학적․정치학적 상상력을 넓히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고전이 되고 있다.

 

박형준 (동아대 교수, 사회학) <hjpark@donga.ac.kr>

 

 

<울리히 벡>

 

약력
▶1944년 독일 슈톨프 출생. 뮌헨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뮌헨대와 런던정치경제대 교수를 겸하고 있음.

 

 

번역서
『위험 사회』(새물결, 1997).
『성찰적 근대화』(기든스.래시 공저, 1997).
『정치의 재발견』(거름, 1998).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정상적인 혼란』(새물결, 1999).
『아름답고 새로운 노동세계』(생각의나무, 1999).

 

 

<앤서니 기든스>

 

약력
▶1938년 영국 런던 출생. 헐대학를 졸업하고 케임브리지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음. 케임브리지대 교수를 거쳐 현재 런던정치경제대 학장으로 있음.

 

 

번역서
『포스트모더니티』(현상과 인식, 1993).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한울, 1997).
『제3의 길』(생각의나무, 1998).
『현대성과 자아정체성』(새물결, 1998).
『현대사회의 성, 사랑, 에로티시즘』(새물결, 1999).

 

 

<스코트 래시>

 

약력
▶1945년 미국 시카고 출생. 미시건대를 졸업하고 영국 런던정치경제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받음. 랭카스터대 교수를 거쳐 현재 런던대 골드스미스칼리지 교수 및 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음.

 

 

번역서
『기호와 공간의 경제』(현대미학사, 1997).

 

 

= ‘성찰’의 사회학적 의미

 

세계적인 비판사회학자들이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 본격적으로 가세하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이다. 문학 등 예술에서 시작된 이에 대한 논의는 80년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72)가 『미완의 기획으로서의 근대성』으로 포문을 열고 다른 사회학자들이 여기에 가세했다. 저마다 자신의 독창적 개념을 들고 나온 논객들 사이에 울리히 벡과 앤서니 기든스․스콧 래시가 있다. 이들은 근대성의 가치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이를 극복․재발견하고자 했던 점에 의기투합했고, 적잖은 공동작업을 통해 이를 가시화했다. 벡은 ‘성찰적 근대성’을, 기든스는 ‘후기 근대성’을, 래시는 ‘심미적 성찰성’을 앞세우며 상이점을 보이는 듯했으나 근대성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근대(벡의 말로는 ‘제2의 근대’)로 나아가는 돌파구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동질적이다.

 

  따라서 세 사람의 주장을 아우르는 키워드로 ‘성찰(省察)적 근대화’를 꼽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다만 벡에게서 비롯된 ‘성찰적’이란 말(독일어로 reflexiv)을 우리말로 옮김에 있어 ‘반환적(返還的)’ 혹은 ‘재귀적(再歸的)’이라는 표현이 보다 정확하다는 이론이 있으나, 제1의 근대-후기 근대-제2의 근대의 변증법적인 과정으로 이행한다는 점에서 ‘성찰적’에 무게를 두는 편이다. 벡은 산업사회․집단적 정체성․민족국가․노동사회 등을 특징으로 한 제1의 근대가 예측하지 못한 결과에 의해 약화되면서 새로운 근대성을 발전시키고 있다고 분석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71)도 이른바 ‘성찰적 사회학’을 제시했으나, 그가 말하는 성찰성은 우리 지식의 무의식적인 전제에 대한 체계적인 반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세 사람과는 구별된다.

 

  벡과 기든스, 래시 중 한국에는 벡과 기든스가 많이 알려졌다. 벡은 평이하면서도 구체적인 사례들로 사회현상을 날카롭게 분석한 일련의 저작들이 속속 번역되면서 대중의 관심을 끌었으며, 기든스는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정부가 좌파와 우파를 극복하는 ‘제3의 길’을 정책의 기치로 내걸자 그것의 이론적 제공자로서 조명을 받았다. 이는 두 사람의 이론에 대한 치밀한 접근과 이를 우리 현실에 적용하는 방식에 대한 모색보다 외적인 이미지에 감화된 측면이 많았다는 뜻으로, 앞으로 우리의 학계가 ‘성찰’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정재왈 기자).
 
 

  

4. 지젝의 정신분석학 ‘새로 읽기’(2001․5․24)

 

정신분석학은 ‘억압된’ 무의식에서 심리질환의 원인을 찾는다. 한때 서양에서도 정신분석학은 심리질환의 모든 원인을 성에서 찾으려 하는 ‘판섹슈얼리즘(pansexual -ism)’에 지나지 않는다는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지만, 이러한 오해가 불식되자마자 정신분석학은 서양 학문의 주도적인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굳혔다. 바야흐로 우리는 정신분석학의 시대에 살고 있다. 철학․예술 문화이론․사회이론 등 인문학 분야는 물론 심리학․정신의학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인간의 문제’를 다루는 분야에서 직간접적으로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학문분야는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분석학은 의식으로부터 억압된 ‘금지된 세계’ 즉 무의식의 영역에 눈을 돌릴 것을 꾸준히 요구하는 유일한 학문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억압은 두가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정신질환을 발생시키는 좁은 의미의 억압 즉 임상적 의미에서의 억압과, 넓은 의미의 억압 즉 정치적 사회적 억압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1856~1939)가 입증했고 자크 라캉(1901~81)이 다시 한번 확인했듯이 이 두가지 종류의 억압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의 치료는 억압된 무의식을 의식화함으로써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라캉에 따르면 증상이란 ‘전능한’ 타자(他者)에 대한 주체의 반작용으로서, 무의식의 세계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기호다. 그러므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철학사상에서 잘 드러났듯이, 서양 사회에서 정신분석학이 사회비판적인 여러 이론들과 결합해 ‘인간과 삶의 총체적 해방’을 추구하는 진보적 사상의 한 흐름으로 확고히 정착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주체와 구조 둘다 중시

 

최근 세계적으로 각광받고 있는 슬라보이 지젝(Slavoj Ziek)의 이론에 우리가 주목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 이론을 바탕으로 독일 관념론 철학(특히 헤겔)․마르크스․프랑크푸르트 학파, 그리고 대중문화(특히 영화)를 광범위하게 원용함으로써 정신분석학과 철학의 ‘수준 높은 대중화’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사상가다.

 

  지젝은 정신분석학과 철학을 접목시킴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관계라는 난제(難題) 앞에서 좌초한 기존의 사회이론에 대해 신선한 해답을 제공한다. 인간 주체의 사회 변혁능력을 강조하는 휴머니즘적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의 사회변혁능력을 과대평가한 나머지 사회 변혁을 통해 모든 사회적 억압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역사주의적 오류에 빠졌다. 지젝에 따르면 현실사회주의는 사회주의가 실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무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유하는, 제거될 수 없는 항구적인 억압적 현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전체주의 국가로 변해버렸다.

 

 

탈근대에도 합리성 지속

 

이와 반대로 구조주의적 마르크스주의는 구조적 변혁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 이론은 개인에 대한 구조의 우위성을 주장하므로 개인의 변혁 능력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는 문제점과 함께 주체의 내밀한 삶과 고통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이론적 도구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이 두 이론 유형에 대해 ‘라캉 - 지젝주의’는 과도한 보편화(구조주의)가 사회의 역사성을 숨긴다면, 과도한 역사화(휴머니즘)는 다양한 역사에서 항상 똑같이 반복되는 억압적 현실을 보지 못한다고 비판한다. 무의식적으로, 그리고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개인과 사회의 억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모든 변화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혹은 더 큰 억압구조를 출현시키고야 말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억압은 결코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구조적인 사실이다.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억압을 인정할 때만 해방의 이름으로 자신과 타인에게 가해지는 억압과 부정의(不正義)를 최소화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젝이 라캉 정신분석학과 더불어 주체의 자기반성(자기분석)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정신분석학적 의미에서 주체의 탄생은 자신의 무의식까지도 책임지는 주체로의 변화를 의미하며, 이러한 점에서 정신분석학은 근대 주체철학의 비판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체의 자기성찰이 실제적인 사회변혁을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주체의 자기성찰 없는 사회변혁은 궁극적으로 인간 해방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지젝은 라캉 정신분석학의 계몽주의적 합리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라캉 정신분석학의 포스트모던적 요소에 주목한다. 지젝에게 포스트모더니티(탈근대성)는 모더니티(근대성)에 이어지는 ‘새로운 단계’가 아니다. 마치 헤겔의 논리학에서 존재와 무(無)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매개되어 있는 것처럼, 포스트모더니티는 모더니티에 ‘필연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젝에게 포스트모더니티란 합리성이나 사회변혁의 희망을 포기한 비합리적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일상성 속에 내재해 있는 급진성의 체험이자 주체적․사회적 실천을 의미한다.

 

  지젝이 대중문화에 ‘강박적으로’ 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너무나 친숙해 비판의 대상이 되지도 못하던 일상이 갑자기 ‘섬뜩한 것’으로 느껴질 때, 비로소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근거 없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처럼 안락한 샤워실이 살인의 장소로 변할 때, 혹은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 ‘블루 벨벳’에서처럼 평화로운 마을의 풀밭에서 잘린 사람의 귀가 발견되었을 때 중산층의 안락한 생활이 무시무시한 폭력의 위협에 휩싸여 있음을 깨닫는다. 라캉 정신분석학에서 ‘실재의 충격’이라고 설명하는 이러한 체험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疎隔效果: 관객을 무대에 몰입하지 못하게 해 의식화를 이루려는 효과)’보다 더 급진적인 충격을 낳는다고 지젝은 본다.

 

 

구체적 삶에서 ‘희망’ 찾아

 

지젝이 대중문화에 끊임없이 관심을 갖는 또 하나의 이유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본질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을 없앰으로써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미적․성적 체험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지젝은 대중문화를 존중하고, 여기에서 사회변혁을 위한 희망의 단서를 발견하는 진보적인 학자다. 보다 나은 삶에 대한 희망은 우리의 삶과 동떨어진 공허한 이론에서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구체적인 문화적 현상으로부터 그 추동력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홍준기 (경희대 강사, 정신분석학) <junkh7@hanmail.net>

 

 

슬라보예 지젝은

 

▶1949년 슬로베니아 출생.
▶슬로베니아 류블랴나대에서 철학을 공부했으며 1980년대 초 프랑스 파리8대에서 정신분석학 박사 학위 받음.
▶80년대 류블랴나에서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립, 회장으로 일했으며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
▶90년 슬로베니아 첫 다당제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로 나섬.
▶현재 류블랴나대 사회과학연구소 상임 연구원 겸 독일 아헨대 초빙 교수.

 

 

<관련저작>

번역서
『삐딱하게 보기』(시각과 언어, 1995).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미번역서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 헤겔이 통과하다』(1988).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
『감히 히치콕에게 묻지는 못하지만 라캉에 관해 알고 싶은 모든 것』(편저, 1992).
『부정성과 함께 머무르기』(1993).
『향유의 전환』(1994).
『불안정한 주체 : 정치적 존재론의 부재하는 중심』(1999).


 

=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는…

 

슬라보이 지젝을 중심으로 하는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는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학의 메타심리학적 차원, 특히 정신분석학의 철학적 근거와 사회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어 연구를 수행한다. 메타심리학적 차원에서 정신분석학이란 단순한 치료 기술로서의 정신분석학을 넘어서는 포괄적인 문제를 제기한 학문이다.

 

  예컨대 신경증의 원인과 결과(신경증) 사이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인과관계의 본질, 정상과 비정상의 정의, 치료 혹은 분석의 목표, 정신분석학과 타학문(심리학․정신의학․철학․예술 등)의 관계, 신경증의 원인인 억압에서 가족과 사회의 역할 등의 탐구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메타(meta)라 한다. 여기에서의 정신분석학은 여타의 ‘심리치료’를 위한 학문과 같이 단순히 기술이나 효율성의 관점에서 통제적 혹은 교육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사회’의 관계란 무엇인가라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통찰하고 연구할 것을 요청한다.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의 창시자인 슬라보예 지젝은 구사회주의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 출신의 정신분석학자며 철학자다. 이 때문에 그를 중심으로 한 일단의 그룹은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로 불린다. 구사회주의 지역 출신답게 지젝은, 초기 저작인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1989)에서 잘 드러났듯이 ‘우파와 좌파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정신분석학과 사회이론을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는 점에서 지젝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알튀세르의 사상사적 흐름을 잇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이론적 관심이 단순히 좁은 의미의 사회심리학 혹은 정치철학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지젝은 자신의 연구영역을 영화와 대중문화․철학 등 광범위한 분야로 확대했고,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독특한 라캉론을 전개했다. 지젝의 학문적 성과 중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라캉 정신분석학을 헤겔 철학과 연결시켜 해석한 것이다. 이 점에서도 지젝은 변증법 전통을 중시하는 프로이트․라캉적 사고에 충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학이 말하는 ‘심리적 과정’은 자연과학적․의학적인 단선적(單線的) 사고에서가 아니라 헤겔 논리학에서 제시된 변증법적 차원을 통해서만 설득력있게 해명될 수 있다는 것이 지젝의 핵심적 주장 중 하나다.

 

  라캉 정신분석학을 독일 관념론 철학․영화․대중문화, 그리고 이데올로기 비판 등 다양한 분야에 적용한 지젝의 학문적 업적은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으며, 영미권은 물론 유럽학계에서도 널리 수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특히 젊은층들 사이에서 지젝은 영화와 대중문화에 대한 그의 정열로 인해 ‘컬트 인물’로도 통하고 있다. 지젝은 현재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 사회과학연구소의 상임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돌라르․리나․보스비치․주판치치․살레클 등과 같은 류블랴나대 및 사회과학연구소의 동료.제자들로 구성된 슬로베니아 라캉 학파를 주도하고 있다. 독일의 아헨대 초빙교수로도 활동 중이다.

 

한국의 ‘라캉과 현대정신분석학회’는 올해 라캉 탄생 1백주년을 맞아 그를 초빙해 강연회를 열 계획을 갖고 있다(홍준기).

 

 

 

5. 스피박의 ‘서구 배움에서 벗어나기’(2001․5․31)

 

1980년대 이후 서구 지식계의 저항 담론 가운데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탈식민 이론의 선두 주자중 하나인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Gayatri Chakravorty Spivak)을 이 짧은 지면에서 소개하는 것은 참 어렵다. 60년대 이래 형성된 탈구조주의․후기마르크시즘․페미니즘 등을 근간으로 하여 그러한 이론의 한계를 극복하려 하고 있는 스피박은 이론적 입장이나 정치적 입장이 복잡하기 짝이 없고 그의 글 또한 무척 난해하기 때문이다.

 

  스피박에 관한 일화가 하나 생각난다. 미국에서 내가 다녔던 대학(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 에서 스피박이 강연한 적이 있다. 그 강연에서 한 교수가 스피박에게 당신의 글은 왜 그리 읽기 어렵냐고 질문했다. 그러자 스피박은 자신의 글이 읽기 어렵다고 생각하면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이 없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말하자면 자기 글을 읽어 이해할 능력이 없다면 대학교수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사실 이 백인 교수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스피박의 글이 어렵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제3세계 출신의 여자가 미국의 백인 남자 교수에게 당신은 교수 자격이 없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무례하기 짝이 없는 이러한 대답이 사실은 스피박의 입장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스피박은 서구 지식체계 내에서 제3세계 출신이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서구 지식인들이 형성하는 서구 이론에 도전하고 저항하며 극복하는 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스피박은 1942년 인도의 캘커타에서 출생하여 캘커타대를 졸업한 뒤 미국의 코넬대에서 공부했다. 이곳에서 대표적 해체론자인 폴 드 만을 만났고 그를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학위를 받은 후 아이오와․피츠버그대 등을 거쳐 현재는 컬럼비아대 석좌 교수로 있다. 스피박이란 이름은 결혼했다가 헤어진 미국인 남편 탤벗 스피박의 성을 따른 것인데, 이혼한 남편의 성을 그대로 쓰는 이유는 미국에서 자신의 저술 활동을 스피박이란 이름으로 시작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스피박을 일컬어 흔히 해체론자․마르크스주의자․페미니스트라고 한다. 그러나 그를 수식하는 이 세 가지 형용어 각각이 그의 지적 작업의 특성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해체이론가로서 그는 텍스트를 분석하는 자크 데리다나 폴 드 만 등과 달리 해체이론의 틀을 현실을 분석하는 도구로 삼음으로써 해체이론을 정치화한다.

 

  전통적인 마르크시스트들이 계급문제를 중심으로 현실을 분석함으로써 계급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성(性)이나 인종 문제 등을 도외시하는 것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의 틀을 갖추면서도 주변부-특히 주변부 여성-의 문제를 이론화하려 한다.

 

  페미니스트로서 그는 정교하게 이론화한 페미니즘 이론이 비서구 여성을 오히려 억압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서구의 페미니즘을 비판한다. 서구의 일반적인 이론적 틀로써 설명할 수 없는 스피박의 이와 같은 입장은 자신이 인도라는 제3세계 출신의 여성임을 의식하는 자의식으로부터 나온다.

 

 

‘주변부’ 목소리 복원

 

서구의 고급 이론으로 무장하여 지적 작업을 하고 있고, 현실 생활에서 또한 유수한 대학의 교수라는 것은 그가 특권적 삶을 살고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스피박은 이러한 특권을 ‘오염’으로 인식한다. 서구의 고급 이론은 일반적으로 세계를 분석하는 정교한 틀을 제공하지만, 그러한 이론틀이 편견을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서구의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서구 이론틀의 이러한 한계를 동시에 의식하는 것은 그로 하여금 서구의 ‘배움에서 벗어나기(unlearning)’라는 이론적 입장을 갖추게 했다. 스피박에게 ‘배움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두 가지의 태도로 나타난다. 하나는 고급 교육을 받았고 교수와 같은 특권적 위치에 있는 자신이 그 특권적 위치 때문에 특권에서 배제된 하층민이나 주변부 사람들의 삶에 대해 알지 못한다는 자의식을 갖는 것이다. 이 자의식은 인종적․계급적․성적 의미에서의 중심에서 배제된 타자(他者) 들-백인에 대한 타자는 유색인, 부르주아의 타자는 하층민, 남성의 타자는 여성-에 대해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의식하는 태도다.

 

  이는 타자에 대해 경험적으로 모른다는 것뿐만 아니라 정치․경제․문화․이데올로기에 작용하는 사회적 구조에 의하여 타자에 대한 지식의 습득이 방해받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심부 집단에 의하여 발언이 봉쇄되어 침묵을 강요당한 이러한 타자의 목소리를 되살리려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침묵이 된 타자의 목소리의 복원은 이런 타자에 대한 ‘말걸기’와 또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이루어진다고 스피박은 생각한다.

 

 

지배적 담론의 ‘훼방꾼’

 

스피박은 침묵이 강요된 타자의 대표적 존재로서 제3세계의 하층민 여성을 꼽는다. 제3세계의 하층민 여성은 서구의 제국주의에 의하여 그리고 제3세계 내의 가부장제도에 의해 이중으로 억압당하며 목소리를 잃고 있기 때문이다. 스피박은 이와 같은 제3세계 여성의 목소리를 어떻게 찾아내는가에 주의를 기울인다. 서구의 배움에서 벗어나서 제3세계의 여성에게 말을 걸고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침묵되어진 제3세계 여성의 위치를 단순히 옹호하여 대변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 말은 이미 취득한 서구의 이론을 이용하여 서구의 담론이 어떻게 이데올로기적으로 제3세계인을 식민인(植民人)으로 구성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을 뜻한다.

 

  제3세계 출신 이론가로서 스피박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의식을 가지며 그 특권적 위치를 자신의 출신 지역의 억압받는 하층민과 연결하려는 노력을 통해 지배적 서구 담론이 일방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게 하는 ‘훼방꾼’ 같은 지식인이다. 이러한 저항의 방식은 서구 중심의 교육과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우리의 교육현장과 지식 생산의 현장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저항 전략을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고부응 (중앙대교수, 영문학) <bekoh@cau.ac.kr>

 

 

스피박은

▶1942년 인도 캘커타 출생.
▶59년 캘커타대 졸업(영문학) .
▶61년 미국의 코넬대로 유학, 67년 폴 드 만을 지도 교수로 하여 W. B .예이츠 연구로 박사 학위 받음.
▶박사과정 때부터 시작해 아이오와․텍사스․피츠버그대 교수로 활동.
▶94년~현재 컬럼비아대 석좌교수.

 

 

<관련저작>

 

미번역서
『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1976) : 자크 데리다의 De la Grammatologie를 영어로 옮긴 것으로 자기 반성적 역자 서문은 지식사의 이정표가 됨).
『타자의 세계에서 : 문화정치학에 대한 에세이』(1987).
『서벌턴(Subaltern)을 말할 수 있을까』(1988).
『탈식민 비평가』(대담집, 1990).
『교육기계안의 바깥』(1993).
『탈식민 이성비판 : 소멸하는 현재의 역사를 위하여』(1999).


 

= 탈식민주의론을 둘러싼 논쟁

 

동양 출신으로 서구 지성계를 압도한 탈(脫)식민주의론자 중 흔히 ‘삼총사’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오리엔탈리즘』(1978년)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본지 1월 18일자 13면 ‘세계 지식인 지도’ 참조)와 스피박, 그리고 호미 바바(Homi Bhabha, 52․시카고대 교수)가 그들이다. 사이드는 중동(中東)의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으며 스피박과 바바는 인도 태생이다. 세 사람 모두 미국에서 활동 중이다.

 

  최근 이들을 중심으로 한 서구의 탈식민주의 연구는 전통적인 학제 편성이나 문화분석의 양식을 변화시키면서 여러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의 권위가 높아지고 서구의 제도권 학계에 편입됐다는 ‘의구심’이 짙어지면서 이론과 비평을 구분해서 봐야 한다는 시각이 대두하기 시작했다. 쉽게 말해, 예의 ‘삼총사’는 자크 데리다나 자크 라캉․미셸 푸코로 대표되는 프랑스 사상가들의 ‘고급 이론’에 의존한 탈식민주의 이론가이지 비평가는 아니라는 것이다. 인도 출신의 마르크스주의자인 아이자즈 아마드와 터키 출신 중국학자인 아리프 덜릭(듀크대 교수) 등 비판자들은 이들의 탈식민주의 이론이 서구 학계의 주변이 아닌 주류로 편입되면서 이른바 ‘탈식민주의 비평’이 지닌 전복적 성격을 상실했다고 지적한다.

 

  최근에 번역돼 나온 『탈식민주의! 저항에서 유희로』(이경원 역, 한길사)는 이 ‘삼총사’의 이같은 이론적 변이(變移) 과정(즉 저항에서 유희로)을 날카롭게 분석한 책으로 흥미롭다. 영국 런던대 골드스미스 칼리지 교수인 저자(바트 무어-길버트)는 이 이론가들의 대립항으로 ‘탈식민주의 비평가’들을 놓고 그들의 이념적 기반의 우수성을 설명했다. 즉 20세기 초 유럽의 인종주의와 식민주의 이데올로기에 맞서는 범(汎)아프리카주의를 역설한 미국의 흑인 사상가 W. E. B. 뒤부아(1868~1963, 하버드대 최초의 흑인 박사로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에 큰 영향을 미침)를 비롯해 ‘흑인 정체성 회복운동(네그리튀드)’을 일으킨 프랑스의 에메 세제르(88)와 세네갈의 정치가이자 시인인 레오폴드 세다르 셍고르(95), 알제리의 민족해방운동가인 프란츠 파농(1925~61), 문학을 통해 아프리카의 식민주의 유산의 청산에 앞장서온 치누아 아체베(71, 나이지리아의 소설가), 응구기 와 티옹고(63, 케냐의 소설가), 월 소잉카(67, 나이지리아의 작가로 86년 노벨 문학상 수상) 등이 이런 ‘비평가’들이다.

 

  ‘삼총사’들은 이들의 이념적․이론적 기반을 무시하거나 거세해 버림으로써 탈식민주의를 포스트모더니즘의 ‘입양아’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일례로 스피박은 인도의 하위계층 여성을 내세워 서구 페미니즘을 공격하지만 정작 네그리튀드 등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탈식민주의 이론이 급진적이고 해방적인 형태의 문화적 실천이 아니라 오히려 최근의 신(新)식민주의적 세계 질서의 성향이나 기획과 공모관계에 있다는 주장이다. 아무튼 사이드를 제외한 스피박이나 바바의 탈식민주의론은 국내에선 아직 생소하다. 주로 영문학이나 페니미즘 연구자들이 초보적인 수준에서 소개하는 정도다. 국문학에서는 이를 민족문학과 접목하려는 시도(원광대의 한정일․김재용 교수 등)가 있긴 하다. 그러나 아직 별도의 번역.연구서가 없다는 게 낮은 이해도를 말해준다. 앞으로 이들의 존재와 주장이 폭넓게 알려져야 비슷한 탈식민주의에 고민하고 있는 우리 사회에 어떤 지침으로 활용될지 여부가 판가름날 것 같다(정재왈 기자).

 

 

 

6.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기수들(2001․6․7)

 

  서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논의가 가장 활발하게 전개돼 온 분야가 건축이었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1970년대 이후 건축계에선 모더니즘의 실패를 지적하면서 그에 대한 가시적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예술분야에 비해 포스트모더니즘 논의를 대중적으로 더 설득력 있게 전개해 왔다. 잘 알려져 있듯이 20세기 초 등장한 모더니즘 건축은 장식을 배제한 기계 미학과 기능주의로 근대사회의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60년대부터 이미 미국과 유럽에서는 모더니즘의 획일성과 비인간성을 비판하고 도시공간의 다의성(多義性) 회복과 역사적 문맥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경향이 등장한다. 미국에서 근대의 기능주의적 도시계획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비판한 사람은 제인 제이콥스(85, 여)였다. 그는『위대한 미국 대도시의 죽음』(1961)에서 엄격한 용도구역제를 실시하고 차와 보행자의 동선을 분리하는 거대한 블록위주의 근대적 도심재개발 방식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생명력 있는 장소로서 다양한 기능이 혼합된 작은 블록과 가로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또 미국의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76)는『건축의 대립성과 복합성』(1966)에서 2차 세계대전 후 상업적 근대건축의 규범적 형식으로 발전한 모더니즘의 거장 미스 반 데어 로에(1886~1969)의 건축을 대중과 교감할 수 없는 무미건조한 엘리트주의라고 비판하고, 상징과 장식의 부활을 주장했다. 60년대 유럽에서도 이탈리의 알도 로시(70) 와 벨기에의 크리에 형제-롭(63)과 레온(55)- 같은 건축가는 기능주의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 건축의 비인간화를 비판하고 역사적 문맥과 조화되는 전통적 유형의 건축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작품보다 텍스트로 접근

 

60년대 이후의 이러한 반(反)모더니즘 건축의 경향을 하나로 정리해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론을 세운 대표적인 논객은 찰스 젱크스(62)다. 그는 77년 『포스트모던 건축의 언어』와 그 후 출판한 일련의 저작에서 모더니즘 건축의 종결과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시대를 선언했다. 특히 58년 건설돼 미국 건축가협회 상을 받았던 대표적 근대 건축물인 세인트루이스의 푸르이트 이고(Pruit Igoe) 집합주택단지가 사람이 살수 없는 슬럼으로 변해 72년 철거된 사건을 젱크스는 모더니즘의 죽음과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을 알리는 극적인 순간으로 기록했다. 그는 현대사회에서는 모더니즘의 단일성과 기계적 획일성에서 벗어나 전통과 근대가 공존하고 상징과 장식이 부활한 포스트모던 건축의 다양성과 풍부함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건축이 주장한 역사로의 복귀는 현실적으로 시간성이 혼재된 정신분열적인 역사양식의 혼성모방에 그칠 수밖에 없다. 근대적 구조물에 덧붙인 고전장식이나 역사적 건축양식의 재생은 현대사회에서 피상적인 이미지로 존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포스트모던 건축은 역사와 양식이 붕괴된 현대사회의 상황을 역설적으로 웅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역사로 회귀해 이러한 정체성의 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노스탤지어적 충동에 불과한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논의를 양식적 의미를 넘어서는 인식론적 문제로 한 차원 높인 것은 후기 구조주의 철학의 공로이다. 후기구조주의는 모더니즘의 단일성을 거부한다는 점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일하지만 양식적 대안을 추구하는 대신 모더니즘의 근저에 있는 근대적 주체(Subject)와 근대의 서사구조(Narrative), 그리고 재현(Representation)과 같은 인식론적 문제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포스트모던 건축이 보여주는 역사의 상실과 탈(脫)중심화는 후기구조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모더니즘의 인식론에 대한 비판이자 포스트모던의 문화적 반영이다. 예를 들어 미국의 문예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67)은 『포스트모더니즘: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84년)에서 로스앤젤레스의 보나벤투라 호텔에 배태돼 있는 깊이와 역사성의 상실, 표면에의 집착, 그리고 정신 분열적 현상을 건축에 나타난 탈근대의 특징으로 들고 이것을 후기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로 설명하고 있다.

 

  후기구조주의적 포스트모던 건축의 주창자들은 양식적 포스트모더니즘과 달리 현대사회에서 건축이 어떻게 저항적일 수 있는가를 과제로 삼는다. 이들은 건축을 하나의 작품보다는 텍스트(건물의 다양한 의미 등)로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여기서 포스트모던 건축은 역사양식의 혼성모방이 아니라 다양한 해석에 열려 있는 다층적 공간이 된다. 프랑스의 해체 철학자 자크 데리다와의 공동작업으로 유명한 피터 에이젠만(69)이나 베르나르 추미(57) 같은 건축가들의 이른바 해체주의 건축은 바로 이러한 근대의 단일성과 중심성에 저항하는 건축의 실천이다.

 

 

탈중심의 다층적 공간

 

하지만 이러한 인식론적 실천으로서 건축이 현실에서 어떤 저항적 역할을 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이탈리아의 저명한 건축사가인 만프레도 타푸리(1935~94)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디자인을 통한 비판적 건축의 불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 그는 모더니즘의 실패 이후 어떠한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의 시도도 중심적 언어를 상실한 모더니즘 상황의 연장에 불과한 것이며, 독일의 사회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72)와 같이, 이러한 분열적 상황의 영속화를 꾀하는 체제 순응적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98)와 같은 저항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가들은 여전히 포스트모던 건축의 실천이 모더니즘의 단일 시점과 획일성을 비판하고 의미의 다중심성을 드러내는 저항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러한 저항적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론을 지지하는 입장은 주로 유럽 대륙에서 나타나는 반면 상업적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은 주로 영국과 미국에서 제기된다는 것은 흥미롭다.

 

  이런 점에서 양식적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이 80년대 미국의 레이건 정부와 영국의 대처 정부로 대표되는 신보수주의 이데올로기와 연결돼 있으며, 역사를 상품화된 ‘키치(kitsch, 조잡함 속에서 미를 찾는다는 의미에서)’로 만드는 후기자본주의 시장메커니즘에 지배되고 있다는 학자들의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이상헌 (건국대교수, 건축학) <sanglee@konkuk.ac.kr>
 

 

= ‘포스트모더니즘’ 국내 건축계에서는…

 

국내 건축계에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촉발된 것은 1982년 독립기념관 설계 공모를 통해서였다. 거대한 한옥지붕을 얹은 현재의 안(案)이 당선돼 모더니즘의 교의(敎義)에 충실했던 당시 건축계에 파장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서구 건축계의 동향에 민감한 국내 건축계에는 이미 포스트모던 건축 이론의 기본서들이 들어와 있었지만, 실무 건축계에서 과감하게 ‘(과거 건축의 양식 등을 도입한) 역사적 상징의 인용’이라는 탈(脫)근대적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기는 쉽지 않았다. 추상적 순수 형태를 고집했던 모더니즘의 눈으로 본다면, 기와지붕이라는 전통적 요소를 차용하는 행위는 시대착오적인 퇴행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 지식계와 문화계가 설정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바로 ‘진정한 근대화’였고, 그 연장선상에서 80년대 건축계의 화두는 ‘우리에게 근대란 무엇인가’였다. 건축의 사회적․공공적 역할, 건축가의 자의식이 반영된 작품으로서의 건축물, 편리함과 기능성을 보장하는 합리주의적 태도 등을 강조했던 학계와 건축계에서는 “아직 모더니즘도 성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포스트 모던은 무의미하다”는 강한 비판이 주류를 이뤘다. ‘근대를 넘어서’라는 의미의 탈근대란 근대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정당한 비판이었다. 그러나 비록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독재적인 전체주의 사회였지만, 경제 구조는 근대적 성격을 지나 후기 자본주의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문화계에서는 이미 가벼움과 일상적 쾌락이 주된 예술의 가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정치적 전근대와 경제적 근대, 문화적 탈근대가 혼재해 있는 한국의 사회적 현상 자체가 포스트 모던의 양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서구적 의미의 근대-탈근대의 순차적인 전개가 역사 경험이 전혀 다른 한국에서는 오히려 불가능한 형식논리였다. 90년대 세계화 이데올로기는 건축계의 개방을 가속시켰고, 후기 구조주의 철학과 해체주의 건축이 소개돼 건축의 변화 폭을 확대했다. 그러나 늘 그러했듯이, 지식이 일천한 건축계는 해체주의 건축을 인식론적 차원이 아닌 형태적인 경향으로 수용했다.

 

  주체의 죽음, 거대 서사의 허위성 폭로, 단선적 역사관의 부정 등 근원적인 세계관에 대한 논쟁은 나타나지 않고, 해체주의적 경향의 건축물들이 각종 설계 공모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건물 윤곽은 비틀리기 시작했고 철 파이프와 유리 등 이질적 재료들이 혼용되는, 이른바 ‘해체주의 양식’의 건축이 유행하기도 했다. 탈근대적 인식이 상업주의와 결탁하면 싸구려 키치로 전락해 도시와 건축의 환경을 훼손하게 된다. 한국적 포스트모더니즘 건축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이다. 그러나 긍정적인 면도 적지 않다. 중심의 해체를 전제로 하는 탈근대적 사유는 지역주의 건축을 가능케 한다. 국내 의식있는 건축가들이 추구하는 한국성(性) 재해석 작업, 일상 속의 잠재력 재발견 노력 등은 휘청거리는 현실의 유일한 희망이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건축학)

 

 

 

7. 카오스와 복잡계과학의 선구자들(2001․6․14)

 

최근 ‘복잡계 (complex system)’란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진화, 면역, 뇌, 생물집단, 생태계 등 생물학 분야뿐 아니라 인구문제, 지구 온난화, 산림 감소 등 지구환경계, 주식시장, 환율 등 시장경제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현대 주류 과학의 외곽에서 거대한 소용돌이를 만들어온 복잡계의 패러다임을 이제 피해갈 수 없게 됐다.

 

  복잡계는 여러 구성 요소로 이루어진 집단에서 각 요소가 다른 요소와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하는 체계다. 한 예로 뇌는 1천억개의 신경소자들이 연결된 회로망으로 대표적인 생체복잡계다. 이 경우 각 소자는 생성된 신호를 서로 주고받으며 함께 규칙적 리듬을 만들어내거나 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패턴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뇌는 각 신경소자의 단순한 신호 생성 움직임을 넘어서 인간 인지활동의 기반이 되는 다양하고 복잡한 패턴을 회로망 위에서 새롭게 생성해 낸다. 이런 점에서 복잡계는 ‘부분의 단순한 합이 전체가 아니다’는 격언으로 대변되기도 한다.

 

  초기에 복잡성의 연구는 고전역학의 ‘결정론적 세계관’(현재 상태가 주어지면 미래가 유일하게 결정됨)과 20세기 초에 크게 발전한 양자역학 및 통계역학에 기초한 ‘확률론적 세계관’(주사위 던지기처럼 미래가 확률적으로 주어짐)의 내재적 갈등구조를 해결하려는 시도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주는 연구로 폭발적안 성장을 한 비평형계 과학(안정된 평형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체계를 연구하는 과학) 과 카오스이론을 들 수 있으며, 복잡계를 연구하는 과학은 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결정론적 세계관 마침표

 

카오스는 외관상 매우 불규칙하고 예측 불가능해 보이지만 그 이면에 어떤 규칙성이 숨어있는 운동을 일컫는다. 카오스는 20세기 초 쥘 앙리 푸앵카레(1854~1912, 프랑스 수학자)가 태양․달․지구와 같은 세개 물체의 운동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처음 인지되기는 했지만 이 연구는 한동안 자연과학의 주변적 분야에 머물렀다. 1963년 에드워드 로렌츠(84, 미 MIT 명예교수)라는 한 기상학자가 기상현상의 모형에서 카오스 이면의 규칙성 구조(많은 경우 운동이 여기로 끌려간다는 점에서 ‘끌개’라고 불림)를 발견한 것은 카오스 연구의 돌파구를 마련한 놀라운 사건이었다.

  1970년대 말 천재적 물리학자인 미첼 파이겐바움(56, 미 록펠러대 석좌교수)은 생태계의 한 모형에서 발견된 수학적 카오스가 많은 자연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남을 보여주는 엄밀한 이론적 연구를 통해 카오스 연구가 과학의 주류에 편입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80년 이후 다양화한 카오스 연구의 초기 흐름에 한국의 국형태(경원대)․이경진(고려대)․박혁규(부산대) 교수 등과 필자가 동참했다.

 

 

혼돈에 숨어있는 규칙성

 

초기 카오스 연구의 발전과정에서 전세계적으로 많은 작은 그룹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 흥미로운 발견과 새로운 분야의 형성을 선도해 나갔다. 이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집단은 미국 산타크루즈대의 도인 파머(49, 샌타페이연구소 석좌교수)․노만 패커드․제임스 크러치필드(샌타페이연구소 연구교수)․로버트 쇼 등 4인방의 ‘역학계 연구집단’이다.

  이런 카오스 연구의 주류 그룹과는 독립적으로 일리야 프리고진(84, 1977년 노벨 화학상 수상)은 70년대 이후 생체계와 같이 평형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비평형계의 선도적 연구를 수행하며 벨기에의 브뤼셀학파를 형성해 왔다. 그의 비평형계 연구결과는 별로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노벨상 수상 이후 카오스 연구의 발전과 접목되어 세계적인 각광을 받기 시작하였다.

 

  복잡계 과학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국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샌타페이에 있는 샌타페이 연구소(84년 설립, 초대 소장 조지 카우언) 이다. 이 곳은 머리 겔먼(72, 1969년 노벨 물리학상)․필립 앤더슨(78, 1977년 노벨 물리학상)․케네스 애로(80, 1972년 노벨 경제학상)와 같은 세계적 석학들이 자유롭고 새로운 연구를 지향하는 학제적(學際的) 연구소를 만들고자 하는 구상에서 출발했다. 현재 샌타페이 연구소는 계산과학․진화론․면역학․뇌과학․경제학․사회학․과학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며 이를 복잡계라는 새로운 학제적 시각으로 통합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스튜어트 코프먼(62)은 샌타페이연구소의 이론생물학자로서 생명과 분자수준의 자기조직 현상(복잡계의 각 구성 단위들이 스스로 패턴을 만들어 가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자기조직화가 가능한 네트워크를 연구해 왔다. 그는 복잡계가 질서와 카오스의 경계인 ‘카오스의 가장자리’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 카오스의 가장자리 영역은 마치 생체계처럼 혁신성과 안정성, 경쟁과 변혁의 장을 제공하는 절묘한 균형점이다. 브라이언 아서(55)는 샌타페이연구소의 복잡계경제학 프로그램의 첫 연구 책임자로서 금융시장에서 작은 마구잡이성 사건들이 크게 증폭될 수 있으며(양의 되먹임), 생산규모가 커짐에 따라 평균비용이 줄어들 수 있음(수확체증)을 주장하며 기존 경제학의 가설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복잡계 경제학은 규모에 따른 수확체증과 인간의 제한적 합리성에 기초해 불안정성과 동역학, 인간의 인지활동을 중시하고 하이테크산업 등 신(新)시장금융계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도하고 있다.

 

 

안정․변화의 절묘한 조화

 

복잡계의 과학은 전통적인 과학관에 대한 단순한 반란에서 나아가 비평형성과 불안정성을 다루는 비선형과학(입력에 대해 출력이 비례해 나타나지 않는 현상을 연구하는 과학)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무장하고 주류과학의 대안으로 대두되고 있다. 아직 복잡계 연구는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응용이 많지 않은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지만 우리는 이제 복잡계 과학이란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김승환 (포항공대 교수, 물리학) <swan@postech.ac.kr>

 

 

= 프리고진과 브뤼셀학파

 

벨기에의 화학자인 일리야 프리고진(Ilya Prigogine)은 비평형 통계역학 분야의 전문가 가운데 일반인들에게도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프리고진의 과학사상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Order out of Chaos)’라는 말이 잘 요약하고 있다. 그는 모든 수준에서 비평형은 질서의 근원이라고 말한다. 즉 비평형과 비가역성(非可逆性) 은 모든 수준에서 질서의 근원이며,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다주는 기구라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태어난 프리고진은 러시아 혁명과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기에 휘말려 벨기에 브뤼셀에 정착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전과 고고학․문학․철학 서적을 섭렵했으며, 법률가가 될 꿈을 가지기도 했다. 브뤼셀 자유대학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한 그는 41년 ‘비가역 현상에 관한 열역학적 연구’라는 제목으로 같은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때부터 비평형 통계역학을 지속적으로 연구한 그는 77년 이에 대한 공헌으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 세계적으로 주목받게 됐다.

 

  프리고진 과학의 핵심적인 내용은 ‘소산(消散) 구조(dissipative structure)’와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에 대한 이론이다. 평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불안정한 비평형 상태에서 미시적인 요동의 효과로 거시적인 안정적 구조가 나타날 수 있는데, 프리고진은 이때 나타나는 안정적 구조를 소산구조라고 하고 이런 과정을 자기조직화라고 불렀다. 소산구조와 자기조직화가 바로 카오스로부터 질서를 가져다 주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프리고진은 브뤼셀 자유대학 교수 및 국제 물리․화학연구소 소장, 미국 텍사스대(오스틴 소재) 물리․화학공학 교수 및 통계역학․열역학․복잡계 연구센터 소장으로 오랫동안 재직하며 활발한 연구활동을 통해 이른바 ‘브뤼셀 학파’를 형성했다.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해 국내 물리학자․화학자․과학사상가들과도 폭넓게 교우하며 많은 영향력을 끼치기도 했다.

 

  프리고진의 과학사상은 전체적으로 볼 때 비결정론적․유기체적․생태론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동양의 시간 개념과 유사한 측면이 엿보이기도 한다. 프리고진은 존재 그 자체를 시간과 독립된 정해진 현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혼돈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존재의 본질이 발현된다고 생각한다. 프리고진은 동양사상뿐 아니라 칸트․헤겔․베르그송․화이트헤드․하이데거 등의 서구 철학에서도 자신의 사상의 원류를 찾고 있다. 카오스 이론을 포함한 프리고진의 과학사상은 포스트모더니즘․페미니즘․생태주의 사상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문예비평가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1924~98)는 폴란드 출신의 수학자 베노이트 만델브로트(77)와 프리고진의 과학적 업적이 포스트모던한 과학지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생태페미니즘 과학사가인 캐롤린 머챈트는 비결정론적인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는 카오스 이론의 부상이 기계적인 세계관을 거부하는 새로운 생태주의적 사고 방식의 도래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 과학사)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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