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 종교, 사상

[스크랩] 중국 현대사의 중요인물 3인 소개

공전과 자전 2007. 6. 27. 21:03

모택동(1893-1976)은 위대한 맑스주의자이며 무산계급 혁명가, 전략가와 리론가이며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창시자와 지도자이다. 1893년 12월 26일, 그는 호남성 상담현의 한 농민가정에서 태여났다. 신해혁명이 폭발한 뒤 봉기를 일으킨 신군에서 반년동안 복무했다. 1914년-1918년, 호남제1사범학교에서 공부를 했다. 졸업전야 채화삼 등과 함께 혁명단체인 신민학회를 조직했다. 《5•4》운동 전후 맑스주의를 접촉하여 받아들였으며 1920년에 호남에서 공산주의조직을 창설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창당대회 제1차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였고 그뒤 중공상구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하였으며 장사, 안원 등지의 로동자운동을 령도했다. 1923년에 중공 제3차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중앙령도사업에 참가했다. 1924년 국공합작을 실현한 뒤 국민당 제1차전국대표대회와 제2차전국대표대회에서 모두 후보 중앙집행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광주에서 국민당 중앙선전부 부장 직무를 대행하면서 《정치주간신문》의 주필을 맡았으며 제6회 농민운동강습소를 주관하였다. 1926년 11월, 중공중앙 농민운동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했다.

1925년 겨울부터 1927년 봄까지 선후로 《중국사회 각 계급의 분석》, 《호남농민운동시찰보고》 등 저작을 발표하여 중국혁명에서 농민문제의 중요한 지위와 무산계급이 농민투쟁을 령도하는 극도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진독수의 우경사상을 비판했다.

국공합작이 전면적으로 파렬된 뒤 1927년 8월에 소집된 중공중앙 긴급회의에서 모택동은 《총에서 정권이 나온다》, 즉 혁명무장으로 정권을 탈취해야 한다는 사상을 제기했으며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가 끝난 뒤 그는 호남, 강서 변계에 가 추수기의를 령도하고 뒤이어 기의부대를 거느리고 정강산에 올라가 토지혁명을 일으키고 첫 농촌혁명근거지를 창설했다. 1928년 주덕이 령도하는 기의부대와 상봉하여 로농혁명군(얼마 안되여 홍군으로 개칭) 제4군단을 창설하고 그가 당대표, 전적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하였으며 주덕이 군단장 직무를 맡았다. 그를 주요 대표로 하는 중국공산주의자들은 중국의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국민당정권의 통치가 비교적 박약한 농촌에서 무장투쟁을 발전시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고 나중에 도시와 전국의 정권을 탈취하는 길을 개척했다. 그는 《중국의 홍색정권은 어째서 존재할수 있는가?》, 《한점의 불꽃도 료원의 불길로 타오른다》 등 저작에서 이 문제에 대해 리론적으로 천명했다. 1930년 5월, 《서책주의를 반대하자》는 글을 써 《조사가 없이는 발언권이 없다》는 저명한 론단을 제기했다. 같은 해 8월, 홍군 제1방면군이 창설된 뒤 그가 총정치위원 직무를 담임했다. 1931년,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정부가 강서 서금에서 창립되였고 그가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33년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보충선거되였다. 1930년말부터 주덕과 함께 홍군 제1방면군을 령도하여 국민당군대의 여러차례 《포위토벌》을 물리쳤다. 왕명을 대표로 하는 《좌》경로선 지도그룹이 중앙혁명근거지에 들어온 뒤 모택동을 당과 홍군의 령도직위에서 배척하고 부동한 전략과 정책을 집행함으로써 제5차 반《포위토벌》전쟁의 실패를 빚어냈다. 1934년 10월, 홍군 제1방면군의 장정에 참가했다. 장정도중 1935년 1월에 중공중앙정치국은 귀주에서 확대회의(즉 준의회의)를 소집하고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중앙령도기구를 확립했다. 10월, 중공중앙과 홍군 제1방면군은 섬북에 도착하여 장정을 끝냈다. 12월, 《일본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전술에 대하여》란 보고를 진술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정책을 천명했다. 1936년 10월, 홍군 제4방면군과 제2방면군은 장정을 거쳐 감숙경내에 도착하여 선후로 홍군 제1방면군과 상봉했다. 같은 해 12월, 주은래 등과 함께 서안사변의 평화적해결을 추진함으로써 내전으로부터 제2차국공합작, 공동항일에로 시국을 전환시키는 중요한 관건으로 되게 했다. 1936년 12월, 《중국혁명전쟁의 전략문제》를 쓰고 1937년 여름에 《실천론》과 《모순론》을 썼다.

항일전쟁이 시작된 뒤 모택동을 비롯한 중공중앙은 통일전선에서의 독립자주원칙을 견지하고 대중을 힘써 발동하고 적후유격전쟁을 전개하면서 수량과 규모가 큰 항일근거지를 세웠다. 이러한 항일근거지는 대부분 화북산간지대에 세워졌으나 일부는 화북평원과 소북평원에도 분포되였다. 1938년 10월, 중공 제6기 6차전체확대회의에서 《맑스주의의 중국화》지도원칙을 제기했다. 항일전쟁시기 그는 《지구전에 대하여》, 《〈공산당인〉발간사》, 《신민주주의론》 등 중요 저작을 발표했다. 1942년, 전당을 령도하여 정풍운동을 전개하고 주관주의와 종파주의를 시정함으로써 전당으로 하여금 맑스-레닌주의의 보편적진리와 중국혁명의 구체적실천을 서로 결부시키는 기본방향을 장악하게 하고 항일전쟁과 전국혁명의 승리를 위해 사상적토대를 닦아놓았다. 1943년, 근거지군민들을 이끌고 생산운동을 전개하여 심각한 경제곤난을 이겨냈다. 같은 해 3월, 중공중앙정치국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45년, 중공 제7차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사회하였으며 《련합정부에 대하여》라는 보고를 진술했다. 대회는 《대담하게 대중을 발동하고 인민력량을 장대시키며 우리 당의 령도하에 일본침략자를 타승하고 전국인민을 해방시키며 신민주주의 중국을 창건한다》는 전략을 제정했다. 모택동사상이 이번 대회에서 중공의 지도사상으로 확정되였다. 그는 제7기 1차전체회의부터 1976년 서거할 때까지 줄곧 중공중앙 주석 직무를 담임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 뒤 장개석이 공산당과 그 무장력량을 소멸하려고 시도하는 현실에 대비해 그는 《날카롭게 맞서는》 투쟁방침을 제기했다. 1945년 8월, 그는 중경에 가 장개석과 담판을 가지고 국내평화를 쟁취하려는 중국공산당의 념원을 표명했다.

1946년 여름, 장개석이 전면적내전을 발동한 뒤 모택동은 주덕, 주은래와 함께 중국인민해방군을 령도하여 적극적으로 방어하고 우세병력을 집중하여 적들을 각개 섬멸하였다. 1947년 3월부터 1948년 3월까지 주은래, 임필시와 함께 섬북에서 전전하면서 서북전장과 전국의 해방전쟁을 지휘했다. 1947년 여름, 중국인민해방군은 전략적방어로부터 전략적진공으로 넘어갔으며 모택동을 비롯한 당중앙의 령도하에 료심, 회해, 평진 3대 전역과 1949년 4월 장강을 뛰여넘은 뒤의 작전을 거쳐 국민당정부를 뒤엎었다. 1949년 3월, 중공 제7기 2차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중요한 보고를 진술하여 당의 사업중점을 농촌으로부터 도시에로 전이시키기로 결정하고 전국적승리를 거둔 뒤의 당의 제반 기본정책을 규정했으며 전당에 반드시 겸손하고 근신하며 교만하지 않고 성급하지 않는 작풍을 확보하고 반드시 간고분투하는 작풍을 계속 확보할것을 호소했다. 7월 1일, 《인민민주주의독재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인민공화국의 정권 성격과 대내, 대외 기본정책을 규정했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고 그가 중앙인민정부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50년 6월, 중공 제7기 3차전체회의를 소집하고 사회하여 국가재정경제상황의 기본적호전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데 대한 총적과업을 제기했다. 같은 해 10월, 미국군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침공하고 중국동북부를 위협하는 형세의 핍박에 의해 그를 비롯한 중공중앙은 항미원조전쟁 결단을 내렸다. 1950년-1952년, 그의 령도밑에 토지개혁, 반혁명진압과 기타 민주개혁을 실시하고 탐오를 반대하고 랑비를 반대하며 관료주의를 반대하는 《삼반》운동과 회뢰를 반대하고 탈세루세를 반대하며 국가재산절취를 반대하고 원재료와 노력을 규정보다 적게 들이는것을 반대하며 경제정보절취를 반대하는 《오반》운동을 전개했다. 1953년, 그의 제안에 따라 중공중앙은 과도시기 당의 총로선을 선포하여 체계적으로 사회주의공업화와 생산자료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개조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1954년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그의 주관으로 작성된 《중화인민공화국헌법》을 채택하고 그가 이번 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초대주석으로 당선되였으며 임기가 1959년까지였다. 1956년 4월, 《10대 관계에 대하여》라는 연설을 발표, 이 연설은 중국국정에 알맞는 사회주의건설의 길에 대하여 일부 초보적인 탐색을 시도했다. 뒤이어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백화제방, 백가쟁명》의 방침을 제기했다. 1956년, 생산자료사유제에 대한 사회주의개조가 기본상 완수되였다. 같은 해 9월, 중공은 제8차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전국인민들의 주요과업은 이미 력량을 집중하여 사회생산력을 발전시키는데로 전변되였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 방침은 후날에 충실히 집행되지 않았으며 이로써 그뒤 지도사업에서 일련의 착오와 좌절을 빚어냈던것이다. 1957년 2월, 그는 《인민내부모순을 정확히 처리할데 관하여》라는 연설에서 사회주의사회에서 적아간과 인민내부 두가지 부동한 성격의 모순을 정확히 구분하고 처리할데 대한 학설을 제기했다.

같은 해 7월, 《중앙집권제도 있고 민주주의도 있으며 규률도 있고 자유도 있으며 통일적의지도 있고 개개인 마음의 상쾌와 생동활발도 있는 그러한 정치적국면을 조성해야 한다》는 요구를 제기했다. 1958년 《대약진》과 농촌인민공사화운동을 발동했다. 1959년, 려산회의를 소집하고 사회하였다. 그는 워낙 자기가 이미 발견한 착오들을 시정할 생각이였으나 회의후반에 팽덕회에 대한 비판을 잘못 발동했으며 회의가 끝난 뒤 전당적으로 《반우파》투쟁을 잘못 전개했다. 1960년 겨울부터 1965년까지 그를 비롯한 중공중앙의 령도밑에 국민경제에 대한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방침을 실시하여 《대약진》과 인민공사화운동에서의 착오를 초보적으로 시정함으로써 국민경제로 하여금 비교적 신속히 복구되고 발전하게 했다. 이 기간 그는 일련의 조치를 강구하여 농촌사업과 기타 분야에서의 《좌》적 착오를 초보적으로 시정했다. 하지만 1962년 9월에 소집된 중공 제8기 10차전체회의에서 그는 사회주의사회의 일정한 범위에 존재하는 계급투쟁을 확대화, 절대화했으며 그가 1957년 반우파투쟁후 제기한 무산계급과 자산계급간의 모순은 여전히 중국사회의 주요모순이라는 관점을 발전시켰다. 1963년-1965년, 농촌과 도시 사회주의교양운동을 발동하여 운동의 중점은 이른바 《당내 자본주의길로 나아가는 집권파》를 투쟁하는것이라고 제기했다. 50년대로부터 시작하여 그가 중국공산당을 령도하여 쏘련공산당 지도자가 실시하는 대국주의와 중국을 간섭, 통제하려는 시도와 단호한 투쟁을 벌렸다.

1966년, 국내 계급투쟁형세에 대한 극단적인 추측으로 말미암아 그는 《문화대혁명》운동을 발동하였는데 이 운동은 림표, 강청 두 반혁명집단의 조종하에 특별히 란폭하게 발전하여 그의 예상과 통제를 훨씬 벗어났으며 10년동안이나 지속되여 중국의 많은 분야에 심각한 파괴와 손실을 빚어냈다. 《문화대혁명》에서 모택동은 일부 구체적인 착오들을 제지하고 시정하기도 했다. 그는 림표반혁명집단을 분쇄하는 투쟁을 령도하고 강청, 장춘교 등의 최고령도권을 탈취하려는 야심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대외정책에서 그는 《3개 세계》획분 전략과 중국은 영원히 패권을 부리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상을 제기했고 대외사업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기 시작했으며 중국의 현대화건설을 위해 유리한 국제적조건을 마련해놓았다. 1976년 9월 9일 북경에서 서거했다.

모택동은 만년에 엄중한 착오를 범했으나 그의 일생으로부터 볼 때 중국혁명에 대한 쟁론할 여지가 없는 공적은 과실에 비해 훨씬 크며 그는 공적이 첫째이고 착오가 둘째이며 여전히 중국인민의 숭배와 존경을 받고있다. 중국공산당은 그가 서거하여 5년이 지난 뒤 그의 전부 혁명활동과 혁명사상에 대해 중앙위원회결의형식으로 전면적인 평가를 내렸다. 모택동사상은 중국에서 맑스주의의 발전으로서 여전히 중국공산당의 지도사상으로 된다. 그의 주요 저작은 《모택동선집》(전 4권), 《모택동문집》(전 8권)에 수록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사백과전서(1949-1999)》에서 발취, 중국대백과전서출판사. 1999년 7월 출판)

 

등소평(1904-1997)은 위대한 맑스주의자이며 무산계급혁명가, 정치가, 군사가, 외교가이며 중국공산당, 중국인민해방군,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요 지도자의 한 사람이며 중국 사회주의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총설계사이며 등소평리론의 창시자이다.

1904년 8월 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태여났다. 원명은 등선성이고 학생시절에는 등희현이라고 불렀다. 다섯살에 입학하여 고급소학교를 졸업한 뒤 광안현중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가을, 중경 근공검학 프랑스류학예비학교에 들어갔고 1920년 여름에 프랑스에 가 근공검학하였다. 1922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하였고 1924년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되였으며 1926년 초반 쏘련에 가 학습했다.

1927년 봄 귀국하여 서안 풍옥상국민련합군에서 정치사업에 종사했다. 제1차국공합작이 파렬된 뒤 등소평으로 이름을 고쳤으며 8월 7일 무한에서 중공중앙 긴급회의에 참석했다. 년말에 중앙기관을 따라 상해로 옮겨갔다. 1928년-1929년 중공중앙 비서장 직무를 담임했다. 1929년 여름 중앙대표 신분으로 광서에 가 기의를 령도, 등빈이라는 가명을 사용했으며 장운일 등과 함께 12월과 그 이듬해 2월 선후로 백색기의와 룡주기의를 발동했으며 중국로농홍군 제7군단, 제8군단과 좌강, 우강 혁명근거지를 창설하고 홍7군단, 홍8군단 정치위원과 전적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했다. 1931년 여름, 강서중앙근거지에 가 선후로 중공 서금현위 서기, 회창중심현위 서기, 강서성위 선전부장 직무를 담임했다. 모택동의 정확한 로선을 옹호하였기에 당시 당내 《좌》경 지도자에 의해 면직당했다. 그뒤 홍군 총정치부 비서장, 총정치부기관지 《붉은 별》의 주필을 담임했다. 1934년 10월 중앙홍군을 따라 장정에 참가했으며 년말에 중공중앙 비서장 직무를 담임했다. 1935년 1월 중공중앙 정치국 확대회의(준의회의)에 참가하였다. 회의에서는 모택동을 대표로 하는 새로운 중앙령도기구를 확정했다. 그뒤 홍1군단 정치부 선전부장, 정치부 부주임, 주임 직무를 담임했다.

항일전쟁이 폭발한 뒤 국민혁명군 제8로군 정치부 부주임 직무를 담임했다. 1938년 1월,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 직무를 담임하고 사단장 류백승과 함께 화북의 적후에 깊이 들어가 태항, 태악 등 항일근거지를 창설했다. 1942년 9월, 중공중앙 태항분국 서기 직무를 겸임하고 1943년 10월, 중공중앙 북방국 서기 직무를 대행하였으며 팔로군본부의 사업을 주관하면서 어려운 환경에서 화북적후항일근거지 당정군의 전면 사업을 책임졌다. 1945년 중공 제7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해방전쟁시기 중국인민해방군 진기예로야전군, 중원야전군, 제2야전군 정치위원, 진기예로중앙국 서기, 중원국과 화동국 제1서기 직무를 담임했다. 1945년 9월부터 11월까지 류백승과 함께 상당전역과 한단전역을 지휘했다. 1947년 여름 그들은 부대를 거느리고 황하를 건너 대별산지역으로 진격하여 국민당군대에 대한 인민해방군의 전국적 전략진공의 서막을 열어놓았다. 해방전쟁의 전략적 결전단계에 중원야전군과 화동야전군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총전적위원회 서기 직무를 담임하였으며 두 야전군의 령도자와 함께 회해전역, 도강전역을 지휘하여 국민당정부 수도 남경과 상해, 강소, 절강, 안휘, 강서 등 광대한 지역을 공략했다.

1949년 9월, 그는 중앙인민정부 위원으로 당선되였으며 개국대전에 참가했다. 10월,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직무를 담임했다. 뒤이어 류백승과 함께 부대를 거느리고 서남지역으로 진격하여 운남, 귀주, 사천, 서강의 여러 성들을 점령하고 서장진군과 서장 평화적 해방사업에 참가했으며 중국대륙의 완전한 해방을 실현했다. 이 기간 중공중앙 서남국 제1서기, 서남군정위원회 부주석, 서남군구 정치위원 직무를 담임했다.

1952년 7월 중앙으로 전근하여 사업했으며 중앙인민정부 정무원(1954년 국무원으로 개칭)부총리 겸 재정경제위원회 부주임 직무를 담임했고 그뒤 또 정무원 교통사무실 주임과 재정부 부장 직무를 겸임했다. 1954년 중공중앙 비서장, 조직부 부장,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 직무를 담임했다. 당을 분렬하고 당과 국가 최고권력을 찬탈하려는 고강, 요수석의 음모를 반대하는 중대한 투쟁에서 중요한 기여를 했다. 1955년 4월, 중공 제7기 5차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으로 추가선거되였다. 1956년 9월, 중공 제8차전국대표대회에서 당규약개정에 관한 보고를 진술했다. 제8기 1차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당선되여 모택동을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제1대 지도그룹의 중요한 성원으로 되였다. 1959년 중공중앙 군사위원회 상무위원 직무를 담임했다. 총서기 직무를 담임한 10년간 중앙 주석, 부주석을 협조하여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면서 사회주의제도의 정립과 발전을 위하여, 중국국정에 알맞는 사회주의건설의 길을 탐색하기 위하여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1956년-1963년, 모스크바를 여러번 방문하여 쏘련지도자와 담판하면서 중국공산당의 독립자주의 원칙적립장을 견결히 수호했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뒤 일체 지도직무를 박탈당했다. 1969년-1973년기간 강서성 신건현 뜨락또르수리제조공장에 내려가 로동했다. 1973년 3월, 국무원 부총리 직무를 회복했다. 1974년 4월, 중국정부를 대표하여 유엔 제6차특별회의에 참석, 회의에서 3개 세계 획분에 관한 모택동의 리론을 체계적으로 천명했다. 그는 주은래가 제4차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진술한 《정부사업보고》 작성작업을 주관했다. 1975년 1월, 중공중앙 부주석, 국무원 부총리, 중앙군위 부주석과 중국인민해방군 총참모장 직무를 담임했다. 주은래가 병환이 심각해진 뒤 모택동의 지지하에 그는 당, 국가와 군대의 일상사업을 주관하면서 《문화대혁명》으로 조성된 혼란한 국면에 대비해 전면적으로 정돈하여 전국인민의 충심으로 되는 옹호를 받았으며 뛰여난 성과를 거두었다. 《4인방》의 모함을 받아 1976년 4월에 또다시 일체 직무를 해임당했다.

1976년 10월 《4인방》이 분쇄되고 《문화대혁명》이 종말되였다. 1977년 7월, 중공 제10기 4차전체회의에서 그가 원래 담임했던 당정군 지도직무를 회복시켰다. 1977년 8월에 소집된 중공 제1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78년 3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5기전국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그는 먼저 사상로선의 혼란을 바로잡는것을 추동하고 《두가지 무릇》의 착오적 방침을 반대했으며 진리기준에 관한 토론을 지도하고 지지하면서 반드시 모택동사상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리해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또 하루빨리 전당의 사업중점을 경제건설에로 이전시켜야 한다고 제기했다.

1978년 12월에 소집된 중공 제11기 3차전체회의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력량을 집중하여 사회주의현대화를 건설하는 새 시기를 열어놓았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중국공산당정책의 력사적전환에 대해 결정적역할을 일으켰다. 이번 전체회의준비를 위한 중앙사업회의에서 그는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며 일치단결하여 미래를 개척하자》는 연설을 발표했다. 이번 전체회의를 거쳐 그를 핵심으로 하는 중국공산당 제2대 지도그룹이 형성되였다. 1981년 6월에 소집된 중공 제11기 6차전체회의에서 그가 책임지고 작성한 《건국이래 당의 약간한 력사문제에 관한 결의》를 채택하여 《문화대혁명》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고 모택동의 력사적지위를 수호했으며 모택동사상을 과학적으로 평가했다. 이번 회의에서 그는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82년 9월, 중공 제12차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였다. 그는 개막사에서 《맑스주의 보편적진리를 우리 나라의 구체적실천과 결부하여 자체의 길로 나아가며 중국특색의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제12기 1차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중앙고문위원회 제1차전체회의에서 주임으로 당선되였다. 1983년 6월 제6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중공 제11기 3차전체회의후 그는 사상해방과 실사구시를 견지하면서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리론을 창립하고 발전시켰다. 이 리론은 사회주의의 본질을 과학적으로 천명하고 최초로 비교적 체계적으로 중국처럼 경제, 문화가 락후한 국가에서 어떻게 사회주의를 건설하고 어떻게 사회주의를 공고, 발전시키겠는가 하는 일련의 기본문제들에 대답을 주었다. 그는 중국은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에 처해있으며 모든것은 이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전망계획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사상에 근거하여 중공 제13차전국대표대회는 사회주의의 초급단계에서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고 네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하며 개혁개방을 견지한다는 당의 기본로선을 제정했다. 그는 사회주의의 근본적과업은 생산력을 발전시키는것이라며 전당은 일심전력으로 현대화를 건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현대화실현의 관건은 과학기술현대화라면서 과학기술은 제1 생산력이고 교육은 한 민족의 가장 근본적인 사업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20세기 80년대로부터 차세기 중반까지 세 단계를 나누어 현대화를 기본상 실현하는 발전전략목표를 설계했다. 이와 함께 그는 모든것은 사회주의사회의 생산력발전에 유조한가 유조하지 않은가? 사회주의국가의 종합적국력을 증강시키는데 유조한가 유조하지 않은가? 인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유조한가 유조하지 않은가를 근본적목표로 삼고 부단히 새로운 국면을 개척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농촌개혁을 대폭 지지, 추동하고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전면적개혁을 추진하면서 《개혁은 중국의 제2차혁명》이라고 지적했다. 사회주의국가에서도 시장경제정책을 실시할수 있다는데 관한 그의 론술은 중국공산당의 사회주의시장경제체제구축 개혁목표 확정을 위해 리론적토대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경제특구를 건설하고 14개 연해도시를 개방하며 상해 포동신구를 개발, 개방하여 중국의 전면적 대외개방 구도의 형성을 추동할것을 제안했다. 그는 정치체제개혁을 적극 추진하면서 사회주의민주를 발전시키고 사회주의법제를 건전화하며 물질문명을 건설함과 동시에 정신문명건설에 깊은 중시를 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간부대오의 혁명화, 년소화, 지식화, 전문화를 제창하고 간부지도직무 종신제 페지를 주장했다. 그는 평화와 발전은 당대 세계의 두가지 큰 문제로서 군대와 국방 건설 지도사상의 전략적전변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군대를 강대한 현대화, 정규화한 혁명군대로 건설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홍콩, 마카오, 대만 문제를 해결하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크나큰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한개 중국, 두가지 제도》라는 구상을 창조적으로 제기했으며 이 구상에 좇아 홍콩은 1997년에 중국으로 반환되였고 마카오는 1999년말에 중국으로 반환되였다. 그는 독립자주의 평화적 외교정책을 제기하고 평화공존 5항원칙을 국제 정치, 경제의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준칙으로 삼을것을 주장했다. 그의 주관하에 중국은 미국과 외교관계를 설정하고 일본과 중일평화우호조약을 체결했으며 중쏘 량당, 량국의 관계를 회복하고 주변국가와 제3세계 국가와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켰다. 그는 중국외교의 새로운 국면을 타개하고 유리한 국제환경을 쟁취하여 현대화건설을 진행하며 세계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꾸준히 힘써왔다. 80년대말부터 90년대초까지 국내와 국제적으로 정치풍파가 발생했을 때 당과 정부는 그와 기타 로동지들의 단호하고 강력한 지지하에 인민에 의거하고 네가지 기본원칙을 견지함과 아울러 계속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개혁개방을 견지함으로써 준엄한 시련을 이겨내고 국가의 독립, 존엄, 안전과 안정을 수호했다.

1989년 11월, 중공 제13기 5차전체회의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담임하고있던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무를 사임했다. 그를 핵심으로 하는 제2대 중앙지도그룹이 강택민을 핵심으로 하는 제3대 중앙지도그룹으로 순조롭게 과도하고 당과 국가 안정을 유지하는 과정에서 그가 관건적역할을 일으켰다. 퇴직한 뒤 그는 여전히 당과 국가 사업을 관심했다. 1992년 중국 남방의 무창, 심천, 주해, 상해 등지를 시찰하고 중요담화를 발표하여 개혁개방이래의 기본경험을 총화하고 리론적으로 일부 중대한 문제에 대답을 주었다. 이번 담화와 중공 제14차전국대표대회를 표징으로 중국의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은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다. 1997년에 소집된 중공 제15차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국특색의 사회주의건설리론을 등소평리론으로 개괄하고 이 리론은 당대 중국의 맑스주의이며 중국에서 맑스주의발전의 새로운 단계라고 지적함과 아울러 중국공산당은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 등소평리론을 자기 행동의 지침으로 삼는다고 당규약에 명확히 규정했다. 1997년 2월 19일, 등소평은 북경에서 서거했다. 주요저작은 《등소평문선》(전 3권)에 수록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국사백과전서(1949-1999)》에서 발취

 

 

1926년 8월 17일 출생, 강소성 양주시 사람. 1943년 지하당이 령도하는 학생운동에 참가했고 1946년 4월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47년 상해교통대학 전기기계학부를 졸업했다. 상해가 해방된 뒤 상해익민식품 제1공장 부공정사, 공무과 과장 겸 동력직장 주임, 공장당지부 서기, 제1 부공장장, 상해비누제조공장 제1 부공장장, 제1 기계공업부 상해제2 설계분국 전기전업과 과장 직무를 력임했다. 1955년 쏘련 모스크바 쓰딸린자동차공장에 가 실습했다. 1956년 귀국한 뒤 장춘제1자동차공장 동력처 부처장, 부총동력사(副總動力師), 동력분공장 공장장 직무를 담임했다. 1962년후 제1기계공업부 상해전기과학연구소 부소장, 제1 기계공업부 무한열공예기계연구소 소장, 당위서기대행, 제1 기계공업부 외사국 부국장, 국장 직무를 담임했다. 1980년후 국가수출입관리위원회, 국가외국투자관리위원회 부주임 겸 비서장과 당조성원 직무를 담임했다. 1982년후 전자공업부 제1 부부장과 당조부서기, 부장과 당조서기 직무를 담임했다. 1985년후 상해시 시장, 중공상해시위 부서기, 서기 직무를 담임했다. 1982년 9월, 중공 제12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공중앙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87년 11월, 중공 제13기 1차전체회의에서 중공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89년 6월, 중공 제13기 4차전체회의에서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중공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당선되였다. 1989년 11월, 중공 제13기 5차전체회의에서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90년 3월, 제7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92년 10월, 중공 제14기 1차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당선되였으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무를 담임했다. 1993년 3월, 제8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1997년 9월, 중공 제15기 1차전체회의에서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 중앙위원회 총서기로 당선되였으며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무를 담임했다. 1998년 3월 제9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2002년 11월, 중공 제16기 1차전체회의에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무를 담임했다. 2003년 3월, 제10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회의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당선되였다. 2004년 9월, 중공 제16기 4차전체회의는 강택민동지가 중공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직무를 사임하는것을 동의한다고 결정했다. 2005년 3월, 제10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회의 제2차전체회의는 강택민의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무 사임청구를 접수할데 관한 제10기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회의 결정을 채택했다.

어릴적부터 전각예술과 독서를 즐겼다.

부인: 왕야평, 1928년 강소 양주에서 출생했으며 상해외국어학원을 졸업했다. 상해전기과학연구소 문서, 부주임, 주임으로 있었으며 지금은 이미 퇴직중이다. 그들은 슬하에 두 아들을 두고있다.

출처 : 중국어회회모임
출처 : 목련꽃이 질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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