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1904-1997)은 위대한 맑스주의자이며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이며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이며 중국 사회주의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총설계사이며 등소평리론의 창시자이다.
1904년 8월 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태여났다. 원명은 등선성이고 학생시절에는 등희현이라고 불렀다. 다섯살에 입학하여 고급소학교를 졸업한 뒤 광안현중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가을, 중경 근공검학 프랑스류학예비학교에 들어갔고 1920년 여름에 프랑스에 가 근공검학하였다. 19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1924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으며 1926년 초반 쏘련에 가 학습했다.
1927년 봄 귀국하여 서안 풍옥상국민련합군에서 정치사업에 종사했다. 제1차국공합작이 파렬된 뒤 등소평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8월 7일 무한에서 중공중앙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년말에 중앙기관을 따라 상해로 옮겨갔다. 1928년-1929년 중공중앙 비서장 직무를 담임했다. 1929년 여름 중앙대표 신분으로 광서에 가 기의를 령도, 등빈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며 장운일 등과 함께 12월과 그 이듬해 2월 선후로 백색기의와 룡주기의를 발동했으며 중국로농홍군 제7군단, 제8군단과 좌강, 우강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홍7군단, 홍8군단 정치위원과 전적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했다. 1931년 여름, 강서중앙근거지에 가 선후로 중공 서금현위 서기, 회창중심현위 서기, 강서성위 선전부장 직무를 담임했다. 모택동의 정확한 로선을 옹호하였기에 당시 당내 《좌》경 지도자에 의해 면직당했다. 그뒤 홍군 총정치부 비서장, 총정치부기관지 《붉은 별》의 주필을 담임했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에 참가했으며 년말에 중공중앙 비서장 직무를 담임했다. 1935년 1월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준의회의)에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중앙령도기구를 확정했다. 그뒤 홍1군단 정치부 선전부장, 정치부 부주임, 주임 직무를 담임했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뒤 국민혁명군 제8로군 정치부 부주임 직무를 담임했다. 1938년 1월,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 직무를 담임하고 사단장 류백승과 함께 화북의 적후에 깊이 들어가 태항, 태악 등 항일근거지를 창설했다. 1942년 9월, 중공중앙 태항분국 서기 직무를 겸임하고 1943년 10월, 중공중앙 북방국 서기 직무를 대행하였으며 팔로군본부의 사업을 주관하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화북적후항일근거지 당정군의 전면 사업을 책임졌다. 1945년 중공 제7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해방전쟁시기 중국인민해방군 진기예로야전군, 중원야전군, 제2야전군 정치위원, 진기예로중앙국 서기, 중원국과 화동국 제1서기 직무를 담임했다. 1945년 9월부터 11월까지 류백승과 함께 상당전역과 한단전역을 지휘했다. 1947년 여름 그들은 부대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대별산지역으로 진격하여 국민당군대에 대한 인민해방군의 전국적 전략진공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해방전쟁의 전략적 결전단계에 중원야전군과 화동야전군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총전적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하였으며 두 야전군의 령도자와 함께 회해전역, 도강전역을 지휘하여 국민당정부 수도 남경과 상해, 강소, 절강, 안휘, 강서 등 광대한 지역을 공략했다.
1949년 9월, 그는 중앙인민정부 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개국대전에 참가했다. 10월,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직무를 담임했다. 뒤이어 류백승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서남지역으로 진격하여 운남, 귀주, 사천, 서강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고 서장진군과 서장 평화적 해방사업에 참가했으며 중국대륙의 완전한 해방을 실현했다. 이 기간 중공중앙 서남국 제1서기,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 서남군구 정치위원 직무를 담임했다.
1952년 7월 중앙으로 전근하여 사업했으며 중앙인민정부 정무원(1954년 국무원으로 개칭)부총리 겸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 직무를 담임했고 그뒤 또 정무원 교통사무실 주임과 재정부 부장 직무를 겸임했다. 1954년 중공중앙 비서장, 조직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 직무를 담임했다. 당을 분렬하고 당과 국가 최고권력을 찬탈하려는 고강, 요수석의 음모를 반대하는 중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55년 4월, 중공 제7기 5차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추가선거되였다. 1956년 9월, 중공 제8차전국대표대회에서 당규약개정에 관한 보고를 진술했다. 제8기 1차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당선되여 모택동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제1대 지도그룹의 중요한 성원으로 되였다. 1959년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상무위원 직무를 담임했다. 총서기 직무를 담임한 10년간 중앙 주석, 부주석을 협조하여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면서 사회주의제도의 정립과 발전을 위하여, 중국국정에 알맞는 사회주의건설의 길을 탐색하기 위하여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1956년-1963년, 모스크바를 여러번 방문하여 쏘련지도자와 담판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독립자주의 원칙적립장을 견결히 수호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뒤 일체 지도직무를 박탈당했다. 1969년-1973년기간 강서성 신건현 뜨락또르수리제조공장에 내려가 로동했다. 1973년 3월, 국무원 부총리 직무를 회복했다. 1974년 4월,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유엔 제6차특별회의에 참석, 회의에서 3개 세계 획분에 관한 모택동의 리론을 체계적으로 천명했다. 그는 주은래가 제4차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진술한 《정부사업보고》 작성작업을 주관했다. 1975년 1월, 중공중앙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위 부주석과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직무를 담임했다. 주은래가 병환이 심각해진 뒤 모택동의 지지하에 그는 당, 국가와 군대의 일상사업을 주관하면서 《문화대혁명》으로 조성된 혼란한 국면에 대비해 전면적으로 정돈하여 전국인민의 충심으로 되는 옹호를 받았으며 뛰여난 성과를 거두었다. 《4인방》의 모함을 받아 1976년 4월에 또다시 일체 직무를 해임당했다.
1976년 10월 《4인방》이 분쇄되고 《문화대혁명》이 종말되였다. 1977년 7월, 중공 제10기 4차전체회의에서 그가 원래 담임했던 당정군 지도직무를 회복시켰다. 1977년 8월에 소집된 중공 제1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78년 3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5기전국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그는 먼저 사상로선의 혼란을 바로잡는것을 추동하고 《두가지 무릇》의 착오적 방침을 반대했으며 진리기준에 관한 토론을 지도하고 지지하면서 반드시 모택동사상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리해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또 하루빨리 전당의 사업중점을 경제건설에로 이전시켜야 한다고 제기했다.
1978년 12월에 소집된 중공 제11기 3차전체회의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력량을 집중하여 사회주의현대화를 건설하는 새 시기를 열어놓았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중국공산당정책의 력사적전환에 대해 결정적역할을 일으켰다. 이번 전체회의준비를 위한 중앙사업회의에서 그는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며 일치단결하여 미래를 개척하자》는 연설을 발표했다. 이번 전체회의를 거쳐 그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제2대 지도그룹이 형성되였다. 1981년 6월에 소집된 중공 제11기 6차전체회의에서 그가 책임지고 작성한 《건국이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문화대혁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모택동의 력사적지위를 수호했으며 모택동사상을 과학적으로 평가했다. 이번 회의에서 그는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82년 9월, 중공 제12차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그는 개막사에서 《맑스주의 보편적진리를 우리 나라의 구체적실천과 결부하여 자체의 길로 나아가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제12기 1차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중앙고문위원회 제1차전체회의에서 주임으로 당선되였다. 1983년 6월 제6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중공 제11기 3차전체회의후 그는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를 견지하면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리론을 창립하고 발전시켰다. 이 리론은 사회주의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천명하고 최초로 비교적 체계적으로 중국처럼 경제, 문화가 락후한 국가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어떻게 사회주의를 공고, 발전시키겠는가 하는 일련의 기본문제들에 대답을 주었다. 그는 중국은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에 처해있으며 모든것은 이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전망계획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에 근거하여 중공 제13차전국대표대회는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에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고 네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하며 개혁개방을 견지한다는 당의 기본로선을 제정했다. 그는 사회주의의 근본적과업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것이라며 전당은 일심전력으로 현대화를 건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대화실현의 관건은 과학기술현대화라면서 과학기술은 제1 생산력이고 교육은 한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사업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20세기 80년대로부터 차세기 중반까지 세 단계를 나누어 현대화를 기본상 실현하는 발전전략목표를 설계했다. 이와 함께 그는 모든것은 사회주의사회의 생산력발전에 유조한가 유조하지 않은가? 사회주의국가의 종합적국력을 증강시키는데 유조한가 유조하지 않은가?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유조한가 유조하지 않은가를 근본적목표로 삼고 부단히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농촌개혁을 대폭 지지, 추동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개혁을 추진하면서 《개혁은 중국의 제2차혁명》이라고 지적했다. 사회주의국가에서도 시장경제정책을 실시할수 있다는데 관한 그의 론술은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구축 개혁목표 확정을 위해 리론적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경제특구를 건설하고 14개 연해도시를 개방하며 상해 포동신구를 개발, 개방하여 중국의 전면적 대외개방 구도의 형성을 추동할것을 제안했다. 그는 정치체제개혁을 적극 추진하면서 사회주의민주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법제를 건전화하며 물질문명을 건설함과 동시에 정신문명건설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간부대오의 혁명화, 년소화, 지식화, 전문화를 제창하고 간부지도직무 종신제 페지를 주장했다. 그는 평화와 발전은 당대 세계의 두가지 큰 문제로서 군대와 국방 건설 지도사상의 전략적전변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대를 강대한 현대화, 정규화한 혁명군대로 건설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홍콩, 마카오, 대만 문제를 해결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크나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한개 중국, 두가지 제도》라는 구상을 창조적으로 제기했으며 이 구상에 좇아 홍콩은 1997년에 중국으로 반환되였고 마카오는 1999년말에 중국으로 반환되였다. 그는 독립자주의 평화적 외교정책을 제기하고 평화공존 5항원칙을 국제 정치, 경제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준칙으로 삼을것을 주장했다. 그의 주관하에 중국은 미국과 외교관계를 설정하고 일본과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으며 중쏘 량당, 량국의 관계를 회복하고 주변국가와 제3세계 국가와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는 중국외교의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고 유리한 국제환경을 쟁취하여 현대화건설을 진행하며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꾸준히 힘써왔다. 80년대말부터 90년대초까지 국내와 국제적으로 정치풍파가 발생했을 때 당과 정부는 그와 기타 로동지들의 단호하고 강력한 지지하에 인민에 의거하고 네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함과 아울러 계속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개혁개방을 견지함으로써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고 국가의 독립, 존엄, 안전과 안정을 수호했다.
1989년 11월, 중공 제13기 5차전체회의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담임하고있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무를 사임했다. 그를 핵심으로 하는 제2대 중앙지도그룹이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제3대 중앙지도그룹으로 순조롭게 과도하고 당과 국가 안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그가 관건적역할을 일으켰다. 퇴직한 뒤 그는 여전히 당과 국가 사업을 관심했다. 1992년 중국 남방의 무창, 심천, 주해, 상해 등지를 시찰하고 중요담화를 발표하여 개혁개방이래의 기본경험을 총화하고 리론적으로 일부 중대한 문제에 대답을 주었다. 이번 담화와 중공 제14차전국대표대회를 표징으로 중국의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1997년에 소집된 중공 제15차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리론을 등소평리론으로 개괄하고 이 리론은 당대 중국의 맑스주의이며 중국에서 맑스주의발전의 새로운 단계라고 지적함과 아울러 중국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 등소평리론을 자기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고 당규약에 명확히 규정했다. 1997년 2월 19일, 등소평은 북경에서 서거했다. 주요저작은 《등소평문선》(전 3권)에 수록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사백과전서(1949-1999)》에서 발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