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시인의 모택동 기행(1) 詩人과 혁명- 陳毅와의 우정
새로운 자료, 현지 답사로 재구성한 天下大亂의 大治者, 그 深層의 인간상
●毛澤東에게 문학과 혁명, 詩와 문학을 통해 인간적 交感을 가졌던 戰友나 혁명동지는 陳毅말고는 흔치 않았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집에서 맺어준 定婚을 끝까지 거부했고 아버지와 싸우고 집을 나왔다. 억압과 착취엔 무조건적으로 반항하고 파괴하려는 욕구가 강했다
●造反有理는 毛澤東이 일과성으로 써먹기 위해 내건 전술적 차원의 표어라기보다는 그의 일생을 관통해 그를 지배한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 李 中 중국 연변과기대 부총장
李 中 중국 연변 과기대 부총장
1. 陳毅 추도회에 느닷없이 나타난 모택동
井岡山 혁명열사기념당
모택동 하면 이내 井岡山(정강산)이 떠오른다. 그리고 2만5000리 大長征(대장정)과 장정 도중의 遵義會議(준의회의)를 생각하게 된다. 대장정이 중공당의 운명을 역전시킨 결정적 모험이었다면 준의회의는 모택동의 운명을 새롭게 가동시킨 전환점이라 할 수 있다. 中共黨(중공당)과 모택동이 운명을 같이 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때부터이다. 정강산은 그러한 운명의 一致(일치)를 이루기 위해 꼭 있어야 했던 모택동 혁명의 前哨基地(전초기지)였다.
필자가 정강산을 찾은 것이 1998년 1월 15일 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밤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날씨는 왜 그리 추운지, 南方(남방)이라고 별 준비도 없이 길 떠난 것이 뼛속 깊이 후회되는, 그런 을씨년스런 奧地(오지)의 險山(험산)으로 정강산은 그 정체를 드러냈다. 겨우 찾은 한 겨울의 山莊(산장)에서 덜덜 떨며 하룻밤을 지샜다. 이튿날 아침, 이웃한 湘蘭酒家(상란주가)란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맨 먼저 찾아간 곳이 정강산 혁명열사기념당이었다.
전시관의 첫방 입구에 네 사람의 커다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毛澤東(모택동), 朱德(주덕), 彭德懷(팽덕회), 그리고 陳毅(진의)였다. 모택동은 넥타이 없는 中山服(중산복) 차림이었고, 세 사람은 군복과 군모를 쓴 모습이었다. 정강산에서 그들은 운명적으로 만났고 평생의 동지가 되자고 맹서했다. 그러나 그들이 抗日戰(항일전)과 國共內戰(국공내전)에서 승리하고 1949년 10월1일 공산중국 건국을 선포하고 나서부터 그들 각자의 人生歷程(인생역정)은 정강산 시절의 그 다짐으로부터 비껴가기 시작했다.
오늘의 정강산은 호남성의 寧岡(영강)과 강서성의 감주, 두 군데로 열리는 아스팔트 길이 뚫려 있어 멀고 험하기는 하여도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1927년 10월, 추수봉기에서 실패한 모택동이 1000여 명의 패잔병을 이끌고 처음 찾아가던 그때의 정강산은 울창한 숲의, 길도 없는 외지고 험악한, 늘 안개 비에 젖은 한낱 높은 산봉우리일 뿐이었다. 차평이란 이름의 한 작은 분지에 사령부를 두고 모택동, 주덕, 팽덕회, 진의 등이 국민당군의 악착 같은 포위 속에서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필자가 먼저 찾은 곳도 차평이란 곳인데, 오늘날 井岡山市라고 하면 바로 이 차평을 일컫는다.
장례식장에 잠옷 차림으로 나타난 毛澤東
1972년 1월6일, 깊은 밤 11시55분에 陳毅가 숨을 거두었다. 문화혁명의 와중에, 정강산 시절 이래의 모택동의 동지였던 72세의 노혁명가가 불운하게 숨졌다. 陳毅는 당시 천하를 주름잡던 江靑(강청) 등의 4인방 세력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다가 중병을 얻어 세상을 뜬 것이다. 結腸癌(결장암)이었다. 아직도 분위기는 살벌하였다. 병중엔 물론 죽은 후에도 아무나 마음대로 근접할 수 없었다. 겨우 周恩來(주은래), 宋慶齡(송경령), 葉劍英(엽검영) 등이 병원으로 찾아가 그의 遺體(유체)와 이별을 고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陳毅의 추도회는 주은래가 맡아 진행하고 엽검영이 추도사를 읽기로 되어 있었다. 엽검영이 추도사 원고를 써서 모택동에게 먼저 보냈다. 추도사 속에 엽검영은 「有功有過(유공유과)」라는 말을 썼는데, 이를 본 모택동이 「有過」를 지워버렸다.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자 의미 있는 변화였지만,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모택동의 참석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정치국 위원이나 老간부들의 참석조차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1월 10일 하오 3시, 팔보산 革命公墓(혁명공묘) 禮堂(예당)에서 거행된 陳毅의 추도식은 전혀 예기치 못했던 돌발사태로 말미암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모택동이 가죽 슬리퍼를 신고 실크로 된 잠옷 위에 코트만을 걸친 채 불쑥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날 中南海(중남해)에서 오후 1시에 잠을 깬 모택동이 느닷없이 경호원을 불러, 『차를 대기시켜라. 진의 동지의 추도회에 나가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날따라 날씨는 매우 춥고 사나웠다. 건강을 걱정한 의사와 경호원들이 말렸으나 오히려 모택동은 빨리 가자고 재촉하기만 했다. 연락을 받은 周恩來(주은래)는 北京에 있는 老혁명동지들과 정치위원, 후보위원들에게 모택동의 참석을 다급하게 알렸다. 주은래도 서둘렀고, 다른 옛 동지들도 급하게 진의 추도회장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모택동 일행이 다른 조문객보다 먼저 도착했다.
바로 몇 달 전인 1971년 9월13일에 문화혁명의 두 軸(축)의 하나였던 林彪(임표)가 謀叛(모반)을 꾀하다가 죽었다. 중국에서는 이 사건을 「9·13 사건」이라고 한다. 1965년에 시작된 10년 大動亂(대동란)의 열기는 좀체로 식지 않고 있었다. 모택동의 아내 江靑과 대립되는 모든 세력이 핍박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런 때에 모택동이 진의 추도회에 참석한 것은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劇的(극적)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주석님이 울고 있다』
팔보산 휴게실에서 모택동은 진의의 미망인 張서에게 다가가 손을 잡고 위로의 말을 전했다.
『진의 동지는 정말 훌륭한 동지였소』
모택동의 이 한마디는, 진의가 살아서가 아니라 죽어서 復權(복권)된 것임을 천하에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그동안 살아서도 죽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던 진의는 모택동의 이 한마디로 말미암아 죽어서 다시 생명을 얻게 된 것이었다.
모택동은 진의의 네 딸과도 일일이 악수하며 『더욱 노력 분투하게나. 진의 동지는 중국혁명과 세계혁명을 위하여 크게 공헌하였네. 그 공로는 길이 남을 것이네』라며 격려했다. 이어 모택동은 중국인의 장례 儀典(의전)대로, 붉은 깃발에 덮인 진의의 骨灰(골회) 앞에 머리 숙여 세 번 절했다. 이때쯤에 주은래, 주덕, 엽검영 등이 도착했다. 진의의 미망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이때 누군가가, 『주석님이 울고 있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 그 순간 진의의 옛 동지들이 한꺼번에 嗚咽(오열)을 쏟아냈고 통곡 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이 자리에서 모택동은 그동안 역경에 처해 있던 老간부들이 반가워할, 뜻 있는 말과 행동을 보여줌으로써 이날 이 자리의 역사적 의미를 깊게 했다. 모택동은 때마침 問喪(문상) 온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공을 만나 인사말을 나누었다. 그는 시아누크에게, 자기 자신이 그동안 내몰았던 혁명 1세대, 즉 옛 동지들과 和解(화해)하고 그들을 復權(복권)해 줄 뜻을 내비쳤다. 그리고 자기의 옛 전우의 한 사람이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외몽고에서 비행기 추락사고로 죽었다는 사실을 전하고, 『그 혁명 동지는 林彪였소. 그는 나를 정말로 반대한 인물이오. 그러나 진의는 진정 나를 지지한 동지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모택동의 그 유명한 『鄧小平(등소평)의 矛盾(모순)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라는 말도 바로 이 자리에서 나왔다. 모택동은 진의 미망인에게 유소기와 鄧小平에 대해 언급하면서 두 사람을 분명하게 구별해서 말했다. 유소기의 「모순」은, 「敵對的(적대적)인 모순」이며, 따라서 유소기는 「인민의 敵(적)」이 되지만, 등소평의 「모순」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며, 등소평은 「인민의 隊伍(대오)에서 뒤처진 것」이라고 말했다. 「인민의 적」은 이미 강을 건너 가버린, 구제할 수 없는 존재이지만, 「대오에서 뒤처진 일꾼」은 再교육, 再훈련시켜 다시 쓸 수 있다는 뜻이었다.
走資派(주자파)의 두 거물로 지목되어 홍위병으로부터 갖은 박해를 다 받았던 두 사람 중 유소기는 이미 1969년에 저 세상으로 가버렸다. 죽은 유소기는 「적대적 모순」 관계로 이론적으로도 구제의 범위를 벗어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제 살아남은 주자파의 거목은 등소평이었다. 그런데 모택동은 등소평에 대해서만은 「인민 내부의 모순」이라고 밝혀 그의 구제를 내비쳤다. 이미 모택동은 등소평의 再등용을 마음속 깊이 구상하면서 그 절차와 효과와 반응을 은밀히 점검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3년의 등소평 복권으로 이어지는 信號音(신호음)이 진의 추도회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나온 것이었다. 장례가 끝난 얼마 뒤, 진의의 고향 후배인 등소평은 1969년 이래 流配(유배)살이를 하던 南昌(남창)市 교외의 외딴 집에서, 진의 추도회와 관련된 몇 가지 새로운 정황을 총리 주은래로부터 전달받는다. 등소평을 동생처럼 아끼며, 모택동 이후의 후계자로까지 생각하며 등소평을 보살펴 주던 주은래로서는 모택동의 이 반가운 「모순론」 소식을 즉각 등소평에게 알려 주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편으로 주은래는 이와 같은 모택동의 숨은 뜻이 널리 소문이 나도록 애를 썼다.
사실 임표가 죽고 얼마 뒤, 등소평은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내 자기의 속마음을 전달해 놓고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자신의 과오와 미래의 희망을 진솔하게 표현하였다. 아직도 자기는 건강하며 일을 시키면 열심히 일할 수 있다고 했다. 주은래가 중간에서 두 사람 사이를 새롭게 이어주려고 무척 노력하고 있었다. 주은래는 등소평뿐만 아니라 많은 혁명 동지들의 復權도 은밀하게 추진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의 회오리에 휘말려 거세되었던 老간부들이 하나 둘씩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에 대한 모택동의 回示(회시)가 공포되면서 회시의 효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추도회서 돌아온 뒤 며칠간 심하게 앓다
모택동이 느닷없이 진의의 추도회에 나타난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왜, 어떻게 해서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어느 기록에도 명쾌한 해석이나 분석이 없다. 극적인 묘사만 있을 뿐, 모택동의 돌연한 起動(기동)과 진의 추도회를 연결시켜주는 그 어떤 端緖(단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문화혁명 기간 중에 죽은 혁명동지가 진의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정강산의 네 영수들만 해도 그중 세 사람 모두가 모택동에 앞서 세상을 떴다. 불우하게, 비참하게, 그리고 쓸쓸하게.
그러나 모택동 역시 진의의 죽음을 고비로 病勢(병세)가 악화되어 마지막까지 회복세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듬해 등소평의 再등용을 눈앞에 둔 어느 날, 주은래는 등소평에게 그 무렵의 모택동의 사정을 다음과 같이 들려 주었다.
『요 몇해 전에 主席(주석)의 건강 상태는 줄곧 좋지 않았소. 「9·13 사건」 후 주석께서는 한 번 重患(중환)을 겪었었는데 병이 낫기 전에 진의 동지가 또 사망하게 되어 병세가 더 중해졌소. 진의 동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비통하여 가슴이 칼로 에이는 듯 아프다고 말씀하시더니 그만 몸져 눕고 말았소』
주은래는 이어 진의 추도회 참석 전후의 얘기도 해 주었다.
『1972년 1월10일 중앙에서 진의 동지를 위해 추도회를 마련했을 때였소. 중병으로 병석에 누워 계시던 주석께서는 누구의 만류도 듣지 않고 추도회에 참석하셨댔소. 그날은 큰 눈이 퍼붓는, 매우 춥고 사나운 날씨였소. 추도회에서 돌아오신 주석께서는 몹시 辛熱(신열)이 나더니 꼬박 며칠간 혼수상태로 누워 계셨소』
2. 詩人 모택동과 武人 팽덕회
毛澤東이 진의에게 보낸 편지
모택동과 진의는 다 같이 詩人(시인)이었다.
詩人으로서의 모택동과 진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잠시 그들의 詩 한 편씩을 맛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중양절(重 陽)
인생은 쉬이 늙어도 하늘은 늙을 줄 몰라
해마다 중양절은 돌아오네
오늘 또 중양절이라
전쟁터의 국화꽃 유난히 향기롭구나
해마다 가을이면 바람은 세차
봄빛과는 다르다네
오히려 봄빛보다 더 좋아
가없는 만리강천에 서릿발이 섰구나
人生易老天難老 / 歲歲重陽 / 今又重陽, / 戰地黃花分外香 // 一年一度秋風勁, / 不似春光/ 勝似春光 / 寥廓江天萬里霜.(모택동)>
이 詩를 썼던 1929년, 모택동은 정강산에 있었다. 중국 하남인민출판사에서 펴낸 「井岡山風雲錄(정강산풍운록)」을 보면, 그때 모택동은 오랫동안 병중에 있었으며, 말라리아를 앓았던 것 같다. 모택동은 7월부터 10월까지 꼼짝 못하고 산중에서 앓고 있었는데, 10월 들어 差度(차도)를 보이면서 아내 賀子珍(하자진)의 부축을 받고 천천히 가을의 들판 길을 산책했다. 그해 음력 9월9일은 양력으로 10월11일이었다. 산과 골짜기마다 단풍으로 물들었고, 노랗게 핀 국화들을 보며 지난날을 생각하기도 했다. 눈앞의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아픔도 잊고 詩 한 수를 지으니 「중양」이었다.
모택동의 몸이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간에 정강산은 언제나 싸움터였다. 그래서 「전쟁터의 국화꽃 유난히 향기롭구나」라는, 常在戰場(상재전장)의 비정함과 아름다운 자연을 조화시킨 詩 구절이 나온 것같다. 고래로 중국 국화의 주된 품종은 노란 국화였으며, 「여씨춘추」에도 「음력 9월에는 노란 국화가 핀다」고 적혀 있다. 중양절에는 많은 중국 사람들이 즐겨 노란 가을 국화를 감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모택동의 이 詩를 읽으면서 또다른 想念(상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중양절에, 죽은 날짜를 모르는 귀신의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다. 필자의 형님은 1950년 한겨울, 중공군이 참전한 직후 평안북도 초산에서 戰死(전사)했다. 죽은 날짜와 장소를 모른다. 1926년생인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이 전쟁에서 모택동의 큰아들 毛岸英(모안영)도 미군기의 폭격에 맞아 전사했다. 모안영은 1922년생이다. 두 사람은 對敵(대적)하는 처지에 있었지만 서로 알지도 못했고 아무런 怨恨(원한)도 없었다. 다만 두 사람은 미래의 희망과 꿈을 접고 새파란 20代의 나이로 한반도의 北端(북단)에서 戰死者로 삶을 종결지었을 뿐이다.
중양절이 되면 필자는 남모르는 감상에 젖는다. 전투에 寧日(영일)이 없는 정강산에서 병을 앓으며 중양절의 노란 국화를 바라보던 그날의 모택동도 필경은 그 어떤 感傷(감상)에 젖었을 것이다. 혹시 그 감상 속에, 먼 훗날 사랑하는 아들의 죽음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 陰影(음영)으로 깃들어 있지는 않았을까.
「가없는 만리강천에 서릿발이 섰구나」 했으니, 차디찬 서릿발이 그의 가슴 중심께로 그때부터 흘러내리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서릿발은, 사랑하는 아들을 포함하여 여섯 명의 一家가 혁명전선에서 희생된 것과, 그밖의 자기가 겪어야 했던 수많은 風霜(풍상)들일지도 모른다. 특히 「人生易老天難老」란 詩句(시구)는 모택동의 詩 중에서도 絶句(절구)의 하나로 사람들의 입에 널리 膾炙(회자)된다.
1959년 9월에 팽덕회가 거세되었고, 대약진운동의 폐해가 전국을 휩쓸고 있었다. 나라에는 天災(천재)가 들고 밖으로는 소련과의 이념투쟁이 심화되면서 모택동의 심기가 극도로 불편할 때였다. 밤중에라도 모택동을 깨워 보고를 할 수 있고, 모택동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사람으로 당시에는 팽덕회, 진의, 임표 등이 거론될 정도로 진의의 성품은 꾸밈이 없고 솔직 담백하고 또 호방 대담하였다. 그런 성격의 진의로서는 당시의 逆風(역풍)에 맞서 나가면서 푸른 솔의 기개와 고결한 숨결을 더욱 그리워했을 것이다.
진의가 죽고 2년 뒤인 1974년 11월29일에 정강산 네 영수 중의 한 사람인 팽덕회가 세상을 등졌다. 팽덕회가 세상을 등졌다기보다는 세상이 그를 버렸다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오늘의 중국은 팽덕회의 죽음을 그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 세상이란, 바로 천하대란인 문화대혁명 시절이 된다. 문화대혁명의 가장 으뜸의 자리, 핵심의 자리에 모택동이 있었다. 모택동이 모질게 그를 내쳤고, 그는 가슴에 恨(한)을 품은 채 76세로 이승을 떴다.
팽덕회의 직선적 성격
모택동이 팽덕회를 밀쳐낸 것은 문화대혁명 이전인 1959년의 일이다. 유명한 廬山(여산)회의에서 모택동과 팽덕회는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만다. 1950년의 한국전쟁 때, 중공지원군 사령관으로 참전, 1953년 休戰(휴전)협정에도 조인했던 팽덕회는 매우 용맹하고 직선적인 장군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모택동은 팽덕회를 蜀(촉) 나라 劉備(유비)의 선봉장군인 張飛(장비)에다가 곧잘 비유했으며 그렇게 대놓고 부르기도 했다.
팽덕회가 얼마나 담대하고 직선적인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1956년 9월, 중공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을 때, 세계 여러 나라의 공산당, 노동당 대표들이 참석하여 대회를 축하해주었다. 소련에서는 미코얀 外相(외상)이 대표단장으로 왔는데, 미코얀에게 가장 인상적인 사람이 팽덕회였다고 한다. 體軀(체구)도 우람한 데다가 말하는 품이 또 엄하고 걸걸하여 미코얀이 혼이 났던 것이다.
미코얀 앞에 팽덕회가 불쑥 나타나더니 대놓고 질문을 던졌다.
『미코얀 동지! 당신들은 왜 스탈린 동지가 살아 계실 때엔 천재라느니 영명하다느니 만세를 부르며 치켜세우다가 막상 逝去(서거)한 뒤엔 잘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다고 욕사발을 안기고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스탈린 동지의 오류가 그리도 엄중했었다면 왜 그의 생전에 의견을 제기하지 않고 죽은 다음에야 지난 일들을 들추어 이러쿵저러쿵하는 겁니까?』
대답하기 거북한 말을 직설적으로 퍼부어댔다.
『그때야 누구나 의견을 말씀드릴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었지요』
『그래, 그것이 당과 인민, 그리고 인민의 수령에게 책임지는 태도입니까?』
『그때엔 의견만 내놓으면 제꺽 모가지부터 날아갈 판이었는데요』
팽덕회가 오른손을 휙 하니 휘두르며 내뱉듯이 미코얀에게 쏘아댔다.
『죽는 걸 두려워하고서야 그게 무슨 공산당원이란 말입니까?』
私信이 부른 禍
그로부터 3년 뒤 팽덕회는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는 편지를 모택동에게 보낸다. 私信(사신)이라고 생각하고 보낸 편지가 禍根(화근)이 되었다. 모택동이 정면으로 문제 삼고 나왔던 것이다. 1959년 이전부터, 국방부장 팽덕회는 모택동의 정책에 회의를 갖고 있었다. 특히 軍事路線(군사노선)에 있어서 그는 평소부터 모택동과 정면으로 맞서고 있었다. 모택동 사상으로 비행기가 뜨는 것은 아니며, 現代戰(현대전)은 정치 싸움이 아니라 기술 싸움이라고 주장했다. 무기와 장비의 현대화와 전략의 현대화를 들고 나선 팽덕회의 주장은 당시 유소기, 주은래, 등소평 등으로부터 默示的(묵시적)인 비호와 지지를 받고 있었지만 모택동의 대응은 생각 밖으로 엄중했다.
1959년 8월의 廬山(여산)회의에서 모택동은 팽덕회의 편지 내용을 문제삼아 강하게 팽덕회를 질책하며 反黨(반당) 행위로 규정하고 나섰다.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결하는 데 있어서도 모택동은 평소 기술과 과학보다 사상을 앞세웠으며 人的(인적) 요소를 더 중시하고 있었다. 8월 16일의 마무리 회의에서 모택동은, 이번의 투쟁은 계급투쟁이며, 사회주의 국가 건설 후 10년간 계속된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간의 생사를 건 투쟁이라고 종결지었다. 팽덕회는 하루아침에 「팽덕회를 위수로 하는 反黨 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9월17일 국방부장 직에서 해임되고, 26일엔 군사위원 자리마저 내놓는다.
세상에 팽덕회의 「의견서」로 알려진 편지는 편지 그 자체만 가지고서는 모택동이 왜 그렇게 과민하게 반응했는지 쉽게 터득이 되지 않는 구석이 있다.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비판
「이번 여산회의는 중요합니다. 제가 서북小組(소조)에서 몇 번 발언하였으나 소조에서 다 말하지 못한 의견이 조금 있어 특별히 주석 동지께 참고로 써 올립니다. 저같이 단순한 사람은 張飛와 비슷하여 데면데면하고 꼼꼼하지 못합니다. 參考(참고) 가치가 있는지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 타당치 못한 점이 있으면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로 시작되는 편지는, 그 내용만은 대약진운동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고 신랄하다.
전체의 흐름은 모택동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대약진운동의 건설적인 개혁을 요청하는 형식이지만, 특히 농업생산의 실패와 대약진운동의 조급성과 誇張(과장) 보고에 대해 구체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있다.
<1958년도 기본건설은 지금에 와서 볼 때, 일부 대상들은 너무 조급하게, 너무 지나치게 책정되어서 자금들이 분산되었고, 따라서 꼭 건설되어야 할 분야들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가지 결함입니다. 그 기본 원인은, 경험이 부족하고 이에 대한 體得(체득)이 깊지 못하고, 너무 늦게 인식한 데 있습니다.
우리가 경제건설에서 나타난 문제를 처리함에 있어서는 어쨌든 金門(금문)을 포격하거나 티베트 반란을 평정하는 것과 같이 정치문제를 처리하는 것처럼 그렇게 능숙하게 처리하지는 못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객관적 형세를 볼 때, 우리나라가 가난하고(일부 사람들은 아직 배불리 먹지 못하며 작년엔 평균 1인당 목천 18자밖에 돌아가지 않아 홑옷 한 벌과 팬티 두 개밖에 만들 수 없었다) 낙후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현상태를 개변시킬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석께서 제시하신 『적게 심고 수확고를 높이며 다수확을 따내자』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자』는 등의 구호는 모두 전략적인 방침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였고, 당면한 구체적 실정을 파악하는 데 주의를 돌리지 못하였으며, 온당하고 신뢰성 있는 기초 위에서 사업을 배치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떤 指標(지표)는 층층이 높이고 층층이 덧붙여, 본래는 몇해, 또는 10 몇 년 걸려야 달성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을 1년 혹은 몇 달 안에 실현시킬 지표를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신랄하다면 매우 신랄하다. 구체적이라면 이 이상 구체적일 수도 없다. 용감하다면 팽덕회를 따를 사람이 없다는 말이 결코 빈 말이 아님을 실감케 해준다. 국방부장과 군사위의 부주석은 실로 막강한 자리이다. 군부의 實勢(실세)인 그 자리에서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편지」를 통하여 直諫(직간)을 한 셈이다. 팽덕회로서는 은밀한 직간이었겠지만, 받아들이는 모택동으로서는 이 편지를 통하여 그 어떤 不吉(불길)의 端緖(단서)라도 붙잡았던 것일까, 민감하고도 냉혹한 대응이 팽덕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팽덕회의 不運
팽덕회로서는 어느 정도 각오했던 결과였는지는 몰라도 미처 예기치 못했던 不運(불운)이었다. 시기가 좋지 않았고, 모택동에게 전체 국면을 내세워 그를 내칠 수 있는 명분을 주는 상황이었던 것이 그의 불행을 더욱 촉발시켰던 것 같다. 당시 소련과 중국 사이에 오간 미묘한 기류가 팽덕회의 불운을 재촉했고, 그의 굽히지 않는 성격이 이러한 결과를 부채질하였다. 7월17일 팽덕회가 「편지」를 보낸 바로 그날, 소련 수상 흐루시초프가 폴란드에서 중국의 인민공사와 대약진운동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였다.
7월20일 외교부 부부장 張聞天(장문천)이 팽덕회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자 이튿날 소련과 폴란드는 보도 매체를 통해 중국을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나섰다. 미국의 언론들이 이런 소식을 대대적으로 전하고 논평을 가했다. 모택동의 정치비서인 李銳(이예)마저 팽덕회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7월23일엔 미국의 부통령 닉슨이 소련을 방문하였다. 중국으로서는 미국이 소련과 손잡고 중국에 대한 포위와 봉쇄를 본격화하려는 조짐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모택동은 이러한 國內外(국내외) 사정과 관련시켜 팽덕회 문제를 한 칼에 해결하려고 했다. 모택동에게 있어 팽덕회의 반발은 모택동 자신의 위신에 대한 도전이었고, 공산당 지도체제의 합법성과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이었고, 당의 단결과 응집력을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소련의 스탈린 格下(격하)운동에 크게 자극받고 있던 모택동에게 있어 팽덕회의 直諫(직간)은 자칫 一波萬波(일파만파)의 시발이 될 수도 있는 걱정스런 사건이었다. 적어도 그런 방향으로 팽덕회를 몰아붙였다.
8월1일은 중국의 建軍節(건군절)이다. 아침 10시에 모택동은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소집하고 사회까지 맡는다. 모택동이 팽덕회에게 말한다.
『나와 동지와의 관계를 보면 뜻이 맞은 적이 세 번이고 뜻이 맞지 않은 적이 일곱 번이며, 서로 어울린 면이 30%이고 수가 틀린 면이 70%요. 지난 31년 동안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팽덕회가 머리를 가로저으며 말한다.
『저와 주석의 관계는 절반 절반입니다』
『아니, 3대 7이지요』
『5대 5입니다』
해리슨 솔즈베리가 쓴 「大長征(대장정:The Long March)」이란 책에는 문화대혁명 때 숙청당한 모택동의 측근 인사들 가운데 「洛甫(낙보)」란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洛甫는 팽덕회를 지지했던 張聞天(장문천)의 또다른 이름이다. 낙보는 연안 시절, 중공 중앙 선전부장을 지냈고 1949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1951년 駐(주)소련 대사를 역임하고 1954년부터 외교부 제1부부장을 맡고 있었다.
1959년 팽덕회를 지지했다가 숙청된 그는, 솔즈베리의 취재에 의하면 팽덕회 지지 한 달 뒤 곧바로 외교부 부부장의 자리에서 밀려나 공장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鄧小平大辭典(등소평대사전)」의 「유관 인물편」을 보면, 낙보는 1960년 중국과학원 경제연구소의 特約(특약)연구원이 되어 사회주의 경제건설 이론의 연구에 종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낙보가 공장으로 곧바로 보내졌던 사실과 중국과학원의 연구원이 된 것은 조금 맞지 않는다. 그러나 솔즈베리의 取材源(취재원)이 낙보의 부인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둘 다 정확한 사실인 것 같다. 문화혁명이 일어나자 곧바로 그와 그의 아내는 「투쟁」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의 스파이로 몰려 억지 자백을 강요당했고, 임표의 명령으로 그들 내외는 광동성으로 유배되었다. 고혈압과 심장병이 악화되어 갔으나 北京에서의 치료는 물론 고향인 상해로 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대신 강소성의 無錫(무석)市로 보내져 거기서 병사했다. 1976년 7월1일이니 장정세대였던 그의 나이도 일흔여섯이었다.
모택동과 팽덕회의 관계는, 모택동과 오늘의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가야 할 대목이다. 1959년 8월의 여산회의 결과, 팽덕회는 끝없는 나락으로 빠져 들었지만, 이것은 한 개인의 불운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라, 그후의 중국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중요한 고비가 되었다. 百花齊放(백화제방) 이후엔 지식인을 포함한 非黨員(비당원) 인민들이 침묵하기 시작했고, 여산회의 이후엔 공산당 黨員(당원)들마저 침묵이 시작되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당시의 중국은 경색되어 갔다. 사회 전반의 침묵이란 결코 예사로운 징조는 아니다. 중국의 경우 10년간의 대동란이라 할 문화대혁명이 그 무거운 침묵 속에서 서서히 胚胎(배태)되고 있었던 것이다.
묘한 시기에 통과된 묘한 제안
1956년 2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의 個人崇拜(개인숭배) 사상을 맹공격하였다. 소식을 들은 모택동의 심기는 매우 불편하였으나, 중공은 여러모로 충격과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해 9월에 열린 중공 제8차 전국대표대회는 등소평이 제안한, 모택동과 관련된 당 규약의 일부를 改正(개정)했다. 이 개정안은 물론 모택동을 포함한 유소기, 주은래, 주덕, 陳雲(진운) 등 主席團(주석단)의 同意(동의)를 거쳐 통과되었다. 당 규약에 명시되어 있었던, 『모택동 사상을 당의 최고 방침으로 한다』는 구절과 『모택동 사상을 학습하는 것은 당원의 의무다』라는 두 조항이 삭제되었다. 이날 등소평이 읽은 보고서의 요지는 대충 다음과 같다.
『집단지도체제가 얼마나 중요하고 개인숭배 반대투쟁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분명하게 입증되었다. 이 闡明(천명)은 소련뿐만 아니라 全세계 각국 공산당 국가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끼쳤으므로 우리의 임무는 개인 돌출을 반대하고 개인에 대한 讚美(찬미)를 반대해야만 할 것이다. 당 영도자에 대한 숭배는 본질상 당의 이익, 인민의 이익에 대한 애호에서 표현되는 것이지 개인에 대한 神格化(신격화)로써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모택동을 당장 權座(권좌)에서 끌어내리고 굳이 그를 매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는 아니었을 것이다. 스탈린 死後(사후)의 非情(비정)한 사태를 보고 중공 수뇌들이 중국에서만은 이러한 일이 일어나서는 안되겠다는 衷情(충정)에서 미리 예방조치를 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당하는 모택동에게는 뼈아픈 一擊(일격)이 아닐 수 없었고, 참으로 묘한 시기에 묘한 제안이 통과된 셈이었다. 모택동으로서는 내심 참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대세와 분위기가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2월에 주덕과 함께 소련 공산당 대회에 다녀온 등소평은 모택동에게, 혁명을 계속하려면 지식인들을 많이 끌어들여야 한다고 건의했다. 모택동이 이내 찬성을 하고 나섰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폭동은 지식인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떠들게 해주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말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백화제방」 「百家爭鳴(백가쟁명)」이란 구호를 내세워 이른바 「鳴放(명방)운동」이 일어난 것은 등소평의 건의가 있고 두 달 뒤인 1956년 4월이었다. 백화제방은 예술 분야의 발전을 위한 것이고, 백가쟁명은 사회과학 분야의 발전을 위한 일종의 지식 개방운동이었다. 9월의 제8차 중공당 대표대회가 끝나자 모택동은 이 「명방운동」에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듬해 2월27일에 열린 최고국무회의 제11차 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더 앞질러 가는 발언과 제안을 해서 주변을 놀라게 했다.
모택동은 이 자리에서 『모든 영역에서 백 가지의 꽃들을 피게 해서 백 가지의 사상과 學派(학파)들이 서로 겨루게 하라! …. 인민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학생들이 街頭示威(가두시위)를 할 자유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명방운동은 1957년 6~7월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모택동의 다음과 같은 말은 지식인들을 현혹시키고 들뜨게 하기에 충분했다.
『알고 있는 것은 말하라. 남김없이 다 말하라. 말하는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 듣는 사람에게 교훈을 줄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이 명방운동은 9월에 들어서면서 중공당의 새로운 整風(정풍)운동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오늘에 와서 이 명방운동과 정풍운동이 이어지는 과정은, 모택동의 노련한 陰謀的(음모적) 차원의 공작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명방운동이 진행되면서 지식인들의 「자유발언」 분위기가 한껏 고양되어 체제를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각계 각층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른바 「毒草(독초)」와 「毒蛇(독사)」로 불리며 숙청되었다. 공개석상에서 한 하찮은 말도 右傾(우경)이다, 反蘇(반소)다 해서 수난을 당했는데, 그 숫자가 어림잡아 80만명에 이르고, 그 가족과 관련자들까지 합치면 수백만 명이 기간 중에 고통을 당했다.
이 反右派(반우파) 투쟁에서 주된 역할을 했던 등소평은 나중엔 이 사건이 지나치게 확대되고 왜곡되어 가는 것에 당황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시작 단계와 마무리 단계에서 등소평이 했던 말을 들어보자.
『독초에게 문호를 개방한다는 것은 대중을 교육시키기 위한 것이며, 제거한 뒤에 비료로 쓰기 위함이며, 아울러 투쟁 속에서 대중과 프롤레타리아를 단련시키기 위해서이다.
1957년 反右派 투쟁 때 나는 그 투쟁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확대시킨 책임은 나한테 있는 것이다』
국방부장직에서 해임되면서 팽덕회는 중국의 고위 지도자들이 사는 중남해로부터 北京 서부 교외의 한 정원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는 육체 노동을 했다. 주로 복숭아 나무를 재배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정강산, 대장정, 항일전, 국공전과 한국전에서 용맹을 떨치던 老장군은 『내 인생에서 군인이었을 때처럼 안정을 누린 적은 없었다. 이제 와서 복숭아 나무를 가꾸는 일 외엔 내 末年(말년)에 할 일이 없구나』 하고 탄식했다. 그러나 그의 불운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1965년 9월 그는 후방의 국방관계 건설위원회의 제3副主任(부주임)이라는 하위직을 맡아 四川省(사천성)으로 보내졌다. 주덕, 등소평, 진의의 고향이기도 한 그곳은 중국 서남쪽의 奧地(오지)로 「蜀道難(촉도난)」의 변방이었다. 팽덕회는 사천으로 내려가기 직전 모택동을 만난 것으로 되어 있다.
팽덕회와 나눈 詩
옛날의 功(공)을 인정받으며, 조금은 다정한 분위기에서 팽덕회는 모택동의 곁을 떠나 서남으로 향했지만, 1년 뒤 불어닥친 문화대혁명은 그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재앙으로 작용하였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그는 審問者(심문자)들의 손에 넘겨져 모진 拷問(고문)을 받아야 했다. 끝까지 反혁명의 누명을 거부했고, 자살도 거부한 팽덕회였지만, 죽을 때까지 130번의 심문을 받았고, 허파에 구멍이 뚫리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거리에서 거리로 끌려다녔다고 전해진다. 1974년 11월29일, 운명했을 때 그의 나이는 76세였다.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리자 그는 바로 복권된다. 1978년의 일이다.
모택동과 팽덕회는 이렇게 갈라졌다. 惡運(악운)으로 헤어진 그들 사이이지만, 1935년 10월에 모택동은 팽덕회에게 六言詩(육언시) 한 수를 보내며 그의 뛰어난 戰果(전과)에 대해 감사와 칭송의 뜻을 표한 적이 있었다. 장개석軍의 전면 포위와 공격을 이리 피하며 저리 따돌리며 대장정을 감행하던 시절, 모택동과 팽덕회가 지휘하는 부대가 섬서성의 오기진이란 지역에서 추격해 오는 국민당軍을 격파하는 戰果를 올렸다. 그때 모택동은 휘하부대에게 작전 지시 電文(전문)을 보냈는데, 이 전보 문안에 「높은 산, 머나먼 길, 깊은 골짜기」라는 말을 썼다. 모택동은 바로 이 전문 중의 한 구절을 따서 詩를 지었다.
<팽덕회 동지에게:
높은 산, 머나먼 길, 깊은 골짜기
대군은 종횡무진으로 내달리누나
그 누가 말 타고 칼 비껴 들었는고?
우리의 둘도 없는 팽덕회 장군이어라!
山高路遠坑深 / 大軍縱橫馳奔 / 誰敢橫刀立馬? / 唯我彭大將軍!>
이 詩를 받고 팽덕회는, 詩의 마지막 구절을 「우리의 영용한 홍군뿐이어라!」로 고쳐서 모택동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 詩는 내용 그대로 팽덕회 장군의 勝戰(승전)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뜻을 담고 있다.
필요에 따라 팽덕회에게 詩를 써 보냈듯이 모택동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詩를 보내어 우정과 애정, 신뢰와 기대를 전달하곤 했다.
3. 모택동과 陳毅 문학의 문학사적 의미
毛澤東이 받아들인 天道와 人道
중국에서 나오는 文學史(문학사)들을 보면 모택동과 진의가 거론되는 경우가 많다. 두 사람은 비록 전업 작가는 아니지만 문학사적으로 의미를 부여받고 있다. 이들말고도 혁명 1세대들로서는 董必武(동필무), 葉劍英(엽검영)과 朱德(주덕) 등이 詩를 썼는데, 그중 동필무는 300여 편의 詩가 담긴 「동필무 詩選(시선)」을 발간하기도 했다.
모택동 문학에 대해서는 많은 논평과 註釋(주석)이 나와 있다. 모택동은 중국 고대 詩詞(시사)의 형식을 운용하되, 舊體詩(구체시)는 『사상을 속박하고 배우기도 힘들다』고 하며 스스로 멀리 하였다고 한다. 그는 현실주의 바탕 위에서 詩를 쓰면서도 『혁명적 현실주의와 혁명적 낭만주의가 상호 결합된 창작 방법』을 내세웠다.
그의 詩는 幻想(환상)과 聯想(연상), 神話(신화)와 전설, 혁명적 현실과 중국 역사에 대한 典故(전고) 등이 한데 어울려, 그의 글씨만큼이나 분방하고, 脫俗(탈속)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평을 듣는다.
모택동은 長沙(장사) 제1사범 시절, 스승 楊昌濟(양창제)를 많이 따랐다. 양창제는 독일의 파울젠(Friedrich Paulsen)이 쓴 「倫理學原理(윤리학원리:A System of Ethics (1899)」의 중국어판을 가지고 윤리학 강의를 하였는데, 이에 감명받은 모택동은 이 책을 읽은 독후감과 논평을 겸하여 「윤리학원리 批語(논평):1917~1918년」이라는 1만1000여 字의 글을 썼다. 교재로 사용되었던 중국어 번역본은 北京대 총장인 蔡元培(채원배)가 번역하여 1913년에 上海(상해)에서 출판된 책이다.
모택동은 「윤리학원리」 원저에서 「저항이 없으면 동력이 없고, 장애가 없으면 행복도 없다」는 저자 파울젠의 말을 『지극한 진리이자 徹言(철언)』이라고 논평하고『대세력에 대한 大抵抗(대저항)의 필요는 보통 사람에 대한 보통의 저항과 같은 것이다. 이를테면 콜럼버스와 아메리카 신대륙의 관계, 禹(우) 임금과 홍수와의 관계, 유럽 각국이 떼지어 일어나 파리를 포위한 것과 나폴레옹의 戰勝(전승)의 관계 등과 같은 것이다』고 말했다.
이 논평을 썼을 때의 모택동은 25~26세의 나이이다. 젊은 시절 모택동이 받아들였던 철학이라는 개념은 우주와 인생 전반에 대한 관점과 견해이며, 그것은 바로 「天道(천도:철학)와 人道(인도:윤리학)였다. 그가 파악하는 우주는 변화와 相對性(상대성), 이중성과 다양성이며, 이와 함께 활동과 투쟁의 주체가 되는 自我(자아)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이를테면 陰(음)과 陽(양), 정과 반, 큰 것과 작은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이것과 저것, 나와 남, 좋고 나쁨, 깨끗함과 더러움, 아름다움과 못생김, 밝음과 어두움, 이기는 것과 지는 것 등은 모두 다 이러하다. 우리의 각종 정신생활은 이러한 差別相(차별상)에 의해 구성되며, 이러한 차별상이 없다면 역사 생활을 구성할 수 없을 것이다. 進化(진화)란 차별 변동의 상황이다. 차별이 있은 후에야 언어가 있고 思惟(사유)가 있는 것이지 차별이 없다면 이러한 것도 있을 수 없다」(윤리학원리 논평)
「治世(치세)와 亂世(난세)가 번갈아 거듭되고, 전쟁과 평화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태고적부터 치세와 난세는 번갈아 거듭되었다. 우리가 항상 난세를 혐오하고 치세를 바라는 것은, 난세 역시 역사 생활의 한 과정이며, 스스로 실제생활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를 들추어 볼 때, 전국시대, 劉邦(유방)과 項羽(항우)의 항쟁시대, 漢武帝(한무제)와 흉노의 전쟁시대, 三國(삼국)의 경쟁시대가 급변하고 인재가 수없이 배출되어 아주 즐겁게 읽을 수 있다」(윤리학원리 논평)
타고난 반항아
난세의 가치를 일찍부터 터득했던 모택동이었다. 그의 일생을 더듬어 보면, 모택동의 독서 범위와 독서에 대한 그의 반응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造反有理(조반유리)」란 말이 있다. 무릇 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는 뜻이다. 모택동이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과 학생들을 부추기기 위해서 내건 슬로건으로 알려져 있는데, 모택동과 문화대혁명을 비판할 때 자주 인용된다. 모택동이 권력 투쟁 과정에서 政敵(정적)들을 묘하게 때려잡기 위해, 젊은이의 반항을 합리화시켜 주는 이 말을 써서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 「造反有理」는 문혁 기간 중에 많이 유행되었으며, 1960년대 후반 세계적으로 퍼져나갔던 학생운동의 슬로건으로 자주 들먹여졌다. 문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몇 달 전에 모택동은 이런 말을 해서 주목을 끌었다.
『중앙 기관이 좋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면, 우리들은 지방이 造反(조반)해서 중앙으로 進攻(진공)하도록 호소해야 한다. 각지에서는 많은 孫悟空(손오공)을 보내서 天宮(천궁)을 소란하게 해야 한다』
천궁은 당시 유소기, 등소평 등이 실권파로 있던 당 중앙을 말한다. 여기서 모택동이 기대하는 「西遊記(서유기)」 속의 손오공은 전국의 중학, 대학에서 튀어나와 전국을 휩쓸었던 홍위병일 것이다.
그런데 이 「造反有理」는 모택동의 성격과 개성, 그의 인생 자체를 너무나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다. 모택동은 어릴 때부터 타고 난 反抗兒(반항아)였다. 집에서 억지로 맺어준 定婚(정혼)을 끝까지 거부했고, 그를 집에 붙잡아 두려는 아버지와 몇 차례 겨룬 끝에 기어코 집을 나왔다. 억압과 착취에는 무조건적으로 반항하고, 그것들을 파괴하려는 욕구와 의지가 누구보다 강했다.
그에게 있어 「造反有理」적인 사상이나 감정은 그의 소년시절부터 문화대혁명을 이끌던 晩年(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을 지탱해온 끈질긴 生命力(생명력) 같은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造反有理」는 모택동이 一過性(일과성)으로 써먹기 위해 내건 전술적 차원의 標語(표어)라기보다는 그의 일생을 관통하여 그를 지배했던 하나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또 모택동에게는 舊秩序(구질서)와 舊世界(구세계)에 대한 「破壞(파괴)의 욕구」가 남달리 강했다. 그는 孔子(공자)로부터 중국의 新文化(신문화)에 이르기까지 비판과 否定(부정)을 서슴지 않았으며, 왕왕 그가 거느리고 이끌어 온 당과 정부의 각종 권위마저도 파괴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낡은 것을 파괴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세울 수 없다(不破不立)』, 『파괴를 첫머리에 두면 건설도 그 중간에 존재하게 된다』, 또 『천하대란이 천하 대치에 이르게 한다(天下大亂 天下大治)』는 등 그는 언제나 파괴의 가치를 優先(우선)으로 쳤다. 문화대혁명 구상의 밑바닥에는 이와 같은 모택동의 「파괴의 철학」이 자리잡고 있다.
大亂 통해 大治 이루려 하다
모택동의 이와 같은 성격과 행태는 혁명이나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작용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승리를 담보해 주었다. 그러나 국가를 통치하고 관리하는 데 있어서 그의 이러한 성격은 많은 逸脫(일탈)과 혼란을 가져왔다. 특히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그의 파괴욕구와 반항기질은 혼란과 탈선을 가중시켰다. 大亂(대란)을 통해 大治(대치)를 이루려 했던 원래의 그의 意圖(의도)는 크게 빗나가고 말았다.
그러나 모택동은 때때로 그의 이러한 기질과 개성을 자제하고 억제하는 데에도 매우 능숙한 면을 보여 주었다. 어지러운 정치 국면을 수습해야 하거나, 국가 安危(안위)와 결부된 국제관계나 외교문제를 풀어 나갈 때, 그의 이러한 자제력과 임기응변적인 전술의 驅使(구사)가 돋보였다. 건국 前後(전후)나, 문화대혁명의 수습과 미국과의 修交(수교)를 복합적으로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그의 이러한 숙달된 收拾(수습) 능력이 잘 나타났다.
모택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 중에, 1925년도에 지은 「沁園春 長沙(심원춘 장사)」와 11년 뒤인 1936년에 지은 「심원춘 雪(설)」이라는 작품이 있다. 각각 가을과 겨울을 노래한 이 두 편의 작품은 많은 면에서 서로 맞대응하는 성격을 보여주는데, 모택동의 詩 중에서 「심원춘」은 특별히 중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고 인용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원춘 장사
차디찬 가을날 나 홀로 섰노라
상강이 북으로 흘러가는
귤자섬 끝머리에
바라보니 천산만악이 단풍빛이네
나무 숲도 층층이 붉게 물들고
강물은 짙푸르기만 하고
배들이 바투어 흐르는구나
매는 장공을 헤가르고
물고기는 물 속을 날거니
만물은 가을날 자유를 다투누나
아 광대무변하여라
묻노니 이 창망한 대지 위
인간의 운명을 주재하는 자 그 누구이던가
벗들과 더불어 예서 노닐던 시절
생각하면 벅찬 나날이었어라
나이 어린 글벗들
풍채와 재질 한창 피어나고
서생의 의기
줄기차게 떨칠 때라
기울어진 세상 꾸짖고
가슴 울리는 글 써내며
세도꾼들 뭐같이 업신여겼었지
기억하는가
저 강심에 뛰어들어 헤엄칠 때
물결이 매를 막던 그 정경을>
<심원춘 설
북국의 풍광
천리에 얼음 덮이고
만리에 눈 날리네
바라보니 장성 안팎은
망망한 은세계여라
도도히 흐르던 황하도
별안간 그 기세를 잃었구나
산은 춤추는 은배암이런가
고원은 줄달음치는 흰 코끼리런가
저마다 하늘과 높이를 겨루네
날이 개이면
붉은 단장 소복 차림
유난히 아리따우리
강산이 이렇게 아름답기에
수많은 영웅들 다투어 허리 굽혔더라
가석하게도 진시황, 한무제는
문재 좀 모자랐고
당태종, 송태조는
시재 좀 무디었느니
하느님의 자랑찬 아들
칭기즈칸도
독수리 쏘는 활재주밖에 없었더라
모두가 흘러가버린 일
정녕 영걸을 찾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
현장 체험을 文學작품化
「심원춘 장사」에서 많이 인용되는 것이 「아, 광대무변하여라/묻노니 이 창망한 대지 위/인간의 모든 운명 주재하는 자 그 누구이던가」라는 구절이다. 고향 땅 상강의 귤자주 섬 끝머리에 모택동은 늦가을의 찬 바람을 받으며 홀로 서 있다. 장사 제1사범 시절의 친구들과 나라의 운명을 개탄하고 착취자와 세도꾼들을 매도하며 이상에 불타던 지난날을 되살리고 있다. 이 광대무변한 우주 속에 그 주재자는 과연 누구일까…. 詩作(시작)의 시기로 보아 그가 장사 지방과 광동을 오갈 무렵인 것 같다. 30代 초반의 작품이다.
「심원춘 설」은 「아, 광대무변하여라/ 묻노니 이 창망한 대지 위/ 인간의 모든 운명 주재하는 자 그 누구이던가」에 「모두가 흘러가버린 일/ 정녕 영걸을 찾으려거든/ 오늘을 보아야 하리」로 화답하고 있다. 이 시는 1932년 2월 홍군 제1방면군이 陝北(섬북)으로부터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섬서성 서쪽으로 진출하려 할 때 지은 것이다. 이 詩에 대해서는 모택동 자신의 自註(자주)가 있다. 이 작품은 「봉건주의를 반대하고 2000년에 걸친 봉건주의의 반동적인 한 측면을 비판한 것」이라고 했다.
진의는 주은래, 등소평 등과 함께 1920년대의 프랑스 유학파에 속한다. 주은래는 두 살 위의 선배였고, 건국 후에는 주은래의 外相(외상) 자리를 진의가 이어 받기도 했다. 등소평과는 고향이 같다. 四川省(사천성) 출신으로 진의는 세 살 아래인 등소평을 무척 아꼈으며, 中南海에 살 때에는 이웃하여 한 집처럼 지냈다. 그는 1920년대에 프랑스 문학 작품을 많이 번역하였으며, 詩와 소설도 많이 썼었다. 1925년 이래 혁명군에 나서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에서 손을 뗐으나 틈틈이, 그리고 건국 후에는 많은 시를 썼다. 1977년 北京의 인민문학출판사에서 펴낸 「陳毅詩詞選集(진의시사선집)」에는 150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
대체로 그의 詩는 그 자신이 혁명 전쟁을 통해 체험한 고난과 전투를 詩化(시화)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오후가 되자, 굶주린 창자에서 북소리가 났다/양식이 바닥난 지 벌써 석 달째/주머니 속 쌀 알갱이는 겨우 몇알/풀뿌리를 끓인 죽」
1936년에 그는 감남지역의 五岺(오령) 일대에서 유격전을 지휘했다. 그때 그가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꼈던 것을 현장감 넘치게 詩로 쓴 것이 바로 이 「감南遊擊詞(감남유격사)」이다. 그는 호방하고 直情的(직정적)이면서 낙천적이고 순정적이었다. 또한 그는 소나무와 눈보라의 고결함과 純白性(순백성)을 사랑하면서, 낭만적 환상이나 신기함 같은 것을 될수록 기피하였다. 따라서 그의 언어는 자신의 솔직함과 현장 위주에 알맞게 실제적이며 명징하였다.
「인민들의 지원, 영원히 잊지 못하리/그들은 친부모로 거듭나고/나는 투쟁의 착한 아들이니/혁명은 강하고 강하도다」
「미얀마의 친구에게(贈緬旬友人)」라는 그의 詩도 간결하고 직정적이다.
<나는 강 머리에 살고/그대는 강 꼬리에 산다네/서로의 정이 끝이 없으니/함께 이 강물을 마신 탓이리>
詩와 글을 통해 모택동과 가장 밀접하게 교류한 사람이 진의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異意(이의)를 달지 않는다. 모택동이 진의의 추도회에 참석한 사실과, 그것도 아무런 豫告(예고)도 없이,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고 갑자기 참석했던 사실을 놓고 필자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가 과연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만 있을 수 있는 共通因數(공통인수), 두 사람을 이어주는 그 어떤 신비로운 끄나풀 같은 것이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문학과 혁명을 통한 交感
쉽게 떠오르는 것이 문학과 혁명이었다. 혁명을 통하여 生死(생사)를 같이한 동지들은 많았겠지만, 詩와 문학을 통해 깊은 인간적 交感(교감)을 가졌던 戰友(전우)나 혁명동지는 그리 흔치 않았을 것이다. 동필무, 주덕, 엽검영 등도 나름으로 시를 썼고, 武人(무인)은 아니지만 혁명동지로서의 郭沫若(곽말약)도 모택동과 詩로써 마음을 나누기도 했던 사이다. 아무튼 모택동이 눈보라치는 매운 날씨를 무릅쓰고 아픈 몸을 이끌고 예고도 없이 진의의 추도회에 나타났다는 것만은 엄연한 사실이다.
굳이 그 秘義(비의)를 알려 할 필요가 없겠다. 단지 詩를 좋아 하는 것과 실제로 詩를 써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것을 그들 두 사람은 체험을 통하여 알고 있었고, 그들은 또 그렇게 詩를 쓰면서 전쟁과 혁명 속에서 살았었다는 것만을 인정하면 될 것 같다. 이러한 모택동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다. 중국의 고전과 옛 詩人에 대한 그의 애정과 해박한 지식이다.
모택동이 詩를 썼다는 사실은 아직은 한국의 독자들에겐 낯선 이야기인 것 같다. 굳이 그를 미화하거나 전설적 인물로 再구성하기 위해 끌어대는 말이 아니다. 오늘날 중국의 대학생이나 지식인들에게 애송하는 詩를 물어보면 아직도 모택동의 詩를 대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詩와 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이 그만큼 좁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모택동의 詩가 중국인의 정서에 영향을 끼친 부분도 만만치 않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중국의 西歐化(서구화)나 세계화를 성급하게 기대하거나 眺望(조망)하는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타진해 볼 분야가 있다. 바로 모택동과 중국인의 정서적 밀착이다.
중국의 詩人 중에서 李白(이백)과 杜甫(두보)를 꼽을 때, 한국 사람들의 정서는 아무래도 두보 쪽이다. 어릴 때부터 「杜詩彦解(두시언해)」를 배워 왔고, 두보 詩에 배어 있는 눈물과 恨(한) 같은 것이 한국인의 심성에 쉽게 와 닿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모택동은 두보보다 이백을 높이 평가한다.
모택동의 杜甫草堂 방문
그 이유가 두보의 詩는 『눈물이 많고』 『政治詩(정치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백에게는 道士(도사)의 풍이 있는데, 두보는 小地主(소지주)의 입장에 서 있다고 평했다. 곽말약도 그의 저서 「이백과 두보」에서 비슷한 말을 하고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이 방면에 대한 어떤 교감이 있었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모택동은 두보의 詩도 무척 좋아했다. 1958년 3월에 모택동은 사천성의 成都(성도)에 있는 杜甫草堂(두보초당)을 찾는다. 성도에서 회의가 있었는데, 기간 중에 짬을 내어 초당을 둘러 보았던 것이다. 성도의 두보초당은 국내외 귀빈들이 많이 들르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두보는 나이 50을 바라보는 唐(당) 乾元(건원) 2년인 759년에 모든 정치적 야망을 접고 초야에 묻히는데 그곳이 바로 성도 서쪽 교외의 완화계 근처의 두보초당이다.
성도의 친구들이 특별히 두보를 위해 만들어준 이곳에서 두보는 8~9년 가까이 살았다. 사천 지방이 으레 그렇듯이 이곳 두보초당에도 芭蕉(파초)가 무성하고 대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한 詩人을 위해 지은 초당이라기에는 너무 넓고 곳곳에 대나무숲이 울창하였다. 초당 입구엔 자료전시실이 마련되어 있는데, 모택동을 비롯해 등소평, 북한의 金日成 등 국내외 지도급 인사들이 다녀갔던 흔적이 사진으로 정리되어 있다.
성도를 방문했을 때, 모택동은 초당에서 여러 가지 板本(판본)의 두보시집 12부 108책을 빌어다가 서너 번 이상씩 읽어보았다고 한다. 또한 모택동은 두보의 많은 詩들을 암송하고 있었다. 1964년 호남에서 장사로 돌아가면서 열차가 岳陽(악양) 부근을 지나자 모택동은 수행원들에게 붓을 달라고 하여 두보의 詩 「악양루에 올라(登岳陽樓)」를 쓰기도 했다.
<동정호를 귀에 익히 들어 왔지만/ 오늘에야 비로소 악양루에 오르네……친구는 편지 한 장 없고/ 병든 늙은이 곁엔 외로운 쪽배만 떴네 (昔聞洞庭水, 今上岳陽樓… 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
모택동이 붓으로 쓴 이 글씨는 현판으로 새겨져서 악양루 3층 누각에 걸렸다. 또한 모택동은 두보의 장시 「北征(북정)」을 좋아했다. 앞에 인용한, 진의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모택동은 두보의 「북정」을 예로 들어 詩를 논한 바 있다.
모택동의 글씨도 유명하다. 모택동의 서예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는데, 대체로 풍격이 특이하고 독특하다는 것이 정평이다. 용이 날고 봉황이 춤추는 듯하다는 말도 있는데 스스로 하나의 書體(서체)를 이루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이러한 모택동의 서체와 두보의 詩가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다. 즉 모택동의 서예가 두보의 詩를 통해 계발된 면이 있다는 것이다.
1938년 연안에서 모택동은 주변 사람들과 서예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두보의 詩 하나를 인용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두보는 그의 詩 「공손 할머니의 제자가 칼춤을 추는 것을 보고(觀公孫大 弟子舞劍器行)」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오나라 사람 장욱은 草書(초서)에 능했는데, 업형에서 공손 할머니가 서하검으로 칼춤을 추는 것을 자주 보면서 초서를 익혀 아주 잘 쓰게 되었다. 그의 초서 글씨에는 호탕함과 감동이 배어 있다…」고 했다. 정말 지당한 말이 아니겠는가?』
두보는 이 詩의 서문에서, 무용 예술과 서예 예술이 서로 통한다는 이야기를 한 것인데, 모택동이 이에 동의하면서 「지당한 말」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모택동은 두보의 詩에 정통하며 또 두보의 詩를 암송하기까지 하면서도 이백과 비교하여 낮은 평가를 한 이유가 무엇일까? 눈물이 많고 정치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두보의 詩를 폄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다음과 같은 까닭으로 모택동이 두보보다 이백을 더 치켜 세웠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 모택동은 그의 성격과 기질이 호방하고 낭만적이다. 그리고 속박과 압제를 거부하며, 투쟁적이며 반항적이다. 인생에 대해 매우 적극적이며 낙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모택동이 이백과 두보를 비교할 때, 기질과 개성이 자기와 비슷한 이백을 더 選好(선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일 것이다.
둘째로, 모택동이 의도적으로 이백을 선전하고 두보를 눌러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리라는 짐작이다. 두보의 詩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註釋(주석)을 달았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이백의 詩에 주석을 단 사람들은 퍽 드물었다. 다같은 大시인이면서 주석에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에 대하여 모택동의 심기가 불편했으리라는 것이다.
셋째로 모택동의 두보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두보의 詩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모택동은 계속 두보의 詩를 읽었으며, 그가 줄을 긋거나 동그라미 표시를 하며 주의깊게 읽었던 시만도 67편이나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두보에 대한 모택동의 이해와 평가는 조금은 恣意的(자의적)이며 독특하다 할 것이다. 모택동의 평 자체가 연구의 대상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毛가 李白을 좋아한 이유
모택동은 唐(당)나라 詩人 중에서 특별히 이백과 李賀(이하), 李商隱(이상은), 즉 「三李(삼이)」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이백의 詩를 으뜸으로 쳤다. 그는 이백의 성격과 인생 역정에 대해 많은 共感(공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모택동은 무엇보다도 이백의 호방한 예술적 기질과, 脫俗(탈속)과 반항의 인생관에 공감하고 있다. 이백은 그의 詩를 통하여 王侯(왕후)를 비웃고, 세속을 멸시하고, 현실에 대한 불만과 인생에 대한 꾸짖음 등을 강하게 표출하고 있다. 모택동이 이백을 가리켜, 도사의 기세가 있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백의 詩에 나오는, 권위에 대한 부정,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기백과 반항 기질을 모택동은 높이 평가했다. 이백은 「廬山謠寄盧侍御虛舟(여산요기노시어허주)」란 詩에서 「초나라 광인인 나는/공자도 웃음거리로 여긴다(我本楚狂人, 風歌笑孔丘)」고 하면서, 성인 공자마저 이름을 대며 오만하게 비웃었다. 또 「夢遊天로吟留別(몽유천로음류별)」란 詩에서는 「권세와 부귀에 굽실거리고 아부하는 것을 보노라면/내 마음이 괴로워진다(安能♥眉折腰事權貴, 使我不得開心顔)」고 시류에 아부하지 않는 곧은 심지를 표현하기도 했다.
이백의 詩 중에서 모택동이 특별히 좋아했던 것은 「蜀道難(촉도난)」이었다. 필자는 1998년 여름에 사천성의 중심지인 성도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山城(산성) 도시 중경, 해발 3077m의 峨眉山(아미산)과 大佛(대불) 유적으로 유명한 樂山(낙산) 등지를 돌아보고 촉도의 험준한 기세를 실제로 맛보았던 적이 있다. 「삼국지 연의」에 나오는 劉備(유비)의 땅이 오늘의 사천성 일대이다. 사방으로 길이 험하고 산세가 드세어 사람들은 촉나라로 가는 길은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힘들다고들 했으며, 그곳 巴蜀(파촉)의 땅을 하늘과 가장 가까운 「天府(천부)」라 했다.
사천을 파촉의 땅이라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파·촉이라는 작은 두 나라가 있었다. 파나라는 동부의 중경 지방, 촉나라는 중서부의 성도 지방이었다. 이 두 나라는 이웃해 있으면서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북방의 강국인 秦(진)나라가 이 틈새를 노려 군대를 보내 두 나라를 평정해 버렸다.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한낱 변방이었던 이 지역은 이때부터 中華圈(중화권)으로 편입되었다.
북방의 이주민들이 원주민을 대신하여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했다. 공산 중국의 창업 공신들인 주덕, 진의와 모택동 시대에 이어 중국의 새 지평을 연 등소평 등의 고향이 이곳 사천성이며 이주민의 후손이라 할 수 있다.
모택동과 朱德의 축원
이백은 장안에서 사천으로 가면서 촉도의 험준한 산천경개를 노래했는데, 과장된 修辭(수사)와 걷잡을 수 없는 감정 표현이 일품이다. 이백은, 詩의 序頭(서두)와 결말, 그리고 중간에 세 번씩이나 똑같은 감탄을 토했다.
「蜀道之難難于上靑天(촉으로 가는 길 험난하여라 하늘 오르기보다 더 힘겨워)」.
그는 또 촉도의 험난함을 「까치도 날아 넘지 못하고/ 원숭이도 따라 오르지 못한다」, 「한 사람만 막아 서면 만 사람도 건널 엄두를 못낸다」고 표현했는데, 모택동은 이러한 이백의 「촉도난」을 아주 높이 평가하였다.
모택동은 1975년에 주변 사람들과 詩 얘기를 하면서 「촉도난」을 극찬했다.
『이 詩는 예술성이 높은 것이 특점이다. 누가 그처럼 생동감 있는 詩를 쓸 수 있겠는가? 이 詩는 사람들을 조국의 수려한 산천 속으로 이끌어 가고, 또 사람들을 신비하고도 아름다운 神話(신화) 세계로 이끌어 감으로써 읽는 사람마다 하늘에 오르기보다 힘든 촉도에 서 있는 느낌을 갖게 한다』
모택동은 또 이백의 詩를 활용하여 전선으로 나가는 병사들을 격려하기도 했다. 1935년 1월 하순에 준의회의가 있은 뒤, 귀주의 토성에서 홍군과 국민당군이 격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형세는 홍군에게 불리하였다. 이에 총사령관인 朱德(주덕)이 직접 전선에 나가 전투를 지휘하기로 결심했다. 모택동은 이러한 주덕과 그 부대를 대대적으로 환송해 주었다. 모택동이 먼저 『朱총사령의 전선 출전을 환송합니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 『영용한 홍군은 천하무적이다!』고 구호를 외쳤다.
주덕이 빠른 걸음으로 모택동 앞으로 다가가 두 사람이 손을 잡았다. 주덕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시다니 너무 지나치십니다』고 감사를 표하자 모택동이 바로 말을 받아, 『당연한 일이지요. 도화담 물이 천자 깊이라지만 우리 두 사람의 형제의 情과는 비할 바가 아니지요. 총사령께서 많은 포로들을 붙잡고 싸움에서 더 큰 승리를 거둘 것을 축원드립니다』고 대답했다.
모택동은 이 인사말에서 이백의 詩 「왕윤에게 드림(贈王倫)」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었다. 이 詩의 내용은 「이백이 배를 타고 길을 떠나려는데 강 기슭에서 부르는 노래 소리 들려오네. 桃花潭(도화담)의 물 깊이가 천자 길이나 된다 하지만, 나와 이별하는 왕윤의 마음과는 비길 바가 아니네」라는 것이다. 생동감 넘치는 이백의 詩도 시이지만 모택동이 이러한 詩에 대해 애착을 갖고 필요에 따라 적절히 인용하였다는 사실도 모택동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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