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1

[스크랩]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의 노래 / 만은 김종원

공전과 자전 2007. 7. 27. 23:19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의 노래 / 만은 김종원(金鐘元)



너무 아름다워

나라가 부르기도 전에
달려나가 꽃넋을 사른 모습은

그냥 공부만 하고 있어도
누가 뭐라 할 자 없었는데
책가방 던지고
교모를 쓴 채
총 들고 나선 우리 아들아.

아직 중학생인데
이직 고등학생인데
아직 사범학생인데
공부를 더 해야 할 대학생인데

군번도 없이
적진으로 달려나간
대한만국의 화랑

네 행실 장하지만
너 그리운 이 어미는
오늘도 동작동에서 손수건을 적신다.

그래도
너무 이름다워

나라가 부르기도 전에
달려나가 꽃넋을 사른 너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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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도의용군의 노래 / 만은 김종원

내일은 6월 6일 52주년 현충일입니다. 반만년 우리 역사에서 나라를 지키다 돌아가신 숭고한 넋을 기리는 날입니다. 가깝게는 일제치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이나 6.25한국전쟁에서 장렬하게 산화한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날입니다. 육이오한국전쟁을 생각해 봅니다. 동서 냉전의 이념전쟁이 앞잡이 노릇을 한 북한 공산집단의 도발로 하필 우리 나라에서 일어났지요.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까지 3년여에 걸친 육이오전쟁 동안 아군은 33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고, 공산측은 180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습니다. 국토는 초토화했고, 60여 만 채의 가옥이 파괴되고, 20만 명의 전쟁미망인, 10만 명의 전쟁고아가 생겼으며 공업시설은 45%가 가동불능 상태가 되어 경제적‧사회적으로 암흑기가 되었습니다.

이 육이오전쟁에서의 가장 거룩한 죽음은 이름 없는 용사들일 것입니다. 그 중에 학도의용군이 있습니다.
꿈 많던 스무 살 안팎의 푸른 충절들이 이 나라와 겨레를 위해 스스로 격전에 뛰어 들어 꽃송이처럼 스러졌지요.
격전의 현장에서 발견된 꽃넋을 사른 어느 학도병의 메모(수첩)는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적시게 하는군요.

◦ 6월 25일 일요일 아침 비 차차 개다.
새벽 38선에서는 공산당의 공격으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국군이 잘 싸우고 있다니 안심이다.
◦ 6월 28일 수요일
어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새벽 3시 경 두 번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을 들었다. 아침에 한강교가 폭파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일행(6명)은 다시 남쪽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 7월 2일 일요일
복부에 총상을 입고 신음 중인 국군을 만났다. 도와주려고 했으나 한사코 거절하면서 최후까지 적을 죽이겠다며 적진을 향해 기어갔다. 참으로 장하고 장하다. 10분쯤 지났을까, 수류탄 폭발음을 들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던 국군 상사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 인간이 죽을 자리를 선택한다는 건 정말 엄숙하고 거룩한 것이구나.
◦ 7월 20일 목요일 쾌청
대구역에 나갔다가 학도병 모집 벽보를 보았다.“가자 김석원 장군 휘하로”라는 구절이 나를 뜨겁게 했다.
◦ 7월 25일 화요일 쾌청
대한학도의용대 본부가 있는 ☓☓빌딩 3층에 갔다. 지원서에 날인했다.
◦ 7월 26일 수요일 쾌청
학도의용대라는 완장과 태극 마크를 그린 띠를 받다. 바야흐로 나는 학생 아닌 병사가 된 것이다. 병사는 전투를 통해서만 생명의 불꽃이 빛나리라.
◦ 7월 27일 목요일 흐림
안동에 도착했다. 총성이 요란하다. 이제 전장에 왔나 보다. 부모 형제들이 걱정이다.
◦ 8월 10일 목요일 쾌청
며칠 동안 아비규환의 아수라장이 어떤 것인가를 실감했다. 천신만고 끝에 포항에 도착했다. 교복은 누더기가 되고, 신발은 있으나마나……. 발가벗고라도 싸워 보자. 내의를 빨아 넌 후 참호 속에서 고향을 그리며 오랜만에 어머니께 편지를 쓰다.
“그리운 어머니께……”첫마디부터 눈물이 핑돌다.

그 학도병의 메모식 일기는 여기서 멈춰 버리고 말았습니다. “아! 그리운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보다 더 큰 어머니를 위해 이 한 몸 그리움으로 조국에 바칩니다.”이런 심정으로 그 학도병은 숨져갔을 것입니다.
이 시의 화자는 어머니입니다. 동작동 국립묘지(현 국립현충원)에서 장한 아들이지만 너무도 보고파 해마다 눈물짓는 이 땅의 많은 어머니들…….

학도의용군!
육이오전쟁 당시 피끓는 대한의 지성(知性)들은 참전할 의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스로 참전했습니다. 어떤 명리(名利)도 특권도 보수도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의 심장 수도 서울을 적에게 빼앗기고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워지자 애국 충정 하나로 젊음을 무기 삼아 무조건 전선에 뛰어든 것입니다. 스스로 진 구국‧호국‧애국의 십자가였습니다.
부모나 친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애인의 눈물마저 멀리 외면한 거룩한 행진!

학도의용군은 1950년 6월 29일 비상학도대, 대한의용학도대, 대한학도의용대로 이름을 잇고 조직 확장을 거듭하면서 무려 10만 명에 이르는 전국의 모든 대학과 남녀 중학생<중고 통합학제였음. 시(詩)에서는 독자들 이해의 편의상 중학생, 고등학생으로 표기함> 그리고 9백여 명의 재일교포 학생들까지 전후방에 참전하였습니다. 육이오전쟁 3년 동안 학도의용군은 전국 대학과 중학교 325개교에서 2,020명이 전사한 것으로 집계되고 있으니, 펜 대신 총을 잡고 공산군을 물리쳐 조국을 구한 젊은 애국혼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만은(晩隱)의 외종형도 군산사범학교 다니다 스스로 전선에 나아가 꽃넋을 조국에 바쳤으니 아, 생각만 해도 그 충혼에 숙연해져 머리를 숙입니다.

조국 대한에 태어나 조국과 더불어 살다가 조국을 지키기 위해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숨진 거룩한 영웅들이여!
조국은 그대들의 영광스런 용맹과 이름을 민족사와 함께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조국의 이름으로 드리는 영광 받으옵소서!

.........<2007. 06. 05(화) 만은 드림>.......

* 대한민국 중등교장으로서 각종 국가 경축식이나 기념식에 자주 참석해 왔는데, 내일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옛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거행되는 제52주년 현충일 추념식에 참석합니다. 추념식 화면에 양복 입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면 만은 김종원 시인도 그 중 하나이겠구나 생각하셔요.^^*
출처 :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의 노래 / 만은 김종원
글쓴이 : 만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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