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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종교, 사상

[스크랩] 2001년 세계지식인 지도 2부 - 중앙일보

 

[세계 지식인 지도] 월러스틴과 세계체제론

 

 

임마누엘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세계체제론’의 창시자로 우리 학계에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우리 학계에 끼친 영향도 적잖은 편인데, 사회학․국제정치학․서양사학․문학평론 등 지평이 넓다. 세계체제론은 무슨 대단한 이론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인 서구 사회과학 인식론에 대한 문제제기이며, 19세기 서구에서 형성된 서구사회과학에 대한 탈피의 요구이자 대안에 대한 요청이다.

 

그의 지적 세계를 알기 위해서는 두가지 요인을 짚어야 한다. 하나는 뉴욕에 있는 컬럼비아대학이며, 다른 하나는 1950~60년대 정점을 이룬 미국 헤게모니다. 그는 47년부터 71년까지 24년간, 콜럼비아대학에서 학부부터 박사까지 교육을 받았고 이어 교수생활을 했다. 이 자체가 대단히 예외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이 시기가 바로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의 황금기’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런 미국의 핵심도시 뉴욕은 세계 생산과 교역․금융․국제정?ㅉ???센터였다.

 

 

***식민국 독립 연구 천착

 

세계문화의 거점인 뉴욕과 서구 사회과학의 정점을 이루었던 컬럼비아대학에는 칼 폴라니(1886~1964, 헝가리 경제학자)․C. 밀스(1916~62, 미국 사회학자)․다니엘 벨(82, 미국 사회학자)․라이오닐 트릴링(1905~75, 미국 영문학자) 등이 어우러져 사회평론의 르네상스를 구가했다. 당시 컬럼비아 사회학은 사회를 균형상태로 보고 그 시스템의 작동원리를 탐구하는 구조기능주의가 강했는 데, 월러스틴은 자신을 이단자로 부를 만큼 이에 반기를 들었다.

 

월러스틴을 흔히 ‘68년 혁명’의 산물이라고 한다. 그는 분명 그 혁명의 중심에 있었고, 그 혁명에 참여해 결국 콜럼비아대학을 떠나야 했다. 그는 헤게모니국가와 도시가 제공하는 문화적 자양분을 절제하지 않고 받아먹은 사람이며, 또한 미국 헤게모니에 거세게 저항한 반항아이기도 했다.

 

그의 지적 활동은 세 시기로 나누어 얘기할 수 있다. 제1기는 비서구세계에 관한 연구, 특히 아프리카의 식민령과 신생국 독립의 정치에 초점이 두어졌다. 그는 20세기 최대의 화두로 서구세계의 비서구세계에 대한 지배를 꼽고 이에 천착했다. 그는 서구가 지배하는 사회과학에서 비서구인들의 소외를 극복하고자 했으며, 그들에게 역사를 부여하고자 했다. 이런 문제의식은 프란츠 파농(1925~61, 알제리 정신병리학자․철학자)으로부터 큰 영향을 입었다. 초기 종속이론가인 A.프랭크(72, 독일)나 사미르 아민(70,이집트) 같은 이들도 유사한 관심을 가졌다. 다만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중심․주변의 구도를 극복하고자 하며, 그 양자간 모순이 완화되고 그래서 전체 체제가 유지되는 데 이바지하는 반(半)주변부라는 새 범주가 추가되는 바 그의 중요한 학문적 기여로 평가된다.

 

 

***일국의 체제 구성 부정

 

신생국 독립과 이후 민족통합 연구에서 그가 봉착한 딜레마는 바로 국가에 관한 문제였다. 긴 고민 끝에 주권국가나 민족사회가 사회체제를 구성하지 못한다고 단정, 이들을 버리고 세계체제만이 유일한 사회체제라고 결론짓는다. 적어도 사회체제라 부를 때는 두 가지 조건, 즉 독립적인 체제로서의 자기완결성과 고유한 내재적 발전 원리를 갖추어야 하는 데 세계체제만이 그 기준에 합당하다고 단순화한다.

 

제2기는 세계체제의 작동에 관한 연구에 몰두한 시기다. 세계체제는 지리적이고 기능적인 광범위한 분업체제이며, 현실적으로는 유럽에서 16세기 긴 과정을 거쳐 태동하게 되었다고 본다. 유럽에서 탄생한 근대세계는 그가 ‘세계경제’라고 부르는 유형이었으며 자본주의이기도 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단일한 분업체제안에 다수의 정치구조와 문화들이 산재하기 때문에 단일 정치구조를 갖는 세계제국과 구분된다. 이 시기 프랑스 아날학파의 대부인 페르낭 브로델(1902~85, 프랑스 역사학자)을 사숙했다. 마르크스․슘페터․폴라니와 더불어 그의 사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사람이 바로 브로델이다. 시간과 공간이 사회적 창안이라는 인식, 그리고 그들이 사회분석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깨우침을 준 이가 바로 브로델이었다.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끊임없는 축적을 그 첫째 속성으로 삼으며 상품생산을 위주로 한다. 그것은 중심-주변-반주변이라는 기축적 분업구조를 가지며 이들이 이루는 세계시장을 주목한다.

 

제3기는 사회과학 및 지식구조 연구기다. 특히 19세기 사회과학의 본격 등장이 당시 유럽 세계경제 발전의 정당화 기제로서 지니는 의미를 밝힌다. 그는 유럽중심주의로 물든 근대 사회과학의 면모들(견고한 분과 학문구조, 소통과 대화의 부재, 비서구 지식형태의 야만시, 역사와 법칙의 대립,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이등분)을 밝히고 이로부터 탈피할 것을 주장한다. 역사적 사회과학, 통합 학문에 대한 실행을 강변한다.

 

 

***통합 학문 중요성 강변

 

월러스틴 학문의 두 전제는 세계체제만이 온당한 분석단위이며, 모든 사회분석은 역사적인 동시에 체제적이라는 점으로 요약된다. 그리고 그는 학문과 정치의 변증법을 일생의 원칙으로 삼았다. 달리 말해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을 추구했던 것이다. 학문은 최대한 진실에 다가가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며 그런 학문은 도덕적 선택에 이바지해야 하고, 궁극적으로 정치적 실행을 통해 세계를 바꾸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그 세계란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세계다.

 

 

이수훈 경남대 교수.사회학<leesh@kyungnam.ac.kr

 

 

<월러스틴은 누구…>

▶1930년 미국 뉴욕 출생
▶51년 미 컬럼비아대 졸업
▶54년, 59년 컬럼비아대 사회학 석.박사 박위
▶76년 프랑스 파리7대학 명예박사 학위
▶58~71년 컬럼비아대 교수
▶71~76년 캐나다 맥길대 교수
▶76년~현재 뉴욕주립대(빙햄턴) 석좌교수 및 동대학 페르낭 브로델 경제.역사체제.문명연구소 소장
▶94~98년 국제사회학회(ISA) 회장

 

 

*** 관련 저작들은

 

<번역서>
▶『근대세계체제』1․2․3 (까치, 74․80․1989).
▶『역사적 자본주의』(창작과비평사, 1983).
▶『반체제운동』(창작과비평사, 1989).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창작과비평사, 1991).
▶『변화하는 세계체제, 탈아메리카와 문화이동』(백의, 1991).
▶『자유주의 이후』(당대, 1996년).
▶『유토피스틱스, 또는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창작과비평사, 1998).

 

<연구서>
▶『세계체제론』(나남, 1993).
▶『세계체제의 인간학』(사회비평사, 1996).
▶『세계사를 보는 시각과 방법』(창작과비평사, 1992).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창작과비평사, 1994).
▶『근대세계체제론의 역사적 이해』(까치, 1996).
▶『흔들리는 분단체제』(창작과비평사, 1998).

입력시간: 2001. 02.21. 19:25

 

 

 

[세계화 담론과 월러스틴]

 

‘세계화(globalization)’는 1970년대 이후 전지구적 사회변동을 판독하는 사회과학의 대표적인 화두 가운데 하나다. 세계화란 개념의 역사는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세계적(global) 이란 개념은 4백년 전부터 사용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세계화와 세계주의(globalism)는 61년에야 웹스터 사전에 처음 수록되었다.

 

세계화와 유사한 개념으로 ‘국제화 (internationalization)’가 있다. 국제화가 국민국가간 교류의 확대를 말한다면, 세계화는 분석단위로서의 세계사회가 독자적 차원을 획득하는 것을 뜻한다. 국제화에 대한 학문적 관심의 역사는 멀리 18․19세기 사회사상가 애덤 스미스, 클로드 앙리 생시몽, 카를 마르크스까지 소급되지만 그 본격적인 논의는 20세기 전반의 제국주의론과 그 사상적 후예인 60~70년대의 종속이론,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했던 국제정치학을 꼽을 수 있다. 국제화와 구별되어 세계화가 하나의 독자적인 담론으로 자리를 잡은것은 90년대 이후며, 경제학․정치학․사회학․문화학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세계화 담론과 연관해 월러스틴 세계체제론이 갖는 의의는, 그가 세계화란 개념을 명시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일찍부터 분석단위로서의 세계체제를 전면에 부각하고 이를 역사분석에 적용해 왔다는 점에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기존의 국민국가를 부정하고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새로운 분석단위로 설정하는 그의 이론적 시도는 세계화 담론을 전개하는 대다수 학자들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여타의 세계화 담론과 다른 월러스틴 이론의 중요한 차이를 든다면 그것은 크게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세계화의 역사적 기원은 19세기 후반이나 20세기 후반이 아니라 유럽적 세계경제가 형성된 ‘긴 16세기’에 있다. 둘째, 이런 세계적 사회변동을 분석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사회과학 패러다임에서 탈피해 새로운 시․공간 이론과 사회이론을 구축해야 한다. 셋째, 이른바 보편주의를 표방하는 세계문화는 인종주의․성차별주의와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세계경제의 상부구조라 할 수 있다. 넷째, 자본주의가 전지구적인 것이기 때문에 이에 대항하는 반체제운동 또한 일국의 수준을 넘어 전지구적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월러스틴의 이런 독창적인 주장은 이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세계화를 연구하는 많은 후속 학자들에게 여전히 커다란 자극과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다.

 

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 입력시간: 2001. 02.21. 19:05

 

 

 
[월러스틴과 한국학계]

 

월러스틴 이론에 대한 국내에서의 논의는 주로 사회학․정치학․서양사학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그의 이론을 처음 소개한 것은 1980년대의 비판사회학계와 정치학계였다. 당시 소장 사회학자와 정치학자들은 세계체제론을 종속이론의 한 지류로 해석하고 주요 논문들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러나 이런 관심은 80년대 후반 이후 더 확산되지 못했다. 이때 월러스틴에게 눈을 돌린 쪽은 서양사학계였다. 서양사학계에서 월러스틴 이론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킨 사람은 서울대 나종일 교수다. 그는 89년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고 92년 자신의 저서 『세계사를 보는 시각과 방법』에 수정․재수록했다. 1백쪽이 넘는 이 논문은 체계적이며 심도가 있어 월러스틴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어 서양사학계에서는 월러스틴은 물론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 페르낭 브로델의 역사학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됐다. 그 결실의 하나가 95년 서양사학회 심포지엄을 바탕으로 이듬해 나온 『근대 세계체제론의 역사적 이해:브로델과 월러스틴을 중심으로』이다. 이 책은 부산대 유재건․서울대 주경철․숭실대 김인중․광주대 이영석 교수 등 소장학자들이 필자로 참여, 브로델과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의 역사학적 성과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나종일․유재건․김인중 교수 등은 99년 월러스틴의 주저 『근대 세계체제』 1․2․3을 완역함으로써 세계체제론 연구에 새로운 불을 댕겼다. 서양사학계와 사회과학계 외에 월러스틴의 영향을 받은 학자 가운데 특기할 만한 사람은 서울대 영문학과의 백낙청 교수다.

 

 

정재왈 기자<nicolao@joongang.co.kr> : 입력시간: 2001. 02. 21. 19:26
 
 

 

[세계 지식인 지도] 후쿠야마와 '역사는 끝났다'

 

 

세계화에 대한 논의만큼 현란한 정치적 색채를 띤 논의도 드물다. 세계화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발생한 사건이 다른 지역에 영향을 끼치는, 한마디로 ‘전지구적 차원에서 상호 의존성’ 이 강화되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좌파는 미국이 무력을 쓰지 않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서 동원한 신자유주의 이념의 확산이 세계화라고 주장하며, 우파는 전세계가 실시간에 하나의 단위로 작동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효율적인 시장경제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세계화를 규정한다. 중도파는 ‘제3의 길’이라는 절묘한 대안의 확산이 세계화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Hukuyama) 는 『역사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서구에서 발달한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결합한 형태가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갈 것을 예언하며 이것이 세계화라고 주장한 학자이다. 지구상에는 역사적으로 많은 사회적인 실험이 있었으나 모두 실패했다. 나치즘과 파시즘이 몰락하였고 1989년에는 급기야 사회주의가 붕괴했으며 복지국가와 동아시아의 발전국가는 위기를 맞고 있다. 이와 같은 시대적 배경을 뒤에 업고 후쿠야마는 이제 지구상에 남은 유일한 대안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결합한 형태이며, 이러한 사회체제가 세계화 과정을 통하여 전파될 것이기에 ‘역사는 끝났다’라는 대담한 주장을 편다. 그에게 역사는 일정한 목적을 향해 발전하는 누적적인 과정인데, 자유민주주주의에 이르러 역사는 정점에 이르렀으며 전세계는 이러한 형태로 수렴된다고 주장한 것이다.

 

후쿠야마의 논의가 흥미를 끄는 것은 그가 역사종언의 원인을 밝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체제가 다른 체제보다 효율성의 면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견해와 달리 그는 남에게 ‘인정 받기’를 원하는 욕구로 설명한다. 역사발전의 중요한 동력 중의 하나인 ‘인정 받기’ 욕구는 정부가 시민을 평등하게 인정하고, 시민들은 서로를 인정해 주는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가장 세련되게 충족되었기에 다른 정치적 대안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이런 대담한 주장은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다. 역사에 일정한 진행 방향이 있는가, 또 역사의 정점이 존재하는가 등에 관한 학문적 논의로부터 미국 경제를 다른 나라에 이식하는 세계화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라는 비판에 이르기까지 좌파와 우파 모두의 공격을 받았다. 이슬람의 근본주의, 동아시아의 국가개입형 경제체제, 중국이나 북한의 정치경제 모델은 과연 역사의 종착역에 도달할 것인가 등이 논쟁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역사 종착역에 대한 후쿠야마의 논의는 재벌개혁을 수행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모순적 의미를 갖는다. 재벌개혁을 찬성하는 이들은 IMF가 처방한 세계적 기준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친(親) 후쿠야마론자이지만, 이는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적인 국가개입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반대론자인 셈이다. 마찬가지로 재벌개혁 반대론자들은 권위적 국가개입이 옳지 않다고 보는 점에서 후쿠야마 찬성론자이지만, 한국에만 고유한 재벌 작동체제를 옹호함으로써 반(反) 후쿠야마론을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자본주의를 불신하는 좌파 지식인들이 재벌을 개혁해야 한다는 점에 관한 한 미국이나 IMF의 시각과 동일하며, 현 정부의 재벌개혁 정책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미국의 신(新)제국주의를 우려하는 유럽 좌파 지식인들의 논리와 대동소이한 것이다.

 

후쿠야마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문제의 핵심은 문화적 국가적 특수성을 갖는 한국식, 일본식, 중국식, 독일식 운운하는 정치경제 체제를 해체할 것인가, 아니면 각 나라에 특수한 틀 내에서 잘 작동하도록 적응시킬 것인가에 놓여있다. 역사의 종착역을 믿는 사람이라면 국가를 단위로 하는 어떠한 계획도 보수적인 자국중심주의와 동일시할 것이며, 나라별 특수성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전망하는 사람은 어떠한 보편주의적 시도도 신제국주의나 미국의 음모로 폄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역사의 실험과 논쟁은 한국뿐 아니라 유럽의 각국 등 전세계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후쿠야마의 또 다른 대표작인 『트러스트』라는 책도 『역사의 종말』만큼 우리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그가 IMF 위기 이전에 이미 한국은 신뢰가 낮은 사회라서 한국경제에 미래가 없다고 비관적으로 예견했기 때문이다. 그는 재벌 총수가 전문 경영인을 믿을 수 없어서 족벌경영을 할 수밖에 없고, 이것이 경쟁력을 낮추는 원인이라고 분석한 것이다. 학연․혈연․지연 등의 연줄 안에서만 신뢰하고, 이 연줄을 벗어나면 신뢰 수준이 급격히 낮아지기 때문에 한국 문화는 연줄 밖의 누구와도 거래를 해야 하는 시장 원리에 알맞지 않는다고 그는 해석한다. 사회적 신뢰를 높이는 제도적 처방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 점은 인정하지만, 신뢰를 높이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는 이제부터 우리의 몫이다. 우리 정치경제가 역사의 종착역을 행해 나아간다고 하더라도 신뢰는 자동적으로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김용학 <연세대 교수.사회학> <yhakim@yonsei.ac.kr>

 

 

 

<후쿠야마는 누구>

 

▶1952년 미 시카고에서 출생
▶74년 미 코넬대 졸업(서양고전학 전공)
▶79~80년, 83~89년 미 랜드(RAND) 연구소 연구원
▶81년 미 하버드대에서 '소련외교정책 및 중동외교 정책' 으로 박사 학위
▶현 미 조지 메이슨대 교수

 

 

<관련저작들은>

 

◇번역서
▶『역사의 종말』(한마음사, 1992).
▶『트러스트』(한국경제신문사, 1996).

 

<미번역서>
▶『대격변』(1999).

입력시간: 2001. 03.07. 16:39 
 
 

[후쿠야마를 보는 국내 두 시각]

 

 

후쿠야마의 세계를 취재하면서 특이한 사실을 알게 됐다. 국내에는 그에 관한 전문가가 거의 없지만,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학자들도 상당수 그와 그의 사상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후쿠야마는 세계적인 석학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국내에 알려져 있다. 국내의 언론들이 그에게 폭발적인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어느 매체할 것 없이 IMF사태 등 굵직한 사건이 터지면 그와 대형 인터뷰를 했다. 그럴 때마다 후쿠야마는 언론의 ‘입맛’에 맞는 명쾌한 해답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그를 고명한 학자나 사상가라기보다 ‘학술 흥행사’로 보기도 한다

 

미국 시카고 출신의 일본계 3세인 후쿠야마는 1989년 내셔널 인터레스트라는 사회과학 잡지에 논문 “역사의 종말”을 발표하면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문의 골자는 세습 왕권주의와 파시즘, 공산주의가 차례로 리버럴한 민주주의 이념에 제압당함으로써 이념경쟁의 역사는 끝났다는 것이다. 이 논문을 부연 설명한 게 단행본 『역사의 종말』이다.

 

이어 그는 95년에 낸 『트러스트』란 책에서 “신뢰야말로 한 나라의 경제․사회를 결정하는 주요 요소”라고 주장했으며, 99년 출간한 『대격변』에서는 “탈공업화 사회에서는 범죄의 증가 등 대격변이 불가피하지만 인간은 원래 서로 화합하도록 프로그램돼 있다”며 ‘인간화합’을 주창했다.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 입력시간: 2001. 03.07. 16:36
 
 

 
[후쿠야마가 불러일으킨 논쟁]

 

후쿠야마가 촉발한 논쟁들은 그의 학문적․개인적 배경과 관련이 깊다. 그는 일본인 3세로 미국에서 태어나 활동하는 보수주의자다. 일본․미국․보수 이 세 가지 요소는 이후 논쟁별로 그를 과대 혹은 과소 평가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후쿠야마를 둘러싼 논쟁들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1989년 『역사의 종언』으로 불거진 자유민주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논쟁이다. 후쿠야마는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의 붕괴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승리함에 따라 더 이상 진보는 없다며 역사의 종말을 선언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체제 경쟁이 막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은 이를 부정한다. 즉 동유럽의 교조적인 좌파가 몰락했을 뿐 서유럽의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 는 건재하며 유럽연합 회원국 대다수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집권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쿠야마는 유럽의 사민주의도 고전적 사민주의와 영국의 블레어가 주창하는 ‘제3의 길’과 같은 현실주의적 중도노선으로 나뉘어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경우 미국식 자유주의 모델을 채택한 현실적 사회주의가 유럽좌파의 대세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프랑스의 고전적 사민주의측은 ‘제3의 길’은 하나의 유행에 불과하며 이미 그 한계점을 보이고 있다고 재반박한다.

 

둘째는 95년 『트러스트』 발표 이후 불거진 저(低)신뢰․고(高)신뢰 사회 논쟁이다. 후쿠야마는 한 나라의 경쟁력은 그 나라가 고유하게 가지고 있는 신뢰와 사회적 자본의 수준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저신뢰․고신뢰 사회를 구분하는 그의 기준이 사회적 자본의 축적 여부와 같이 너무 단순하며 이는 일종의 ‘결과론’일 뿐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미 프린스턴대 사회학 교수 알렉산드로 포르테(미 사회학회 회장) 같은 학자는 후쿠야마식 논의가 사회적 자본의 원천과 그것이 가져오는 이익 혹은 효과를 혼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후쿠야마의 논리에는 어떻게 하면 사회적 연대와 신뢰를 창출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고 단지 ‘사회적 연대와 신뢰가 풍부해서 발전했다’는 식의 설명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90년대 후반 발발한 아시아 경제위기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불거진 ‘아시아적 가치’ 논쟁이다. 많은 서구 학자들이 아시아 금융위기를 가져온 원인으로 유교적 가치가 배태한 정경유착과 인치를 지목했을 때 후쿠야마는 이에 반대하였다. 문제는 정책의 실패이지 아시아적 가치와 같은 문화적 배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동시에 아시아적 가치와 민주주의가 함께 발전할 수 없다는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나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의 주장을 일축했다. 전체주의 통치체제를 정당화하기 위한 주장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한국․대만은 이미 아시아에서 아시아적 가치와 민주주의가 병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했다.

 

 

이상민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사회학> : 입력시간: 2001. 03.07. 16:35
 

 

 

 [세계 지식인 지도]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아마도 프랑스인들만큼 세계화에 비판적인 국민들도 드물 것이다. 프랑스인의 비판적 태도는 서로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고 있는 우파의 대통령과 사회당의 총리가 공유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책 담당자들로부터 평범한 시민들에 이르기까지 고루 퍼져 있는 일반화된 태도이다. 이러한 범국민적 태도는 세계화를 주도하고 있는 팍스 아메리카나에 대한 늙은 유럽의 히스테리라고 볼 것이 아니다. 오히려 프랑스인들은 철저한 상업적 이윤 추구와 무자비한 생존 경쟁의 논리로 추동되고 있는 세계화의 밀물에 맞서 자유 평등 박애에 입각한 도덕의 방파제를 쌓고 있는 것이다.

 

 

***『르 몽드』 자매 월간지

 

프랑스의 대표적 신문 『르 몽드』의 자매 월간지인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Le Monde diplomatique)』는 바로 이 세계화에 맞서 행동하는 지식인들의 최전선 교두보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민주주의, 시민성 그리고 연대’를 사시(社是)로 삼고 있는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화 추세를 비판적으로 주시하기 시작해서 97년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와 격렬한 지상 논쟁을 치렀고, 재작년엔 그 동안 발표된 글들을 추려 세계화에 대한 종합 보고서인 『세계화를 이해하기 위하여』라는 CD롬 타이틀을 출시하였다. 그 이후에도 99년 5월 이후 2001년 1월까지 세계화를 다룬 40편의 논설을 게재하였으니, 한달에 두 편 이상의 글이 이 주제에 할애된 셈이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를 총지휘하고 있는 사령탑에는 사장 겸 주필인 이냐시오 라모네(58) 가 있다. 파리 7대학 교수로도 재직하고 있는 라모네는 한국에 번역된 『커뮤니케이션의 횡포』(민음사) 에서 지식인으로서의 언론인의 책임과 윤리를 깊게 강조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 지식인의 전통을 직접 잇고 있는 사람이다. 세계화에 대한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비판의 시각들은 라모네의 손에서 솟아 올라 퍼져나간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라모네의 필봉은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라는 반세계화 저항군의 신호탄이다.

 

물론 사령관이 혼자서 전쟁을 치르는 것은 아니다. 이 기나긴 전쟁의 최후의 승리를 위하여 적어도 세개의 집단이 협력한다. 우선 장교와 부하들이 있다. 편집국장인 베르나르 카상, 편집국 기자였거나 현재 기자인 자크 드코르느와․세르주 알리미․크리스티앙 드 브리 등이 라모네의 ‘어 퓨 굿 멘’ 이다.

 

이들 편집기자단이 긴밀히 짜여 정치 경제 문화 전면에 걸친 반(反)세계화 항전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신자유주의적 경제의 자유 거래가 감추고 있는 철저한 약육강식의 논리를, WTO(세계무역기구)․IMF(국제통화기금)․세계은행 등 세계 기구들이 시장 단일화를 부추기면서 약소국의 시장을 먹이로 하는 포식자들의 축제를 주도하는 과정을, 그리고 그 와중에서 문화적 획일화와 사유의 정체(停滯), 사회 분열이 야기되는 끔찍한 현상을 적발하고 고발한다. 그 고발과 비판 위에서 세계화에 희생된 약소국민들과 약소국의 중소기업들 사이의 실천적 연대를 모색하고 촉구한다.

 

다음『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사상적으로 동행 혹은 후원하는 지식인 그룹이 필진으로 대거 참여한다. 모든 권력에 대한 저항을 내세움으로써 스스로 반(反)권력의 권력으로 떠오른 피에르 부르디외(70), 세계자본주의의 개념을 세운 이매뉴얼 월러스틴(71), 남아메리카 혁명에 참여해 오랫동안 옥살이를 했으며 서로간의 중개를 통해 삶이 재조명돼야 한다는 이른바 ‘매개학’의 창시자인 레지스 드브레(60), 역사학자이자 파리 7대학 명예교수인 장 셰노(79), 사르트르가 창간한 『레 탕 모데른』의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가장 탁월한 사회주의 이론가로 평가되는, 노동 문제와 정치 생태학 전문가인 앙드레 고르즈(77), 루뱅 가톨릭대 경제학 교수인 리카르도 페트렐라 등 쟁쟁한 학자들이 사상적 동반자들이다.

 

 

***쟁쟁한 학자 필진에

 

이 사상적 동반자 중의 하나인 페트렐라가 95년 만든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친구들’은 정당이나 이념과 관계없이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편집노선을 옹호하는 시민들의 모임으로서, 약 1천4백명의 열성 회원과 55개의 지역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월간지의 자주적 운영을 지속시키기 위해 재정지원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떠맡으면서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이념을 전파하는 데 힘을 쏟는다. 마지막으로,『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와 실천의 차원에서 연대하는 사회 조직들이 있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전 주필인 클로드 쥘리엥이 86년 파리에서 총재직을 맡으면서 출범하였고, 그 이후 50여개의 도시로 확산되어 나간 ‘콩도르세 서클’은 대학 교수․경제 전문가․노동운동가․연대투쟁인사들이 함께 모여 세상에 대해 걱정하고 기술 혁신, 세계화, 개인주의 그리고 급변사회의 출현에 맞서 어떻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한 것인가에 대해 매달 모여 토론하는 범지식인 단체다.

실천적 연대의 한 극에는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가 적극적으로 조명하고 지원하는 조세 보베(47) 와 그가 이끄는 ‘농민 연합(Confederation paysanne)’이 있다. 맥도널드 체인점 파괴 사건 이후 일약 제2의 아스테릭스(로마의 시저에 대항하여 싸우는 골족의 투쟁을 다룬 코믹 영화 아스테릭스의 주인공)로 떠오른 조세 보베는 농민연합을 이끌면서 반세계화의 선봉에서 나날의 투쟁을 개진하고 있다. 그러나 조세 보베만이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전우인 것은 아니다.

 

 

***약소국민 연대 모색

 

세계경제포럼이 스위스의 다보스에서 열린 2001년 1월 25일에서 30일 사이의 똑같은 기간에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세계 각국에서 모인 조합 지도자들, 다양한 형태의 NGO 책임자들․시민 대표들이 모여 ‘세계사회포럼’을 열고 ‘금융가의 시각에서가 아닌 시민의 시각에서’ 세계의 문제를 토론하였는데, 여기에 모인 2천~3천의 지식인들과 그들이 대표하는 전 세계의 세계화 비판자들이 모두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의 우방이자 동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에 와서 이 행동하는 동지들이 꿈꾸는 것은 단순히 반세계화가 아니다. 포르투 알레그레 포럼은 “항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정신 속에서 새로운 유형의 세계화 기획을 가능케 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틀을 짜기 위한” 모임이었다고, 따라서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었다”고 라모네는 확언한다.

 

 

정과리 <연세대 교수.불문학> <circe@yonsei.ac.kr> : 입력시간: 2001. 03.14. 16:53
    

 

 

[국내 반세계화 논객들]

 

세계화에 대한 비판과 거부에도 이념적 스펙트럼과 정책적 대안에 따라 여러 그룹이 존재한다. 자본주의의 착취구조 자체를 폐기하려는 마르크스주의가 급진적 반(反) 세계화론을 대표한다면, 합리적 시장 질서를 존중하되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케인즈주의는 온건한 반세계화론을 대표하며, 이 케인스주의는 다시 그 정책의 강도에 따라 좌파와 우파로 나눠 볼 수 있다. 국내에도 이런 비판 및 거부 담론은 두루 존재한다. 도식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정운찬(서울대) 교수가 온건 케인스주의에 가깝고 김균(고려대)․이병천(강원대)․박순성(동국대) 교수는 좌파 케인스주의를 대표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가운데 특히 정운찬․이병천 교수는 IMF 경제 위기 이후 ‘DJ노믹스’에 대한 왕성한 비판적 저술 활동을 벌여왔다. 정운찬 교수의 『한국 경제 아직도 멀었다』와 이병천 교수의 『위기와 대전환』은 그 대표적인 저작으로 꼽을 수 있다. 이병천 교수가 관여하는 사회경제학회의 『사회경제평론』 최근호에서도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다루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운 그룹으로는 1980년대 사회구성체 논쟁에 참여했던 김성구(한신대) ․김세균(서울대)․오세철(연세대) 교수를 지목할 수 있다. 이들 사이에도 견해의 차이가 없진 않으나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야만적 성격을 전면 비판하고 노동자계급의 국제연대를 적극 강조한다는 점에서 급진적 반세계화론을 대표한다. 김성구 교수의 『경제위기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진보평론』과 『현장에서 미래를』은 이런 입장을 대표하는 저작과 잡지들이다.

 

한편 학회에 소속돼 있지 않은 독립매체 중 반세계화 논조를 유지하는 곳으로 『당대비평』을 꼽을 수 있다. 97년 창간 당시부터 반세계화를 주요 주제로 택한 『당대비평』은 이번 봄호(14호) 에서도 ‘미국특집’을 다루며 미국의 패권주의와 ‘무의식의 식민지화’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권혁범(대전대)․임지현(한양대) 교수 등이 이곳의 대표 논객이다.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 입력시간: 2001. 03.14. 16:54
 
 

 

[세계 지식인 지도] 크루그먼과 국제무역 새로 읽기

 

고전적인 국제무역론은 국가들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무역을 한다고 가르쳐 왔다. 데이비드 리카도(1772~1823, 영국의 경제학자)는 국가간의 기술차이에서 무역의 발생원인을 찾았고, 노벨상을 받은 ‘헥셔-올린 정리(定理)’는 노동과 자본의 부존량이 국가별로 다르기 때문에 무역이 발생한다고 했다. 또한 이들 고전파 국제무역이론은 이렇게 발생한 무역이 교역국 모두에 이익을 준다는 점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즉 프랑스는 독일보다 멕시코나 브라질에서 더 많은 무역의 기회와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1970년대와 80년대는 이러한 고전파 국제무역이론에 대한 불만이 경제학 안팎에서 고조된 시기였다. 경제학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무역의 폭발적인 증가가 선진국과 후진국 사이에서가 아니라 기술과 생산자원의 부존량이 아주 비슷한 선진국간의 무역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에 당혹했다. 이와 더불어 많은 경제평론가들은 ‘일본 현상’에 주목했다. 그들에 의하면 일본은 경제학이 그렇게도 역설해 왔던 자유무역과는 반대로 갔기 때문에 성공한 나라였고, 미국은 우매하게도 이 일본과 자유무역을 함으로써 손해를 보는 나라였다. 또한 그들은 규모의 경제나 독과점산업의 존재를 무시한 고전적 자유무역주의는 현대 경제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선진국간 무역증대 주목

 

이러한 상황에서 폴 크루그먼(48)은 호주 출신의 켈빈 랭카스터(1924~99, 미 컬럼비아대 교수 역임), 인도 출신의 아비나시 딕시트(미 프린스턴대 교수) 등과 함께 독립적으로 새로운 무역이론을 개발했다. 이들은 모두 상품차별화와 규모의 경제라는 두 현상에 주목했다. 소비자들은 취향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종류의 상품이 시장에서 공급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기업들이 지나치게 많은 종류의 상품을 생산하게 되면 각 종류의 상품에 대한 판매량이 너무 작게 되고, 이는 규모의 경제가 심각한 산업에서 생산단가를 급증시켜 적자를 유발한다. 따라서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 종류는 소비자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와 규모의 경제간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시장의 크기에 제한받게 된다.

국제무역은 이러한 긴장을 완화시키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무역으로 인한 시장의 확대는 생산자들이 규모의 경제를 더욱 활용할 수 있게 해주며, 소비자들은 국산품과 수입품을 통해 선택의 범위를 확대하게 된다. 이렇게 소비자의 다양성에 대한 욕구와 규모의 경제로 인해 발생하는 무역은 기술과 생산자원에서 거의 차이가 없는 프랑스와 독일간에도 빈번히 이뤄진다. 따라서 새로운 국제무역이론은 무역의 급속한 확대가 주로 선진국 시장을 중심으로 전개됐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다.

 

크루그먼은 새 무역이론을 가지고 많은 제조업 분야에서 자국시장의 크기가 큰 나라가 우위를 확보하는 현상, 선진국간의 무역은 대부분 산업내 무역이라는 사실, 급속한 무역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유럽에서 소득분배의 문제가 심화하지 않았다는 점들을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그는 동료인 이스라엘 출신의 엘하난 헬프먼(미 하버드대 교수)과 함께 새로운 무역이론과 고전파 무역이론을 통합하는 데 성공했고 규모의 경제와 독과점 하에서 고전적 자유무역주의가 어떻게 수정되거나 확대돼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는 이외에도 국제경제학의 전 분야에 걸쳐 수많은 공헌을 했다. 지나치게 팽창적인 통화정책이 고정환율을 붕괴시키는 과정을 보여준 그의 박사논문은 외환위기를 설명하는 많은 모형들의 초석이 됐으며, 이어 그는 유럽식 환율제도의 작동원리, 엔-달러 환율 변동성의 증가 원인을 밝히는 영향력 있는 국제금융이론을 개발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규모의 경제를 바탕으로 도시의 형성과정과 산업의 입지를 설명하려는 ‘경제지리학’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크루크먼이 진짜 유명하게 된 것은 이러한 노벨상급 학문적 공헌이 아니라 90년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경제평론가로서의 활동 때문이었다. 그는 어설픈 보호무역주의로 무장하고 일본을 공격하는 평론가와 학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일을 즐겼다. 이어 평론 대상을 경제학의 전 분야로 확대해 주류경제이론에 입각하지 않은 많은 통설에 신랄한 공격을 가했다.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산업정책을 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라이시 미 노동부장관은 생각이 짧은 정책사업가이며, 과거 소련이 미국의 안보를 위협했던 것처럼 이제는 일본이 미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반일 무역전문가 프레스토위츠는 기름장수라고 했다. 당시 MIT에 함께 있었던 레스터 서로 교수와는 여러 분야에서 논쟁을 벌였는데 특히 미국 노동자의 임금이 저임금국과의 무역으로 인해 낮아졌다는 그의 주장을 경제학적 근거가 없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또한 국가간의 무역을 전쟁처럼 여기는 그의 이론들을 사이비 경제학으로 간주했다.

 

 

***보호무역주의 신랄 비판

 

이러한 적극적인 평론활동은 독설가로서의 그의 이미지를 굳혔고, 이는 그가 클린턴 행정부의 경제수석으로 발탁되지 못한 데 대한 보복이라는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평론활동은 미국 언론의 보호무역적 성향을 약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그는 일반대중에게 경제학을 소개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경제상식의 대부분이 엉터리라는 것을 밝히는 책들을 연이어 출간했다. 이 책들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은 그를 세계에서 유명한 경제학자로 만들었고 그의 홈페이지(http://web.mit.edu/krugman/www/)는 웬만한 학술지와 신문의 위력을 갖게 됐다.

흔히 사람들은 그의 평론이 그가 개발한 독특한 이론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론은 학부생도 이해하는 경제원론을 적용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94년 ‘아시아 기적의 신화’라는 글에서 기술발전이 미약한 한국과 싱가포르는 곧 고도성장을 멈출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 글로 그는 우리 나라에서도 일약 유명해졌다. 하지만 이 예측도 수확체감의 법칙이라는 경제학의 기본원리와 다른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또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이 글이 아시아 외환위기를 예측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예측의 단호함과 아시아 신생공업국들을 망한 소련에 비유하는 독설이 충격의 파장을 확대시켰다. 일본 침체의 원인을 과잉투자 붕괴에 의한 투자감소와 과잉저축에서 찾고 소비를 자극시키는 과감한 통화정책을 권고한 그의 처방도 케인스 경제학의 교과서적 적용이었다.

 

 

송의영 서강대교수.경제학 <eysong@ccs.song.ac.kr>


 

 

<폴 크루그먼은 누구…>

 

▶1953년 미국 뉴욕 출생
▶74년 예일대 졸업
▶77년 MIT 경제학 박사
▶77~79년 예일대 교수
▶79~94년 MIT 교수
▶82~83년 미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 위원
▶94~96년 스탠퍼드대 교수
▶97~현재 MIT 교수
▶91년 미 경제학회가 주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 수상

 

 

<관련 저작들은…>

 

<번역서>

 

▶『경제학의 향연』(부키, 1997).
▶『팝 인터내셔널리즘』(한국경제신문사, 1997).
▶『불황경제학』(세종서적, 1999).

 

<미번역서>

▶『시장구조와 해외무역』(1987).
▶『통화와 위기』(1992).
▶『지리와 무역』(193년)
▶『발전과 지리, 경제이론』(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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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2001. 03.21. 18:39
 

 

 

[국제무역 용어해설]

 

▶헥셔-오일린 정리(定理) =비교우위의 원인을 각국의 생산요소 부존량의 차이에서 설명하는 이론이다. 즉 자본이 풍부한 나라는 자본 집약적인 상품을 수출하고, 노동이 풍부한 나라는 노동 집약적인 상품을 수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규모의 경제=각종 생산요소의 투입량을 증가시킴으로써 이익이 증가되는 현상을 말한다. 대량생산방식으로 한 단위당 비용을 줄이고 이익을 늘리는 방법이 일반적인데, 최근에는 특히 생산설비의 증감으로써 생산비를 낯추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수확체감의 법칙=한계생산성 체감의 법칙이라고도 한다. 재화의 생산에서 다른 생산요소들의 투입은 모두 일정하게 하고 어느 한가지 요소의 투입만을 증가시킨다고 가정할 때, 어떤 시점에 도달하고 나면 그 이후로는 추가로 얻는 산출량이 점차 감소하게 된다는 경제법칙이다. 맬더스가 '인구론' 에서 제기했다.

 

입력시간: 2001. 03.21. 18:40
 

 


[‘위대한 폭로자’ 크루그먼]

 

‘위대한 폭로자(The Great Debunker)’

 

1996년 미국의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크루그먼을 소개하는 글의 제목을 이렇게 달았다. 관습적인 지혜를 깨는 몇 안되는 ‘에고(자존심)’로서 그를 이 한마디로 집약한 것이다. 이는 경제학의 원론을 적용해 잘못된 주장을 꼬집는 독설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드러내는 상징어자 별칭이다. 94년 그가 한국 등 아시아를 향해 쏟아낸 ‘위대한 폭로’도 마찬가지다. 그는 저명한 학술지 ‘포린 어페어스’에 실린 ‘아시아 기적의 신화’라는 글에서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의 경제성장은 허구”라는 주장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아시아의 고속 성장은 ‘요소생산성(기술진보)’의 향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요소투입량(노동과 자본)’의 증가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요소투입량은 무한정 늘릴 수 없기 때문에 성장도 곧 한계에 이른다고 분석했다.

 

‘네마리 용(龍)’ 운운하며 그야말로 성장가도를 달리던 당시 그의 이런 주장은 독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아시아의 경제가 흔들리면서 그의 통찰력과 논리가 새삼 주목 받고 있다. 그의 논리적 타당성에 대한 많은 반론이 있을 수 있겠으나, 어쨌든 그의 경고를 귀담아 들었다면 ‘유비무환’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는 아시아의 위기에 대한 미국과 국제통화기금(IMF)의 대응책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비판을 한 바 있다. 한마디로 미국과 IMF의 처방은 정통 경제이론을 팽개친 채 투기자들과 벌이는 ‘신뢰게임’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53년 미국 뉴욕에서 출생한 크루그먼은 예일대와 MIT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MIT 박사 논문(77년)의 지도교수는 노벨경제학상 수장자인 로버트 솔로다. 매년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크루그먼은 국제무역론과 국제금융론․산업정책․경제지리 분야에서 독창적인 연구 업적을 쌓았다. 이 분야의 이론을 그는 컴퓨터 영문 키보드의 첫줄을 따 ‘QWERTY 경제학’이라고 부른다. 이런 업적으로 그는 91년 미 경제학회가 ‘가장 탁월한 소장 경제학자’ 에게 2년마다 주는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받았다. 지난해 1월 2일부터 뉴욕타임스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96년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인터넷잡지 ‘슬레이트(Slate)’에 ‘우울한 과학’이란 제목의 경제칼럼을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 입력시간: 2001. 03.21. 18:40

 

 


[세계 지식인 지도] 네트워크 금융자본주의의 제왕

 

네트워크로 연결된 세상에서 힘이 센 사람은 누구일까. 정치 권력의 자리를 제치고 급부상하는 세력은 아마도 ‘전자투자가(electronic investor)’ 집단일 것이다. 온라인으로 연결된 수많은 단말기를 통해 이 순간에도 외환거래로부터 선물거래에 이르기까지 각종 거래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새롭게 펼쳐지는 세계화 시대에 실질적인 파워를 쥔 사람들이라 하겠다. 이들은 네트워크로 연결이 가능한 지구촌 곳곳에 흩어져 활동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 유독 우리의 눈길을 끄는 사람들은 전자투자가 그룹의 ‘큰 손’ 들이다. 굴지의 기관투자가들과 전설적인 명성을 지닌 월가의 인물들이라 하겠다. 1997년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우리들은 세계화된 세계에서 월가의 큰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 파워엘리트 집단임을 확인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J P 모건, 메릴 린치, 골드먼 삭스, 샐러먼 스미스 바니 등이 기관투자가들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다. 월가의 거물들로는 조지 소로스(71), 존 템플턴(89), 워런 버핏(69), 칼 아이칸(65) 등을 꼽을 수 있다.

 

 

***97년 외환위기 통해 ‘큰손’ 확인

 

국제금융자본의 빛과 그림자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논의와 관계없이 그들을 의식하지 않고서는 국가경영이건 기업경영이건 가능하지 않게 된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굵직한 몇몇 사건들과 기행(奇行) 으로 알려진 조지 소로스(George Soros)는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의 첨병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헤지 펀드의 제왕으로 널리 알려진 소로스는 헤지 펀드의 위력을 만천하에 증거한 인물이다. 헤지 펀드는 뮤추얼 펀드나 연기금과는 달리 국제자본시장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초단기 금융상품으로 이루어진다.

헤지 펀드가 주요 투자대상으로 삼는 파생금융상품의 경우 5~10%의 증거금만으로 거래가 이루어지고 자본금의 20배에 달하는 자금을 운용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강력하다. 또한 헤지 펀드는 그 성격상 치고 빠지는 전략을 신속하게 구사하는 등 매우 기민하게 움직여 다른 투자기관들을 리드하는 선행지표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

 

92년 영국의 잉글랜드은행을 초토화했던 파운드화 매도나 97년 태국 바트화 매도로 본격화된 아시아 외환위기는 헤지 펀드의 위력이 메가톤급 무기에 해당할 수 있음을 잘 가르쳐 준 바 있다. 수십년간 제조업을 통해 쌓아올린 한 국가의 부(富)가 한 순간에 없어져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외환위기를 통해서 깨달은 것이다.

 

97년 초부터 헤지 펀드들은 경상수지 적자와 환율이 상대적으로 고평가된 태국의 바트화를 타깃으로 바트화 투매를 계속했다. 헤지 펀드들은 한쪽으로 몰려다니는 군집성향이 강하다. 타이거 펀드 등 월가의 주요 헤지 펀드들이 함께 바트화의 매각 공세에 가담하면서 태국은 외환 보유고가 바닥날 위험에 처하게 된다. 태국이 고정환율제를 포기하자마자 바트화는 대폭락을 시작했다. 주변국인 말레이시아의 링기트화, 인도네시아의 루피아화, 필리핀의 페소화도 연쇄 폭락했다. 헤지펀드들은 바트화가 본격적으로 폭락하기 직전, 바트화를 대량 매도하는 수법을 사용했다. 마하티르 말레이시아 총리는 소로스를 비열한 투기꾼으로 몰아 붙였으나 펀드들의 반격은 가혹했다.

 

 

***27년간 연평균 35% 고수익

 

그렇다고 해서 소로스가 늘 이기는 게임을 해 온 것은 아니다. 그가 69년에 세운 퀀텀펀드는 27년간 연평균 35%의 고수익을 올리면서 승승장구해 왔으나 87년 10월 19일 월가의 대폭락에 이어 97년 홍콩과 중남미, 98년 영국 등에서 상당한 손해를 보았으며 98년 8월에는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치명적인 손실을 입은 바 있다. 소로스를 필두로 하는 국제금융자본가들의 약진은 결국 정보기술혁명이 가져온 세계화된 세계에서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유념해야 할 점은 자본시장의 거대한 네트워크로 묶여지는 세계에서 한 나라를 운영하는 사람들이 문제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인위적으로 환율을 조정하거나 일국의 경제정책을 왜곡하면 필연적으로 투기자본의 공략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조지 소로스는 자국의 경제 문제를 자기 편한 대로 다루고 싶어 하는 욕구를 가진 정치가들에게 헤지 펀드라는 메가톤급 금융무기로 강력히 제어해 왔다고도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결과는 선의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다. 무자비할 만큼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가져온 의도하지 않은 부산물이라 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소로스의 기행은 부를 쌓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흔히 보이는 유식함과 고상함을 향해서 나가고 있다. 그가 존경하는 인물인 자유주의 철학자 칼 포퍼의 저서(『열린사회와 그 적들』) 이름을 빌려서 ‘열린 사회 재단’을 세우고, 동유럽국가들이 미국과 같은 열린 사회를 향해 나가도록 교육과 자선 사업을 펼치고 있다. 그가 98년에 펴낸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라는 책에서는 시장근본주의에 대한 경고를 서슴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가 현실 경제에서 탁월한 기업가라고 생각하지만 자본주의에 대해서 그다지 정확한 이해를 하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세계화된 금융자본주의는 피할 수 없는 대세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헤지 펀드를 만들어 국가간의 교묘한 간격을 이용해서 부를 축적한 소로스는 기회의 선점이라는 기업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앞으로 소로스를 비롯한 일군의 전자투자가 그룹들이 미치는 영향은 휠씬 증대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활동을 보면서 미리 대비하고 준비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임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gong@coreinfo.co.kr>

 

 

 

<조지 소로스는 누구인가>

 

▶1930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출생
▶47년 가족과 함께 영국 런던으로 이주, 명문인 런던경제학교(LSE)에서 칼 포퍼의 제자로 철학을 공부
▶56년 미국 뉴욕으로 이주, 주식 투자에 본격 나섬
▶69년 1만달러로 사설 투자신탁회사인 퀀텀펀드 설립
▶79년 자선단체인 ‘열린 사회 재단(Open Society Fund)’ 설립
▶92년 영국 파운드화에 대한 투기로 10억달러 수입 챙김
▶97년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총리로부터 동남아 통화위기의 주범으로 지목받음
▶현재 퀀텀펀드 회장

 

<번역서>
▶『금융의 연금술』(국일증권연구소, 1995).
▶『소로스가 말하는 소로스』(국일증권연구소, 1996).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김영사, 1998).

 

<관련서>
▶『조지 소로스의 핫머니 전쟁』(동녘, 1995).
▶『소로스의 모의는 끝났는가』(지원미디어, 2000).

 

 

<용어해설>

 

▶헤지펀드(hedge fund) 〓개인모집 투자신탁. 개인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파트너십’ 을 결성한 뒤 카리브해의 버뮤다와 같은 조세 회피지역에 위장 거점을 설치해 자금을 운영한다. 도박성이 강한 파생금융상품을 개발해 투자하는 게 특징이다. 소로스의 퀀텀펀드가 대표적이다.

 

▶뮤추얼펀드(mutual fund) 〓투자자가 일정한 펀드에 투자해 주주로서 권리 행사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법률상 독립된 회사다. 투신사가 발매하면 투자자가 가입하는 방식의 수익증권과 달리 주주의 운영 참여가 자유롭고 개방적이다. 언제나 돈을 넣고 찾을 수 있는 ‘개방형’ 과 환불이 불가능한 ‘폐쇄형’ 두 종류가 있다. 국내에는 1999년에 도입됐다.

 

▶연기금(pension fund) 〓연금제도에 의해 모여진 자금으로 연금을 지급하는 원천이 되는 기금을 말한다. 국내의 국민연금기금․사학연금기금․공무원연금기금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파생금융상품(derivatives) 〓채권․금리․외환․주식 등의 금융자산을 기초로 파행된 상품. 전통적인 금융상품 자체를 대상으로 한 상품이 아니라 금융상품의 장래 가격변동을 예상해 만든 ‘금융상품의 가격 움직임’을 상품화한 것이다. 선물․선물환․옵션 등이 대표적이다.

 

 


[조지 소로스와 버핏 투자철학]

 

조지 소로스가 세계의 금융시장을 일거에 뒤흔들 수 있었던 요인은 크게 두가지다. 하나는 인터넷의 발달에 따른 전자거래 시스템의 활성화다. 이로 인해 지역적인 장벽이 해소됨으로써 막대한 시세차익을 동시다발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또 하나는 국제금융시장의 변화다.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생겨난 외환시장의 변화에 각국의 정책 당국자들이 효과적인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는 사이에 틈새를 공략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을 가능케 했던 정보통신산업(IT) 등의 퇴조에 따라 헤지 펀드의 위력도 점차 수그러들고 있는 추세다.

 

현대 자본시장에서 그와 비견되는 인물을 꼽는다면 20세기 최고의 증권투자자로 불리는 워런 버핏이다. 그는 소로스와는 상당히 다른 투자방식과 세계관을 갖고 있으면서 존경의 대상이 되는 인물이다. 미국 월가의 전설적 투자자 피터 린치조차도 버핏의 전화가 왔다고 하자 처음엔 농담으로 받아들이다가 “버핏이 (내게) 전화를 하다니!”하고 놀랐을 정도다. 헤지 펀드와 닷컴열풍에 잠시 잊혀졌던 버핏이 증시침체 속에서도 고수익을 내자 세계 언론과 투자자가 다시 주목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시장이 비합리적으로 움직일 때가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은 같다. 그러나 버핏은 “혹시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이 좋은 회사의 주가를 엄청나게 싼 가격에 팔려고 내놓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쪽이며, 소로스는 “금융시장이 방향을 제대로 잡아가고 있나”를 살피는 편이다. 버핏 역시 소로스처럼 헤지 펀드의 투자원칙인 재정거래(돈을 빌려 싼 곳에서 사서 비싼 곳에서 팔고 돈을 되갚아 위험부담 없이 수익을 챙기는 기법)를 종종 활용하긴 한다.

 

그러나 두 사람의 투자철학은 큰 차이가 있다. 소로스는 특정 국가의 정책기조를 비판하거나 자신의 투자방향을 공공연히 밝힘으로써 시장의 방향에 큰 영향력을 미친다. 바로 이 과정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거두어 왔다. 그의 투자대상이 외환에 집중되는 경우가 많아 이러한 투자방식은 때때로 특정 국가를 위기 상황까지 몰고 간다. 반면 버핏은 성급한 투자자들이 어디에 투자하느냐고 물을 경우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한다. 명성만 믿고 모르는 곳에 함부로 뛰어드는 투자자들의 생리를 알기 때문이다. 사실 버핏의 이런 태도는 모르는 곳엔 절대 투자하지 않는 그의 투자철학에서 비롯한다. 버핏의 투자방식과 그것이 용납되는 투명한 시장환경은 우리에게도 절실한 과제다. 이러한 시장환경은 소로스식의 투기적인 공격으로부터 우리 경제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버핏과 그의 스승 벤저민 그레이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경영자와 금융인의 상(像)에 대해서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 버핏은 합리적이고 솔직하며 업계의 관행에 도전하는 경영자가 있는가를 반드시 따져 왔다. 그레이엄은 1920년대 대공황으로 자신에게 돈을 맡긴 투자자가 손실을 보자 원금이 회복될 때까지 무보수로 일할 것임을 밝혔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최희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 경제학> :입력시간: 2001. 03.28. 19:22
 
 


[세계 지식인 지도] 반세계화 행동대 NGO

 

새로운 세기를 맞이해 비정부기구(NGO:Non-Governmental Organizations)의 반(反) 세계화 바람이 거세다.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에 대항해 시민권력을 표방하는 NGO들은 전지구적으로는 물론 국내에서도 이른바 ‘제5의 정부’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세계 곳곳에서 세계화를 반대하는 투쟁을 하고 있다.

 

나라마다 차이가 있으나 NGO가 사회적으로 주목되기 시작한 것은 서구의 경우 대략 1960년대 이후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컨슈머 인터내셔널(60년)․국제사면위원회(앰네스티, 61)․코먼 코즈(70)․그린피스(71)․진보통신연합(90)과 같은 소비자․인권․정치개혁․환경․정보통신 NGO들이 바로 이 시기에 결성됐으며, 이외에도 여성․교육․문화․언론․아동․지방자치 문제 등 모든 사회 이슈들을 다루는 크고 작은 NGO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해 왔다.

 

미국의 랠프 네이더는 이런 NGO를 대표하는 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다. 그는 65년 『어떤 속도에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책에서 제너럴 모터스(GM)에서 생산한 자동차인 코르베트의 안정성을 고발함으로써 미국 NGO의 대부로 떠올랐다. 이후 그는 소비자운동은 물론 콩그레스 워치(71) 를 설립하는 등 40여 개의 NGO를 주도해 왔으며, 지난 대선에서는 녹색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다시 한번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바 있다.

 

서구사회에서 이런 NGO의 등장은 무엇보다 전후 복지국가의 위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현재 두 시각이 존재한다. 우파에서 시장을 보완, 사회서비스를 제공할 수단으로 NGO를 고무해 왔다면 좌파에서는 NGO를 권력의 집중과 관료제의 심화에 대항, 시민사회를 재정치화하려는 시도로 이해해 왔다.

 

한편 제3세계 NGO의 역사는 상대적으로 짧다. 50~60년대 원조 프로그램이 본격화하면서 몇몇 NGO가 등장했지만 대체적으로 80년대 민주화 물결과 함께 시작된 정치적 개방 속에서 새로운 NGO들이 대거 결성됐다. 제3세계 NGO의 중요한 특징은 환경․여성․인권을 다루는 서구와 유사한 ‘전문적 NGO’와 다양한 이슈들을 망라하는 ‘종합적 NGO’가 공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의 경우 참여연대와 경실련으로 대표되는 종합적 NGO의 등장은 민주주의 공고화가 지연되고 정당정치의 발전이 여전히 더디다는 점에 기인한다.

 

현재 전지구적으로 NGO의 정확한 규모는 파악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국가마다 크고 작은 NGO가 수많이 존재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 규모를 정확히 추정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경우 99년 지부를 포함해 2만개가 넘는 NGO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으며, NGO보다 그 범위가 넓은 비영리조직(NPO:Non-Profit Organizations)의 경우 일본은 34만개, 미국은 1백14만개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국제 NGO의 경우 90년대 후반 현재 5천개가 넘는 단체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세계화가 NGO에 미친 영향은 두 가지다. 우선 정보통신의 세계화는 ‘글로벌 시민사회’를 태동하게 했으며, NGO의 다양한 국제 활동을 자극하고 촉진해 왔다. NGO의 고유 의제들인 환경․평화․여성․인권 등이 기존 국민국가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국적 이슈들이라는 점에서 세계화는 NGO의 전지구적 성장과 연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왔다.

 

이런 전지구적 연대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다국적 금융자본 규제를 위한 NGO의 활동이다. 구체적으로 ‘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연합(ATTAC)(http://www.attac.org),’ ‘주벌리 2000(http://www.jubilee2000.org)’ 등의 국제 NGO들은 투기자본을 규제하기 위한 정부간 연합 정책과 토빈세(투기성 단기자본이 국경을 넘을 때마다 부과하는 세금.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이 제안했다) 실시를 주장하며, 극빈국 외채탕감 운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프랑스의 베르나르 카상(시민지원을 위한 금융거래 과세연합 대표)과 이그나시오 라모네(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주필), 미셸 초스도프스키(캐나다 오타와대 교수), 필리핀 출신의 월든 벨로(남반부 포커스 집행위원장), 인도 출신의 자그디시 바그와티(미국 컬럼비아대 교수) 등은 이러한 NGO 활동을 주도하거나 지원하는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신자유주의의 세계화는 시장 논리에 의한 ‘시민사회의 식민화’를 가속화함으로써 NGO 활동의 주요 원천인 시민사회의 사회적 연대를 빠른 속도로 침식하고 있다.

 

현재 세계화가 낳고 있는 ‘20대80 사회’는 국민경제와 계급구조를 양분화하고 시민사회의 분절화를 증대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사회적․문화적 자원을 고갈시키고 있다. 현재 진행되는 세계화가 하나의 상수(常數)라면 NGO는 이 상수의 경로를 부단히 수정하고자 하는 변수(變數)이다. 국내적으로 참여민주주의를 확장하고, 전지구적으로 인간적인 세계화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모든 NGO들의 궁극적인 이상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화가 불가피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경로는 예정돼 있지 않다는 점이다. NGO들의 집합적 헌신을 우리가 얼마나 신뢰하고 동참하느냐에 따라 그 경로는 민주적이 될 수도, 야만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사회학) <kimhoki@yonsei.ac.kr>

 

 

▶박원순,『NGO-시민의 힘이 세상을 바꾼다』(예담, 1999).

▶함께하는 시민행동 엮음,『세상을 바꾸는 세계의 시민단체』(홍익미디어 CNC, 1999).

▶조효제 편역,『NGO의 시대』(창작과비평사, 2000).

▶김동춘 외 지음,『NGO란 무엇인가』(아르케, 2000).

▶주성수,『글로벌 가버넌스와 NGO』(아르케, 2000).

▶박상필,『NGO와 현대사회』(아르케, 2001).


입력시간: 2001. 04.10. 18:57
 

 

 

[NGO와 두가지 전략]

 

세계화에 대한 NGO의 대응은 두가지다. 하나는 국제연합(UN) 을 필두로 한 국제기구 및 각국 정부들과의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 정부에 전적으로 의존해 공공의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국가․시장․시민사회간의 상호작용과 협력을 통해 해결하려는 조정양식 또는 복합조직을 뜻함)를 모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화를 적극 반대하는, 이른바 반세계화 운동을 주도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최근 관심을 끄는 것은 시장 주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해 저항해 온 후자의 흐름이다. 세계화에 대한 NGO들의 직접 행동의 역사적 효시는 흔히 1997~98년 다자간투자협정(MAI) 반대운동과 ‘쥬빌리 2000’이 주도한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이 꼽힌다. 다자간투자협정 반대운동에선 세계 각국 NGO와 노동조합들이 대거 연대해 초국적기업에게 구매와 판매, 사업을 이전할 수 있는 무제한의 권리와 자유를 보장하려는 다자간투자협정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해 협상 중단을 이끌어 냈다. 또 ‘쥬빌리(Jubilee. 禧年)에는 너희들 가운데 가난한 자는 없을 지어다’라는 성경 구절에서 그 이름을 따온 ‘쥬빌리 2000’에서는 제3세계 외채탕감운동을 벌임으로써 중채무빈국 외채탕감계획을 채택하게 하는 등 나름의 성공을 거두었다. 이 두 운동 이후 세계무역기구(WTO)․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을 반대하는 반세계화 운동이 활성화되었으며, 1999년 시애틀과 2000년 워싱턴에서 대규모 반세계화 대중 시위가 일어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반대 시위에 참여했던 단체들에는 노동단체에서 인권단체, 여성단체, 환경단체, 평화단체, 소비자단체, 그리고 에이즈 인권활동가와 장애인 로비단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NGO들이 포함됐다. 시애틀 시위에서 미국노총산별회의(AFL-CIO)의 역할이 두드러졌다면, 워싱턴 시위는 미국에 기반을 둔 ‘50년이면 충분하다’(50년간 지속돼온 WTO 등 세계체제는 지겹다는 뜻)(http://www.50years.org) 네트워크와 이와 관련된 제3세계 NGO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지난 1월 말 스위스 다보스와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일어난 세계경제포럼 반대 시위를 들 수 있다. 대규모 시위와 각종 포럼을 통해 세계화가 갖는 야만성을 폭로하는 이런 반세계화 운동 연합에 물론 단일한 목소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온건한 흐름이 WTO․IMF․세계은행의 개혁론을 지지한다면, 급진적인 흐름은 해체론을 제시하는 등 개별 사안에 대한 작지 않은 이견들이 존재한다. 국내에서 반세계화 운동에 적극 관여하고 있는 단체와 네트워크로는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PICIS, picis@jinbo.net)’와 ‘인권과 평화를 위한 국제민주연대(KHIS) (http://www.khis.or.kr)’가 있다. 국제연대정책정보센터가 WTO와 투자협정에 대한 국내 반대운동을 주도하고 있다. 국제민주연대는 아시아의 인권과 다국적기업을 감시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 입력시간: 2001. 04.10. 18:53
 

 


[세계 지식인 지도] ‘거대과학’의 기수들

 

 20세기 물리학이 이룬 성과로 가장 눈부신 것 중 하나는 우주 만물의 구성 요소를 찾는 소립자 물리학이며 이 연구에 필요한 장치가 가속기다. 발명 초기 실험실 책상에 놓일 정도로 작았던 가속기는 현재 둘레 27㎞에 이르는 초대형으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20세기 후반에 나타난 과학 연구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소위 ‘거대과학(Big Scie nce)’ 연구가 보편화했다는 것이다. 과거 개인들에 의해 수행되던 연구가 수십․수백 명이 하나의 팀을 이루면서 거대한 조직․규모․설비가 필요한 국제 공동 연구로 발전하였다.

 

그 발전의 역사를 보자. 현대적 가속기의 원조는 1932년 미국의 어니스트 올랜드 로렌스(1901~58) 가 발명한 사이클로트론이다. 전력회사의 지원을 받은 로렌스는 31년 캘리포니아 버클리에 최초의 가속기 연구소를 차렸다. 로렌스 버클리 연구소(LBL) 의 전신이다. 그러나 사이클로트론보다 훨씬 높은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싱크로트론이 최초로 건설된 곳은 뉴욕 동쪽에 위치한 브룩헤이븐 연구소(BNL) 다. 47년 설립된 이 연구소는 컬럼비아 대학 이시도어 아이작 라비(1898~1988) 를 주축으로 10여명의 미국 학자들이 48년부터 33억 전자볼트(3.3 GeV) 급 양성자 가속기인 코스모트론을 건설해 소립자 물리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이후 60년 건설된 33 GeV급 AGS 가속기를 이용한 실험에서 무려 3개의 노벨상이 나왔다. LBL 역시 47년 이후 루이스 알바레스(1911~88) 의 주도하에 알바레스형 선형가속기와 베바락을 건설하였으며 이후 무려 9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태어났다. 60년대부터 이 연구소의 연구원을 지낸 김호길(1933~94) 박사는 80년대 귀국해 포항에 우리 나라 최초의 대형 연구시설인 포항방사광가속기를 건설하였다.

 


***비용.인력 엄청나게 들어

 

60년대 새로운 소립자들이 발견되면서 새로운 가속기와 연구소가 탄생하였다. 먼저 알바레스의 동료였던 볼프강 파노프스키는 62년 스탠퍼드 대학 구내에 스탠퍼드 선형가속기 연구소(SLAC) 를 세우고 66년 길이 3.2㎞인 세계 최대의 전자 선형가속기를 건설하였다. 한편 로렌스의 문하생인 로버트 윌슨(1914~2000)은 66년부터 시카고 근교에 200 GeV급 양성자 가속기 건설을 시작해 1972년부터 가동에 들어갔다. 이 연구소는 시카고 대학에서 핵분열 연구로 유명한 물리학자인 엔리코 페르미(1901~54)의 이름을 따서 현재의 페르미 국립연구소(FNAL)가 되었다. 그러나 페르미의 연구를 이어간 곳은 이웃에 위치한 알곤 국립연구소(ANL)로 제2차세계대전 당시 원자탄을 만든 맨해튼 프로젝트 중에서 재료 분야를 연구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90년대 7GeV급 방사광가속기인 APS를 건설하게 된다. 조양래 박사(ANL)가 이 건설의 책임자로 일했으며 그는 LBL 출신의 김호길 박사와 대학 동기생이다.

 


***핵융합장치 4대 강국 참여

 

미국에서 핵융합 분야는 매터혼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라이만 스피처(1914~97)의 지휘 아래 51년 프린스턴 대학에서 시작되었으며 나중에 프린스턴 플라즈마 물리 연구소(PPPL)로 발전됐다. 그는 수천만 도에 이르는 뜨거운 플라즈마를 가두는 장치로 8자형으로 꼬인 코일을 둥글게 배치한 스텔러레이터를 고안하였다.

 

유럽의 거대과학은 본질 면에서 미국과 다를 바 없지만 프로젝트 수행 면에서는 미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미국은 뚜렷한 리더를 중심으로 건설이 이루어진 반면 유럽은 대부분 국가간 공동연구 형태를 취했기 때문에 누가 앞장설 수 없는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유럽의 거대과학은 제2차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유럽의 부흥을 위해 52년 11개국이 모여 스위스와 프랑스의 국경지역에 설립한 유럽가속기연구소(CERN)에서 출발한다. 현재 회원국이 20개국으로 늘어난 CERN은 초기 미국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입장이었으나 유럽인다운 완벽주의로 빔 냉각 등 새로운 기술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에 힘입어 86년 카를로 루비아와 반 데 미르는 W입자를 발견한 공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한편 일본은 제2차세계대전 전에 유가와 히데키(1907~81)와 도모나가 신이치로(1906~79) 등 세계적인 이론물리학자를 배출한 바 있으나 패전과 함께 당시 보유하고 있던 사이클로트론이 미군에 의해 도쿄(東京) 만에 버려지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다. 그러나 70년대 경제 부흥에 성공한 일본은 국가 주도하에 쓰쿠바(筑波)라는 과학도시를 건설하였다. 이곳의 핵심은 고에너지연구소(KEK)로 니시카와가 중심이 되어 76년 12 GeV급 양성자 가속기를 완공하여 거대과학의 기반을 만들었다. 현재 스가와라 히로타카가 이끄는 KEK는 구미와 어깨를 견주는 수준에 도달하였다.

 

현재까지의 가속기는 국가 또는 지역 연합의 주도아래 건설할 수 있는 규모였으나 미래의 가속기는 지금까지의 규모를 훨씬 능가하는 것으로 세계적인 협력이 없으면 건설할 수 없다. 이는 핵융합도 마찬가지로 ITER라는 장치를 미국․유럽․일본․러시아가 공동으로 설계를 하고 있다.

 

 

***다목적.학제연구 보편화

 

거대과학 연구에서는 다목적, 학제간, 다분야간 연구가 보편화되었으며 과거의 과학 연구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중앙집권적인 과학 연구 관리 체계가 등장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엄청난 규모의 연구비가 들기 때문에 연구 행위 자체가 정치․경제적인 영향을 크게 받게 되었으며 실험장치에 대한 과학자들의 의존도도 증가하게 되었다. 영화 ‘콘택트’에서 천문학자로 분한 조디 포스터를 견우성까지 보낼 수 있는 거대한 수송장치를 전 세계가 분담하여 제작하는 장면은 앞으로의 거대과학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잘 예언해 주고 있다.

 

고인수 포항공대 교수.물리학 <isko@postech.ac.kr>

 

 

<용어설명>

 

▶입자가속기=전자․양성자 등 전기를 띈 입자를 광속에 가까운 고속으로 가속시키는 장치.

 

▶핵융합장치=바닷물 속에 풍부한 중수소 원자핵 2개를 헬륨 원자핵으로 변환시킬 때 나오는 막대한 에너지로 전기를 만드는 장치.

 

▶소립자물리학=우주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성요소와 이들간의 상호작용에 대해 연구하는 물리학의 분야.

 

▶AGS=1960년 미국 BNL에 건설된 싱크로트론으로 4극 전자석이 최초로 사용된 가속기.

 

▶베바락=미국 LBL에 건설된 싱크로트론으로 AGS와 쌍벽을 이룸.

 

▶W입자=세상을 움직이는 네개의 힘,즉 중력․전기력․약한 상호작용․강한 상호작용 중 약한 상호작용을 매개하는 입자.

 

▶플라즈마=초고온 하의 물질 상태로 원자가 전자와 원자핵으로 나뉘어짐.

 

▶ITER=국제 열핵융합로. 현재 설계 중으로 2010년 경 착공 예정.

 

 

◇ 4월 19일자 12면 ‘세계 지식인 지도’ 기사 중 ‘거대과학 연구 계보도’ 범례의 실선과 점선이 서로 바뀌어 바로잡습니다. : 입력시간: 2001. 04.18. 16:28
 
   

  
[세계 지식인 지도] 거대과학의 비판자들

 

1960년대 초 미국의 앨빈 와인버그(전 오크리지 국립연구소 소장)는 이미 관리자에 의해 좌우되며 과학 연구에 대한 사회적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소요되는 거대과학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거대과학은 국방과학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고 성장했기 때문에 와인버그의 이 경고는 과학의 군사화를 우려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최근 거대과학에 대한 연구는 20세기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광범위한 분석을 바탕으로 보다 심도 있게 진행되고 있다. 이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자들로는 피터 갤리슨(하버대)․대니얼 케블스(캘리포니아공대)․존 하일브론(버클리대)․로버트 자이들(미네소타대)․도미니크 페스트르(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소)․존 크리거(파리 과학기술사 연수센터) 등을 들 수 있다. 우선 갤리슨은 고에너지 물리학 실험을 비롯한 20세기 실험물리학 전반에 대해 논의하면서 거대과학의 다양한 속성을 다루었다. 페스트르와 크리거 등 유럽의 학자들은 CERN의 역사를 분석하면서 미국과 유럽의 거대 과학을 비교했다. 그들은 국방연구와 밀착된 미국의 거대과학 연구와 국제간 협동 연구를 중시했던 유럽의 연구를 비교하면서 유럽이 미국보다 완벽한 실험 장치를 갖추고 순수한 학문적 연구에 정진할 수 있게 된 근거를 제시했다.

 

국제 협력이란 일반적인 성격상 이 분야에 대한 연구는 초국가적 과학(Transnational Science), 탈식민주의 과학(Postcolonial Science)에 대한 연구와 병행해 진행되고 있다. 이런 연구 경향을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셰런 트래윅(마운트 홀리오크대) 을 들 수 있다. 그녀는 미국의 스탠퍼드 선형가속기 연구소(SLAC)와 일본의 국립 고에너지 연구소(KEK)에서 일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을 인류학적인 방법을 원용해 비교․분석했다. 그녀가 스승-제자 사이의 도제적 성격이 강한 일본의 연구 체계를 인류학적인 족내혼(族內婚)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았다는 것도 흥미롭다.

 

거대과학에 대한 비판적 연구는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과학 정책에 대한 비판과도 연결된다. 이 계열의 연구자로는 우선 루이스 피엔슨(사우스웨스턴 루이지애나대) 을 들 수 있다. 피엔슨은 독일이 제국주의 식민지 쟁탈 과정에서 외국의 경쟁자들을 문화적으로 압도하고 궁극적으로 정치적․경제적 이득을 얻기 위해 인도네시아․사모아․상하이(上海) 등지에 토착민들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정밀 과학 연구소를 설립해주는 등 과학을 대외정책의 수단으로 이용했다고 보고 이것을 문화적 제국주의라 불렀다.

 

서구식 거대과학기술을 무턱대고 따라가기보다 제3세계 나름대로의 독자적 발전을 위해 대안기술 연구를 강조하는 흐름에는 인도의 경제 개발 정책에 관여했으며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말로 ‘적정기술론’을 강조했던 에른스트 슈마허의 작업이 바탕이 되고 있다. 탈(脫) 식민주의 과학과 연관시켜 거대과학을 다룬 연구자로는 인도의 핵개발 및 거대미터파 전파망원경(Giant Metrewave Radio Telescope) 건립 계획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인도와 서방의 거대과학을 비교한 이티 아브라함(뉴욕 사회과학연구위원회)을 들 수 있다. 인도 학자들의 탈식민주의 과학 연구는 부분적으로 가야트리 차크라보르티 스피박(컬럼비아대), 호미 바바(시카고대) 등 인도 출신 인문학 연구자들의 작업과 간접적인 연결을 맺고 있다.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과학사> : 입력시간: 2001. 04.18. 16:29
 

 


 [세계 지식인 지도] 사이버시대의 혁명가 마르코스

 

“우리들은 지난 5백년간의 산물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EZLN, 1910~17년 멕시코 혁명의 영웅이었던 사파타의 정신을 이어받아 94년 1월 1일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에서 결성된 게릴라 단체)은 그들의 전쟁 선언문에서 이같이 밝혔다. 유럽의 근대가 탄생하는 16세기에 노예화와 굴종의 길을 걸어야 했고, 19세기에 독립을 해서도 ‘2등 시민’으로 갖은 수모를 견뎌야 했던 멕시코의 인디오(마야 원주민)는 1994년 새해 벽두,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 발효하는 그 날에 ‘정의, 자유, 민주주의’를 외치며 궐기했다. 이 게릴라군 한가운데,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면서 이 시대가 안고 있는 부조리를 고발하는 마르코스(Marcos) 부사령관이 도사리고 있다.

 

인터넷 전쟁(net war: 전통적인 무기 대신 인터넷을 통한 담론 투쟁)의 전도사, 이 시대의 유행인 ‘차이의 정치’를 강조하는 지식인, 권력에 대한 의지가 없는 게릴라. 혁명가가 아니라 ‘반항아(rebel)’로 자기를 규정하는 그는 비판적인 지성의 흐름이 형해화(形骸化)한 이 시대를 향해 외친다. 스키 마스크에다 당신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비춰보라고. 57년생으로 평범한 중류 가정에서 순탄하게 자란 그는 국립 멕시코 자치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명은 라파엘 세바스티안 기옌 비센테다. 80년에 ‘철학과 교육:담론적 실천과 이데올로기적 실천’이라는 제목의 학사 학위 논문을 썼다는 마르코스.

 

당시에 유행하던 루이 알튀세르, 니코스 풀란차스, 그리고 미셸 푸코에 심취한 적이 있는 그는 멕시코 시립자치대에서 강의를 하다가 제도권에는 탈출구가 없다는 고민 끝에 83년 치아파스의 열대우림 지대인 라칸돈에 있는 인디오 공동체 운동에 뛰어든다. 외채위기와 멕시코 제도혁명당의 부패에 환멸을 느껴 게릴라의 전위(前衛)가 되려고 뛰어들었지만, 그는 공동체의 삶 속에서 큰 변화를 겪는다. 농민을 지도하러 갔으나 오히려 그들로부터 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그는 곧 체 게바라도, 레닌도, 마오쩌둥(毛澤東) 도 버린다. 오로지 마야 인디오 공동체의 전통 속에서 멕시코와 신자유주의 체제를 비판할 기호와 문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공동체 민주주의’를 향한 인정투쟁(소수의 권익을 인정받고자 하는)은 개인적인 사색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런 공동체 생활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것이리라. 그런 점에서 서재의 사상가로서의 “마르코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사파티스타 운동이란 특정한 맥락 속에서 살아 숨쉬는 실천이며 사상일 뿐이다. 동료의 표현을 빌리면 개인 마르코스는 반란 개시일에 “죽은 채로 태어났던 것”이다.

 

반군(叛軍) 의 선언문에서부터 서한에 이르기까지 그는 끊임없이 쓰고 대화를 나눈다. 세계 언론과 인터넷에 올려진 그의 글들은 시적 운치와 철학도의 고뇌가 배어 있는 명문장이다. 신자유주의와 화석화한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도 준열하다. 인디오 문명의 생태주의 철학으로 야수적 자본주의의 흉칙한 모습을 고발하기도 한다. 담론이야말로 권력관계의 핵심이라 본 점에서 그의 담론 투쟁 방식은 ‘푸코적’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게릴라 전쟁을 치르는 그는 빌 게이츠를 닮기도 했다. 검은 색 스키 마스크를 당신네들(신자유주의자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이라고 선문답하는 마르코스. 도대체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첫째, 그는 통합을 통해 하나됨을 강조하는 ‘메스티소 민족주의’, 즉 인디오가 모성적 뿌리이면서도 막상 그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억압성을 비판한다. 멕시코의 노벨상 수상작가 옥타비오 파스가 정형화했던 ‘멕시코 민족성(mexicanidad)’ 논리는 종족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 통합 이념은 1천만 인디오들을 사실상 시민에서 배제시킨다. 사파티스타들은 허구적인 통합이 가져온 사실상의 배제를 온몸으로 거부하고, 자신들의 문명을 ‘존엄성을 지닌,’ ‘살아 있는’것으로 인정해 주길 바란다.

 

둘째, ‘차이’에 기초한 ‘다원주의’를 요구하는 인정투쟁은 오랫동안 인디오 해방신학과 해방철학을 강조해 왔다. 마르코스는 이러한 전통의 승계자로, ‘근대성의 타자’(근대성 담론의 주동자였던 유럽 사람들에게 제3세계는 늘 열등한 타자였다)로 끊임없이 수탈당한 인디오의 역사적 위상을 복원하려 한다. 나아가 이러한 인정투쟁의 논리는 여성과 같은 가부장제의 피해자들에게, 실업자와 빈민과 같은 신자유주의 피해자들에게 함께 권리 투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소수자들의 인정투쟁은 자연스레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 배제된 다수자들의 투쟁으로 전화(轉化)하게 된다.

 

셋째, 마르코스는 국가권력의 장악을 우선시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실천과 결별하고, 거점을 만들어서 중심권력을 공격하는 체 게바라류의 ‘포코(Foco)주의’도 버렸다. 사파티스타들은 권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르코스에 따르면 권력을 요구하는 정치적 좌파는 위로부터의 동원에 익숙하고, 결국은 제도화하고 화석화될 따름이다. 마르코스는 아래로부터 대중을 동원하는 반(反)국가주의적 실천과, 영원한 반란을 꿈꾸는 사회적 좌파로 남을 방법을 모색한다. 그는 결단코 ‘정치인’이 되길 거부하고 카뮈적인 ‘반항인’으로 남고자 한다.

 

마르코스와 사파티스타 운동은 신자유주의의 강풍이 휩쓸고 있는 이 시대에 반세계화 운동의 아이콘이 돼버렸다. 주세 사마라구․알랭 투렌과 같은 중량급 지식인들도 그를 극찬한다. 페미니스트들은 반군의 ‘여성법’을 보고 감동한다. 중남미의 지식인들은 그로부터 지난 5백년 근대화의 역사를 반추하는 기회를 얻었고, 신자유주의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은 파편화한 세력을 결집시키는 상징을 얻게 되었다. 정부와 협상하기 위해 비무장으로 멕시코 시티에 상경한 이들은 평화적 대행진을 마치고 다시 거점인 치아파스로 내려가 현재 인디오 보호입법과 관련 헌법 개정을 기다리고 있다. 해방신학이 죽었고, 종속이론이 사라졌고, 게바라가 관광상품으로 팔리는 이 시대에 그들은 실천으로 새 길을 열어가고 있다. 그러나 애초에 이들의 목표가 권력쟁취는 아니어서 대의제 민주주의 등의 모순을 타파할 효과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성형 중남미정치․정치학 박사 <fernandorhee@hotmail.com>

 

 


<말말말>

 

“나는 공산혁명가인 체 게바라가 아니다.” - 지난 3월 평화행진에 앞서 가진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투쟁 목적이 권력장악이 아니라 인디오의 빈곤타파라며 한 말.

 

“조용한 분노의 그림자, 우리의 길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쌀 것이다.”- 94년 3월 멕시코 민중과 전세계 언론에게 띄운 편지에서.

 

“멕시코가 자기 가면을 벗으면 부사령관(마르코스)도 가면을 벗을 것이다.” -1994년 1월 언론에 보낸 편지에서. 멕시코의 시민사회가 거짓 이미지의 길고도 게으른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며.

 

 

<번역서>

 

▶『사빠띠스따 : 신자유주의, 치아빠스 봉기, 그리고 사이버 스페이스』(해리 클리버 지음, 98년, 갈무리)

▶『분노의 그림자』(마르코스 지음, 99년, 삼인)

▶『마르코스와 안토니오 할아버지』(마르코스가 쓴 우화소설, 2001년, 다빈치)

 

입력시간: 2001. 04.24. 18:49
 
 

 

[중남미 원주민 저항운동]

 

“원주민들의 저항, 이것이 21세기 초반 중남미 사회 갈등의 핵으로 등장할 것이다.” 올해 초에 나온 미국 정보국(CIA) 의 동향 보고서의 분석 중 일부다. 멕시코 등 중남미 전역에 사는 인디오 인구는 약 3천만명을 웃돈다. 이 3천만 인구가 지역의 안정을 뒤흔드는 폭풍의 핵으로 부상한 것이다.

 

멕시코의 리오 그란데 강에서 칠레 최남단 티에라 델 푸에고에 이르기까지 인디오들은 잃어버린 그들의 땅과 종족적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5백년간의 침묵을 깨고 저항하고 있다. 16세기의 정복과 식민화 3백년, 독립 이후 공화국 질서 아래서의 머슴살이 2백년. 이 5백년간 피압박 종족이 겪은 설움을 기념하기 위해 이들은 1992년 (콜럼버스의) ‘발견 5백주년’을 ‘침입 5백주년’이라고 재명명했다. 이들은 빼앗긴 선조들의 땅과 존엄성을 되찾겠다고 다짐하고는 곳곳에서 정복자들의 동상을 끌어 내렸다.

 

80년대의 개방과 신자유주의 개혁에 따른 개발 붐으로 다시 한번 ‘정복’을 당하고 있는 원주민들은 ‘생존권’과 ‘자치’를 외치며 정부와 지방 호족, 경우에 따라서는 다국적기업에 맞서 실력행사를 한다. 브라질의 경우 열대우림을 대량으로 파괴하는, ‘유사이래 최대 규모의 종획운동(인클로저)’을 자행하는 목장주들에 맞서 인권운동가 치코 멘데스는 원주민의 권익을 옹호하며 이들을 조직하다가 결국 암살당했다. 하지만 국제사회에 아마존 지역의 원주민들이 겪는 참상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멕시코․과테말라․볼리비아․콜롬비아의 원주민들은 정부를 향해 ‘토지’와 ‘존엄성’을 요구하며 계속 대치 중이다. 발전소 건설과 벌목으로 생활공간이 축소되고 있는 칠레 마푸체 원주민들도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있다. 90년대에 들어와서 가장 폭발적인 운동 양상을 보이고 있는 에콰도르 원주민연맹(Conaie)은 마우드 전 정부의 신자유주의 개혁과 달러화 사용 정책에 반대한 동원과 시위로 결국 대통령을 하야시키기도 했다. 페루의 아야쿠초 원주민들은 ‘센데로 루미노스(Sendero Luminoso)’란 좌익 게릴라 운동체를 매개로 해 지역의 저발전과 빈곤에 대한 불만을 폭력과 테러로 표출하기도 했다. 중남미 대륙 전역이 각성된 원주민 운동으로 들끓고 있는 것이다. 마르코스와 치아파스 농민게릴라 운동은 바로 이러한 거대한 흐름의 한 지류이자, 이들의 요구사항과 갈망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는 요약본이라 하겠다.

 

이런 대항에 서구의 지성인들은 열광한다. 지난 3월 사파티스타의 멕시코 시티 입성에 함께했던 마르코스의 열성적 지지자 명단을 보자.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주세 사마라구(이상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 카를로스 몬시바이스(멕시코 문단의 거장)와 같은 문필가는 마르코스가 쏟아내는 언어와 담론의 황홀함과 그 힘에 감탄한다. 사미 나이르․알랭 투렌과 같은 비판적 프랑스 지성들은 그에게서 잃어버린 ‘68 세대’의 향수를 느끼고, ‘반세계화’의 상징으로 격상시키고자 한다. 할리우드의 촉수도 이를 외면하지 않는다. 거장 올리버 스톤과 로버트 레드퍼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할리우드 영화로 만들려고 계획 중인데, 이를 통해 소비 사회(미국)의 야만성을 고발하려 할 것이다. 빌리 더 키드․알 카포네와 같은 ‘깡패’ 외엔 인물이 드문 미국 문명은 항상 국경 너머 멕시코에서 자기 얼굴을 비춰보는 의적들을 찾았다. 1930년대 ‘비바 사파타’를 만든 엘리아 카잔이 그랬고, 10년대에 ‘멕시코의 로빈 후드’ 판초 비야를 현지촬영했던 할리우드의 뮤추얼 영화사가 그랬다.

 

이성형 : 입력시간: 2001. 04.24. 18:46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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