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나는 지금도 마오가 그립다 - 이미지로 보는 마오쩌둥(毛澤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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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당의 아버지
또는 중국 인민의 아버지 독립운동, 대장정과 국공합작 대약진 운동, 인민공사 그리고 문화대혁명 1차 천안문 사건 ... 중국 대표 글로벌 브랜드 |
중국 공산주의 혁명의 지도자이자 민중의 아버지인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무수하게 재현되었다. 집권 기간 중, 특히 문화대혁명기에 마오쩌둥은 신격화되어 추앙받았다. 모든 노래는 그를 위한 것이었고 모든 그림은 그를 위한 것이었다. 1949년 이후로 모택동신(神)을 단독으로 모신 초상화가 전국에 보급되었고, 모주석을 주제로 하는, 그와 관련되는 그림이 제작되었다.
1934년, 독립운동기에 마오는 산시성(섬서성 陝西省) 북부도시 옌안(연안 延安)까지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장정을 시작하였고 결국 옌안을 근거지로 하여 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아래 그림은 평범한 산수화 처럼 보이지만 작품의 제목은 [산시성 북쪽의 전투]이다. 작품 배경의 붉은 황토흙은 이 지역이 옌안임을 알려주며, 옌안정부에서 지도권을 장악한 마오쩌둥이 서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림에서 마오는 메시아와 같이 우뚝 선 채 작품에는 묘사되지 않은 전투를 내려다보고 있다. 산시성의 웅장한 풍광을 서양식의 조감법과 특유의 독창적 준법으로 묘사한 이 작품으로 석노는 유명세를 얻었다.
* 석노(石魯 Shi Lu 1919-1982) [섬서성 북쪽의 전투(前戰陝北)] 1959
그러나 문화대혁명(1966-1976)이 시작된 뒤 상황이 바뀌었다. 경제정책의 실패로 궁지에 몰린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이라는 극단적인 문화탄압 정책으로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 마오쩌둥 사상에 고취된 젊은 폭군들은 마오의 빨간 책을 손에 들고 거리를 장악했으며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가 탄압을 받았다. 홍위병들은 위 작품이 마오가 자살하려는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는 억지스러운 이유로 석노를 광장에 세웠다. 한순간에 자본주의에 물든 민족의 반역자 취급을 당하게 된 이 화가는 공개비판과 고문을 당한 끝에 정신이상을 일으켰으며 방랑하며 불운한 말년을 보냈다.
*부포석 (傅抱石, Fu Baoshi 1904-1965)
관산월(關山月 1912- ) 합작
[강산은 이토록 아름답구나(江山如此多嬌)], 1964
위 작품은 누가 보아도 평화로운 중국의 산수화, 그러나 여기에도 정치적인 의미가 담겨있다. 이 작품의 화제는 마오쩌둥의 시(詩) 중 한
구절 '강산여차다교(江山如此多嬌)'이다. 마오는 어떤 의미에서는 훌륭한 문장가이기도 했는데 강산여차다교 뿐 아니라 그의 시를 화제로 하는 작품이
수 점 제작되었다. 특히 위의 작품은 혁명 15주년을 기념해서 제작된 그림으로 인민대회당 내부를 장식하고 있다.
정치적인 관점에서
이 작품을 조금 더 살펴보자. 화면의 붉은 태양은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 주석의 은혜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으며, 하단의 바위 묘사는 중국
문화의 황금기였던 당(唐)대의 청록산수 풍으로 처리되어 있다. 그림을 그린 부포석은 석노와는 달리 문화대혁명기에도 미술협회 고위관료를 지내는 등
화풍을 잘 적응시켜나갔는데 그의 출신성분이 가난한 농민이었다는 점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마오쩌둥의 독재정치 아래서 문화대혁명을 보낸 민중은 천안문 사건(1976.4.4.)이라는 민중혁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군부독재 시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의 민주화운동이 그렇게 활짝 꽃필 수 있었겠는가? 박정희가 그랬듯 마오쩌둥도 국가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울하지만, 농담이다.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는 이쯤에서 그만두자. 그 때의 마오는 그 때의 마오가 아니고 지금의 마오는 지금의 마오가
아니다. 어쨌든 마오는 지금도 천안문에서 후덕한 얼굴로 민중을 내려보고 있다. 무수한 마오의 환영 중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로 말이다.
지금 마오는 황량한 천안문 광장 한 편을 차지하는 거대한 모택동 기념관에 박제되어 누워있다. 다른 사람들처럼 긴 줄 끝에 서서 기다렸다 기념관에 들어가서 짧은 시간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있다. 푸르게 변한 얼굴은 중국인이 좋아하는 노란 빛의 조명 아래서 묘하게 번뜩였다. 중국인들은 방부제에 절인 마오의 미라 앞에서 참배를 하고 꽃을 바쳤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죽은 뒤에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고 자신을 우상화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하는데,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다.
자본주의 중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브랜드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현대에 들어서도, 체 게바라의 이미지가 그렇듯,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소비되고 있다. 그 이미지는 티셔츠나 악세서리 따위에 프린트 되어 일종의 캐릭터 상품으로 소비되기도 한다.
중국 외의 지역에서 소비되는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한층 더 흥미롭다. 그에게
덧씌워진 의미의 층위는 너무나 다양해서 마오는 곧 중국 근현대사를 가리키는 이콘으로 발전한 것처럼 보인다.
마릴린 먼로, 재클린
케네디 등 유명인사의 초상을 실크스크린으로 제작했던 미국의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도 마오쩌둥의 초상을 놓치지 않았다. 워홀은 1970년대 초에
마오쩌둥 연작을 제작했고 큰 사이즈로 출력해서 전시장에 설치했다.
역시 미국의 팝아티스트로 워홀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작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도 재미있다. 특유의 만화적인 선과 망점 기법으로 표현된 마오의 이미지는 텔레비전 아동만화에 나와도 어울릴 만큼 귀엽게 보인다.
동시대에도 마오의 인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인기가 더해갈수록 그에 대한 해석은 여러모로 다양해지는 것 같다. 오스트리아 작가로 신구성주의(New Constructivism)자를 자청하는 베르너 호바트는 1992년부터 [전쟁과 평화(Krieg und Frieden)] 연작을 제작하고 있는데, 세계사의 중요한 여러 인물을 그린 이 대형작품에 포함된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려울 만큼 추상화된 복잡한 색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미국 남부에서 활동하는 레이 벨드너가 제작한 마오의 이미지도 유명한데, 그의 2002년 작품 [How Mao] 마오쩌둥의 초상을 미국 화폐를 이용해 제시한 작품이다. 자본주의 물결을 뒤늦게 따라가고 있는 중국의 현 모습을 표현하는 것 같은데, 여기에서도 마오의 환영은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정치와 경제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다.
중국을 상징하는 이콘으로의 의미 외에도 개인적인 의미를 부여한 듯 보이는 작품이 흥미로워 한 점 더 소개하려 한다. Jack Malebranche의 블랙페인팅 연작 중 하나인 2006년도 작품 마오는 이제까지 보았던 위풍당당한 마오쩌둥 이미지와는 다르다. 어둠 속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은 카리스마 넘치는 독재자의 것과는 거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마오쩌둥 환영이 제작되고 있다. 김동유의 유화 [마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은 마오쩌둥의 초상을 픽셀로 톤을
조절하여 마릴린 먼로의 얼굴을 나타내는 팝아트 작품이다. 얼핏 위에서 보았던 몇몇 팝아트 작품을 연상케하는 면이 있지만, 작은 마오쩌둥의
이미지가 모여 커다란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를 만든다는 점에서 미국 팝아트 작가와는 다른 점이 보인다. (동양인 작가에 대해서는 무턱대고 불교
또는 도교적인 성향을 덧씌우는 오리엔탈리즘적 해석은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김동유의 작품에서 공산주의-자본주의, 남성-여성, 독재자-팝스타 라는
다름의 대립쌍이 하나의 이미지 속에 녹아들어 있다는 점은 중요할 것이다.
* 김동유 [마릴린 먼로 vs 마오 주석] 2005
김아타의 작품도 이런 맥락에서 불교적인 연상을 일깨운다. ('我他'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이 작가는 이름에서 보듯 불교사상에 심취해있다고 하며 수도승과 같은 외모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마오쩌둥의 흉상을 얼음조각으로 제작하여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이미지가 녹아 사라지는 과정을 촬영한 것이다.단단하게 얼어붙어서 변하지 않을 것 같던 마오가 녹아들며 형체를 잃고 사라져 간다.
마오쩌둥(毛澤東)은 중화인민공화국 초대주석의 자리에 오른 공산당의 위대한 지도자였다.
이전에 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었고 중국의 주권을 찾기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였다. 그리고 그는 경제정책에 완전히 실패한 무능력한 독재자였고
민중을 억압하고 선동하는 폭군이었으며 중국 문화의 발전을 가로막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술과 담배를 즐겼고 여자도 마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전적인 영웅의 모습과 닮기도 했다. 가족사로 볼 때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비정한 아버지이기도 하다. 우리 시대에 마오쩌둥은 무엇인가? 마오의
환영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동시대에도 계속되는 인기의 비결은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 마오는 길에서
살아가는 고양이었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몇번인가 그 고양이의 날카로운 눈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 어느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동네의
꼬마들이 그 고양이를 둘러싸고 나뭇가지로 찌르고 돌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비척 마른 새끼고양이는 까만 털을 바짝 세웠지만 아이들은 그
고양이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지켜보다가 아이들을 쫓아낸 뒤 고양이를 돌아보았다. 고양이는 가지 않고 그 곳에
있었다.
중국어로 '고양이 묘(猫)'를 '마오'라고 발음하는데, 나는 그 새끼고양이를 마오라고 부르기로 했다. 마오는 너무 어려서
엄마를 잃었는지 분유를 타서 젖병을 물려주어도 그걸 빨아먹지 못했다. 우리 부모님은 길고양이를 집에서 키우도록 허락하면서 이 아이가 다 자란
뒤에는 거리로 돌려보낼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는데, 마오는 자라기 전에 우리집을 떠났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나른하게 그 작은 몸을 기대며
꼬리로 제 엉덩이를 휘감던 까만 새끼고양이는 그렇게 손바닥 위에서 죽었다.
마오를 추억하며, 앤디 워홀의 고양이 그림을 첨부한다.
스티커로 제작된 아트상품. 마오의 환영은, 이렇게 소비되고 있다.
* 삼천포 미술관 개관의 변 : 안녕하세요. Marilyn입니다. SM in Art라는
칼럼을 시작으로 남로당원 여러분들과 인연을 맺은지 반년이 되어갑니다. 제 개인적인 사정과 지적 한계에 다다른 까닭에 당분간은 SM이란 주제와
거리를 두기로 했습니다만 제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잘 맞는 파트너를 만나 더 심오한 세계를 알게 된다면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 웹진이란 매체를 통해 실시간으로 소통할 수 있었다는 점은 정말 즐거웠습니다. 이번에는 보다 가벼운 이야기로 편안하게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잘 가다가 삼천포로 빠진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서울이든 삼천포든 아무렴 어떻겠습니까. 모로가도 즐거우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는 저도 정처없이 써볼랍니다. |
- Marilyn(marilyn@xddanz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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