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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종교, 사상

[스크랩] 李中 시인의 毛澤東 기행 ② 현지 답사로 재구성한 天下大亂의 大治者, 그 深層의 인간상

李中 시인의 毛澤東 기행 ②


새로운 자료, 현지 답사로 재구성한 天下大亂의 大治者, 그 深層의 인간상


「부친은 성격이 거칠어 늘 나와 동생을 때렸다. 그는 동전 한푼도 우리에게 주지 않았고 가장 형편없는 음식만 우리에게 주었다. 그는 머슴들에게는 보름에 한 번씩 달걀을 먹였다. 그러나 고기는 주지 않았다. 나에게는 달걀도 고기도 주지 않았다」

李 中 중국 연변 과기대 부총장


책벌레 시절
아버지와의 대결, 사범학교

학생 시절, 李大조와의 만남

毛澤東의 아버지 毛順生

毛澤東은 1893년 12월26일에 태어났다. 고향은 호남성 湘潭縣(상담현) 韶山(소산)향이다. 현재 그곳에 옛집이 보존되어 있고, 동상과 기념관이 서 있다. 毛澤東의 집안은 富農(부농)에 가까운 중농이었다. 아버지는 농사를 지으며 쌀가게도 하고, 돈놀이도 하였다고 하는데 아들이 외지에 나가서 공부를 많이 하는 것보다 자기 곁에서 집안 일을 돕는 것을 더 원했다고 한다. 毛澤東의 生家(생가)도 잘 간수되고 있었고, 꽤 넓어 보였다. 방문객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ㅁ 字(자)로 된 집안의 한가운데에 돼지 우리가 있는 것이었다.

생가를 보아도 분명 貧農(빈농)이 아니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毛澤東의 아버지 역시 당시의 대다수 농민이 그랬던 것처럼 빈농으로부터 해방되는 데에는 많은 곡절과 고생이 따랐었다. 毛澤東은 1936년 「중국의 붉은 별」의 저자인 에드가 스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가난한 농부였던 아버지는 엄청난 빚 때문에 젊어서 군에 입대해야만 했었다. 여러 해 동안 군인 생활을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근검 절약하는 생활 태도와 소규모 사업을 통해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저당 잡혔던 땅들을 되찾을 수 있었다』

毛澤東의 아버지 毛順生(모순생:1870~1920년)은 이름이 貽昌(이창)이고 호는 良弼(양필), 순생은 字이다. 毛澤東은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 毛澤東은 자신의 아버지가 성격이 거칠고 이기적이며 식견이 짧다고 비판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어머니 文七妹(문칠매)를 따르고 사랑했던 毛澤東은 아버지와는 매사에 충돌했다. 아버지가 빚으로 저당잡혔던 땅을 자신의 노력으로 되찾은 毛順生은 中農(중농)이 된 뒤에도 곡식 장사를 하여 돈은 꽤 모았다. 毛澤東은 아버지와 얽힌 사연들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내가 글자를 조금 알게 되자 부친은 나에게 저녁마다 장부 기입을 시켰다. 그는 엄격한 감독이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한가롭게 앉아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성미였다. 장부 기입할 일이 없으면 곧바로 농사 일을 시키는 것이었다. 부친은 성격이 거칠어 늘 나와 동생을 때렸다. 그는 동전 한 푼도 우리에게 주지 않았고 가장 형편없는 음식만 우리에게 주었다. 그는 머슴들에게는 보름에 한 번씩 달걀을 먹였다. 그러나 고기는 주지 않았다. 나에게는 달걀도 고기도 주지 않았다.

나의 어머니는 인자한 여성으로서 마음씨가 곱고 너그러웠다. 언제나 남을 도우려 애썼고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였다. 災荒(재황)이 든 해에는 그들이 쌀을 빌러 오면 자주 내주곤 했는데, 부친이 옆에 계실 때엔 그러지 못했다』


아버지 길들이기


毛澤東은 어지간히 아버지와 다투었던 것 같다. 毛澤東은 아버지를 각박하고 이기적이며 독단적이라고 싫어하였고,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毛澤東을 불효하고 나태하다고 타박하였다. 毛澤東은 이치를 따지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공개적으로 논리를 내세워 아버지와 「투쟁」했다.

아버지가 그를 불효하다고 하면 그는 곧 經書(경서)의 「父慈子孝(부자자효)」를 내세워 『아버지가 자애로워야 아들이 효성을 다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아버지가 그를 나태하다고 나무라면, 그는 곧 어른들은 응당 애들보다 더 많이 일해야 한다고 하면서, 『내가 아버지 나이가 되면 아버지보다 훨씬 더 많이 일할 것』이라고 대꾸하는 식이었다.

毛澤東의 재미있는 회고담 하나를 더 들어보자.

『우리 집에서는 변론 투쟁이 부단히 발전하였다. 내가 13세 때의 일이다. 그날 부친은 손님을 많이 초청했었는데 손님 앞에서 부친과 내가 爭論(쟁론)을 하게 되었다. 부친은 손님들 앞에서 내가 게으르고 無用之物(무용지물)이라고 욕을 하였다. 이에 분통이 터진 나는 맞받아 욕을 하면서 집을 뛰쳐나왔다.

어머니는 나를 쫓아오면서 집으로 돌아가자고 달랬고, 아버지는 욕설을 퍼부으면서 뒤쫓아 와서는 집으로 되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나는 어느 연못 가에 달려가서 한 걸음만 더 다가오면 물 속에 뛰어들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 內戰(내전) 정지를 위한 요구와 협상조건이 모두 제기되었다.

부친은 내가 무릎을 꿇고 사과를 해야 하며 잘못을 승인하라고 주장했고, 나는 앞으로 나를 때리지 않는다면 한쪽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겠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전쟁은 이렇게 종결되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나는 하나의 도리를 알게 되었는데, 즉 내가 공개적으로 반항하면서 자신의 권리를 지킬 경우 나의 부친은 바로 누그러들지만, 내가 그냥 온순한 태도로 나갈 때엔 부친은 더욱 기고만장하여 나를 때리고 욕한다는 것이었다』

毛澤東의 아버지도 그랬지만 毛澤東 자신도 어린 시절 잠시 군대 생활을 했었다. 1911년, 辛亥革命(신해혁명)의 바람을 타고 소년병으로 6개월 가까이 군대밥을 먹은 경험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 군대는 오늘의 軍과는 그 실상과 개념이 전혀 딴판인 군대였다. 오늘의 중국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당시의 軍에 대한 국민의 시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淸(청)나라 말기도 그랬었지만, 중국이 여러 개의 실질적인 「王國(왕국)」으로 쪼개져서 이른바 「軍閥(군벌)」의 통치를 받던 시절, 백성들은 지배층의 탄압에 시달릴 대로 시달렸다. 그때 어느 중국 신문에 실린 독자 투고 하나를 소개해 본다.

<사람들은 나라가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군대를 길러야 한다고 말한다. 外勢(외세)로부터 우리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군대는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군대는 청년들을 끊임없이 징집해 가고 우리는 점점 더 가난해져 갈 뿐이다! 일찍이 老子(노자)는 군대가 지나간 자리에는 가시덤불 이외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말했는데, 요즈음은 군대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지나간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 솔직히 말해서 군인들과 火賊(화적)떼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3大 규율 8항 注意


어떤 통계에 의하면 袁世凱(원세개)가 죽은 1916년부터 장개석의 국민당軍에 의해 北伐(북벌)이 어느 정도 매듭지어졌던 1928년 사이에 1300명의 「군벌」이 중국 全지역에서 날뛰었다고 했다. 이들 타칭 자칭 軍閥들이 省(성) 단위의 작은 규모로 서로 싸우고 공격하며 전쟁을 벌인 횟수도 140여 회나 되었다고 하니, 이 아수라 통에 백성들이 군대라면 진저리를 칠 만도 한 것이었다.

毛澤東은 紅軍(홍군)에게, 이른바 「3大 規律(규율)과 8항 注意(주의)」라는 것을 만들어 紅軍 교육의 지표로 삼았다.

다음에 이야기하겠지만, 1973년이 저물어 가는 12월21일, 중남해에서는 전국 8大 軍區(군구)사령관을 참석시킨 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파할 무렵, 周恩來(주은래)의 제창으로 원로 군인을 포함한 軍區사령관과 정치국 위원들이 毛澤東의 지휘로 이 「3大 규율 8항 주의」 노래를 소리높여 합창했던 사실은 유명하다.

홍군이 기회 있을 때마다 불렀던 그 노래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혁명군인은 기억합시다.

3大 규율 8항 주의를.

첫째론 모든 행동

지휘에 복종합시다.

보조가 일치해야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3大 규율」

1. 모든 행동은 지휘에 복종할 것.

2. 인민의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가지지 말 것.

3. 모든 노획물은 조직에 바칠 것.


「8항 주의」

1. 말은 친절하게 할 것.

2. 賣買(매매)는 공평하게 할 것.

3. 빌어 온 물건은 돌려줄 것.

4. 破損(파손)한 물건은 賠償(배상)할 것.

5. 사람을 때리거나 욕하지 말 것.

6. 농작물은 해치지 말 것.

7.여자를 희롱하지 말 것.

8. 포로를 학대하지 말 것.>


毛澤東의 홍군은, 이러한 지침을 부단한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체득하고 실천해 나감으로써 종래의 중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面貌(면모)의 군대 像(상)을 중국인민 앞에 선보였다. 毛澤東을 세계의 戰史(전사)에서 출중했던 전략가의 한 사람으로 지목한 미국의 군사 전문가 베빈 알렉산더는 「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라는 그의 저서에서 당시 홍군의 모습과 특성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황량한 奧地가 된 延安


<이 군대는 階層的(계층적) 명령 체계가 아니라 가능한 한 가장 민주적인 형태를 지향했다. 이들의 군대에는 西方(서방)이나 국민당 군대와는 달리 계층과 교육 정도에 의해 士兵(사병)과 분리되는 명확한 將校團(장교단)이 없었고 계급과 記章(기장)도 없었다. 남자들은(종종 여자들도) 그들의 능력을 보여줌으로써 리더가 되었고, 사병들은 그들을 「소대장 동무」 「중대장 동무」처럼 직함으로 호칭했으며, 장교들은 병사들을 구타하거나 학대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함께 살았고, 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옷을 입었다>

필자는 정강산과 延安(연안)에서 毛澤東과 朱德(주덕), 周恩來, 유소기, 팽덕회, 진의, 林伯渠(임백거), 任弼時(임필시) 등 혁명 수뇌들이 살았던 토굴 같은 집들을 둘러보았다.

먼저 연안혁명기념관부터 찾았다. 정강산혁명기념당이나 박물관에 전시된 것들이 대부분 복제품이었던 데에 비해 이곳의 전시품들은 原品(원품)이 많았다.

묵었던 여관 이름도 窯洞(요동)호텔이었다. 이곳을 떠나 西栢坡(서백파)를 거쳐 北京으로 가기까지 10년 넘게 이 연안은 중국 공산당의 중심지였다. 毛澤東과 그의 동지들은 여기서 서안사건을 치렀고, 國共(국공)연합을 이루어 냈고, 抗日(항일)전쟁을 지휘했으며, 全세계에 홍군의 존재를 알렸다.

공산 중국의 초기 수도나 다름없던 이 도시도 중공 중앙이 떠난 뒤에는 다시 황량한 奧地(오지)의 도시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地勢(지세)가 워낙 험악했고 그만큼 국민黨軍의 공격이 어려웠던 곳이었다.


自力更生 시절


毛澤東, 주덕, 주은래, 유소기 등 수뇌들은 연안에서 네 번이나 거처를 옮겨 다녔다. 거처를 옮겨 다닌다고 해서 그들의 住居환경이 나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내내 똑같은 동굴집에, 공간은 여전히 협소하고, 간소하다 못해 열악한 什器(집기)와 시설은 변함이 없었다. 보안상 이런 동굴 집을 전전하면서도 그들은 장교와 사병, 수뇌급과 일반 당원들이 똑같은 수준의 생활을 꾸려나갔다. 이러한 그들만의 독특한 생활 모습은 에드가 스노 같은 서방 기자들의 눈에 驚異(경이)와 異色(이색)으로 비쳐질 수밖에 없었다.

중공은 연안에서 모든 필요한 물건을 自力으로 마련해야 했다. 독립적인 해방구를 관리해야 하는 만큼 전쟁, 교육, 경제 이 모든 분야에서 관리 시스템과 資源(자원)의 조달이 급선무였다. 중공이 연안 시절에 특별히 강조했던 것이 「自力更生(자력갱생)」과 「생산 투쟁」이었다. 毛澤東이 자기가 즐기는 담배를 조달하기 위하여 자기의 동굴 앞에 있는 작은 텃밭을 가꾸어 담배를 재배했다는 것도 이 시기의 이야기이다.

중국의 건군기념일은 8월1일이다. 이것은 1933년 중화소비에트에서 결정되었던 사항이다. 그리고 1949년 새 정부가 수립된 직후, 毛澤東은 중국 인민해방군의 모든 軍旗(군기)와 표징에 「8·1」이라는 글자를 써 넣도록 지시하고 붓글씨로 직접 서명까지 했었다.


「南昌起義」의 도시를 찾다


「8·1 건군절」은 1927년 8월1일의 「南昌起義(남창기의)」를 기념해서 정한 것이었다. 필자가 새벽 일찍이 정강산을 출발, 江西省(강서성)의 감주를 거쳐 남창을 찾은 것은 1998년 1월21일 밤이었다.

南昌起義는, 중공 중앙 前敵(전적)위원회 서기라는 직책을 맡아 남창에 나타난 주은래를 중심으로 총지휘 賀龍(하룡)과 葉挺(엽정), 朱德(주덕), 劉伯承(유백승), 섭영진, 陳毅(진의) 등이 참여한 대규모 工農(공농)홍군의 봉기였다. 당시 起義에 동원된 병력은 하룡의 제20군 산하 7개 퇀(대대 규모의 軍부대), 엽정의 제11군 24사의 3개 퇀과 주덕이 퇀장을 맡고 있던 제3군 군관교도퇀과 역시 주덕이 책임자로 있던 남창市 공안국의 무장 병력 등 2만여 명이었다. 주덕이 南昌起義에 참가했었다는 것과, 그가 오래 전에 경찰에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바로 그 당시 주덕이 남창市 공안국의 국장이었다는 사실은 남창기의紀念館(기념관)에 가서야 알게 되었다.

봉기는 새벽 0시 조금 지나 시작되었다. 그때 남창을 지키고 있던 적의 병력은 3000여 명에 불과했다. 초반의 승리는 물론 起義軍의 몫이었다. 병력도 우세했고, 사전 계획과 작전도 주밀했고, 지휘체계도 통일적이어서 남창市는 이내 起義軍의 수중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러한 戰果(전과)를 고수하고 확대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남창 인근 武漢(무한)과 남경 방면의 지원세력의 사정이 여의치 못한데다가, 남창市를 에워싼 적의 규모 역시 起義軍의 몇 배에 달하는 엄청난 병력이었다. 결국 남창에서 철수하여 南下(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8월2일, 부대를 3개軍으로 再편성하고 3일부터 병력을 이동시켰다. 주은래가 8월5일 마지막으로 남창을 떠남으로써 남창기의는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봉기가 되고 만다.


毛澤東과 賀龍의 만남


남창기의는 중국 공산당이 자체의 병력을 모아 적과 대규모로 전쟁을 벌인 첫번째 시도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남창기의의 첫 총성을 계기로 중국 공산당은 자체의 인민혁명군을 건설하기 시작했고, 자체의 군대로 무장혁명투쟁을 전개해 나가겠다는 새로운 노선을 확고히 했기 때문이다.

南昌起義에 대해 스탈린은 반대를 했다.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에서는 스탈린의 親書(친서)를 휴대한, 스탈린과 同鄕(동향)인 로미나체라는 대표를 중국에 새로이 보내 남창봉기 계획을 중단시키려 했다. 무장봉기를 강행한다면 코민테른에서는 군사 고문단을 철수시킬 것이며 코민테른의 자금도 봉기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주은래는 이 지령을 묵살하고 계획대로 南昌起義를 밀고 나갔다.

장차 공산 중국의 대들보로 약진할 군사 지도자들의 대부분이 이 남창기의를 통해 한자리에 모였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중국은 1955년 9월, 10명의 최고 군사 지도자에게 「중화인민공화국 원수」를 수여했다. 이른바 중국의 「10大 원수」가 그것이다. 그중에서 주덕, 진의, 하룡, 유백승, 임표, 섭영진, 엽검영 등 7명이 南昌起義에 참가했다.

毛澤東과 하룡이 처음 만난 것은 연안에서였다. 그러나 毛澤東은 정강산에 오르면서부터 같은 호남성 출신에 南昌起義의 주역이라 할 하룡이라는 이름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는 곧잘 하룡의 이름을 들어 병사들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었다고 한다.

『동지들, 하룡은 부엌칼 두 자루를 들고 혁명하여 지금은 한 개 군단을 지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한 개 영인데 어찌 더 큰 혁명 隊伍(대오)를 조직할 수 없단 말입니까?』

1959년 9월 毛澤東은 당시의 팽덕회를 국방부장 직에서 물러나게 하면서 그 후임으로 임표와 하룡 두 사람을 꼽고 오래 고심했다. 결국 임표를 낙점하였지만 하룡에게도 새 역할을 주는 묘한 인사를 했다. 毛澤東은 임표를 군사위원회 제1부주석 겸 국방부장에 임명하면서, 그때까지는 없었던 군사위원회 제2부주석 자리를 새로 만들어 하룡에게 맡긴 것이다. 毛澤東은 그들 두 사람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이 권력 分占(분점)에 가까운 역할분담은 뒷날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임표의 하룡에 대한 엄청난 박해와 하룡의 억울한 죽음으로 연결된다.

『군사위원회 사업은 임표가 출근할 수 있거나 또 외출하지 않았을 때엔 임표가 주최하고, 임표가 휴양하거나 외출하면 하룡이 주최해야 하겠습니다』

하룡은 그의 생애를 비참하게 마감했다. 콧수염을 기르고, 정열적이며 낙천적이기도 했던 賀龍이 임표의 홍위병으로부터 「투쟁」의 대상이 되어 곤욕을 치르기 시작한 것이 문화대혁명의 발동기인 1966년이었다. 해가 저물어 갈 무렵, 홍위병들이 賀龍의 집을 덮칠 것을 미리 눈치 챈 주은래가 그를 避身(피신)시켰다. 그와 가족들은 서부 산악지대로 피신했다. 1967년 1월10일부터 이튿날까지 홍위병은 賀龍의 집을 샅샅이 뒤져 금고를 따고 1000매나 되는 기밀서류를 압수해 갔다.

서부의 은신처에서 그와 그의 아내 薛明(설명)은 잠시나마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그곳은 임표가 관할하는 軍의 통제지역이었고 비밀경찰의 총수격인 康生(강생)의 지배 아래 있었다. 곧 賀龍은 「투쟁」의 대상이 되어 집회에 끌려 나왔다. 그러나 賀龍은 「투쟁」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 벅찬 존재라고 생각한 강생이 방법을 바꾸어 「의학적 수단」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賀龍은 오랫동안 당뇨를 앓고 있었고 인슐린 치료를 받고 있었다. 병세가 심각했는데, 그들은 賀龍에게 인슐린이 아닌 포도당 주사를 놓기 시작했다. 의학적인 살인이었다.


주덕과 毛澤東의 인연


南昌起義가 있고 한 달쯤 뒤인 9월9일, 毛澤東은 장사에서 秋收(추수)起義를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로 끝난다. 黨의 지시에 따라 전국의 4개 省(성)에서 동시에 일으킨 추수봉기였으나 호남성의 지도자 毛澤東도 예외없이 일단은 실패하고 만다. 도시에서의 군사혁명에 실패한 주은래는 서금, 광주, 홍콩 등지를 潛行(잠행)한 끝에 가까스로 중공 중앙이 있는 상해로 갈 수 있었다.

상해에서 주은래가 중공당의 핵심으로 지하활동을 벌인 반면에, 毛澤東은 농민 혁명의 근거지를 더욱 확실하게 다지기 위해 호남성과 강서성의 접경지역이자 험난한 산악지대인 정강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毛澤東과 주은래가 비록 실패하기는 했으나 이 봉기를 통해서 다시 한번 軍事力(군사력)에 의한 공산혁명 노선을 확실히 했다는 점이 중공당의 노선 정립에 중요한 分岐點(분기점)이 되었다.

당시의 소련은 여전히 도시 노동계급을 근거로 한 공산주의 활동을 지지하고 毛澤東과 주은래를 멀리 하며, 당시까지만 하여도 도시 활동을 중시하던 유소기를 중용했다.

그러나 주은래는 그 특유의 정치력을 발휘하여 여전히 당의 핵심에 있으면서 그의 위치를 활용하여 毛澤東의 정강산 투쟁과 소비에트 건설을 도왔다.

이듬해 4월 朱德과 진의가 남창기의에 참가하였던 잔류부대를 이끌고 정강산으로 毛澤東을 찾아 합류한다. 이때의, 주덕과 毛澤東의 역사적인 회동을 기념하는 다리 하나가 寧岡(영강)에 세워져 있다. 이름하여 「會師橋(회사교)」. 필자는 장사를 떠나 기차로 茶陵(차릉)을 거쳐 버스를 타고 영강으로 가는 코스를 택했었다. 이 길을 택한 것은, 정강산으로 가려면 먼저 정강산과 가장 가까운 영강으로 가서 차편을 알아보는 것이 좋겠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毛澤東이 1927년 정강산으로 향할 때도 이 차릉과 영강을 거쳐서 갔었다. 당시의 부대는 말을 타거나 步行(보행)이었을 것이다. 오늘의 필자는 편하게 열차편과 조금은 불편하지만 버스를 이용할 수 있었다.

버스가 영강 정류장에 채 못 미치는 곳에 「회사교」가 있었다. 郭沫若(곽말약)의 글씨로 「會師橋」란 세 글자가 조그마한 다리에 새겨져 있었다.

오늘날 중국의 유서깊은 혁명유적지엔 곽말약의 글씨가 무척 많다. 詩詞(시사)와 역사에도 뛰어났지만, 글씨도 높은 수준이었던 것 같다.

정강산에서 毛澤東과 주덕이 힘을 모으면서 혁명군의 세력은 크게 불어나서 4000명이 넘는 대부대로 성장한다. 이제 병사들의 식량 문제와 각종 보급품의 조달이 어려운 과제로 등장한다.

장소를 옮겨야 했다. 이 무렵의 정강산 실상의 여러 모습은 毛澤東이 1928년에 쓴 「정강산 투쟁」이란 제목의 보고서에 잘 나타나 있다. 毛澤東과 주덕의 만남은 중국 혁명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주덕과 毛澤東을 묶어 세상에서는 흔히 「朱毛(주모)」라 하고, 그 부대를 「朱毛 부대」라 했다.

연안 시절만 해도 중공 중앙의 회의장엔 주덕과 毛澤東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었던 것을 당시의 사진을 통해 볼 수 있다. 「주모」에 얽힌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猪」가 없으면 어떻게 「毛」가 붙어 있겠습니까


1973년 12월21일 오후 3시. 北京의 중남해. 몇십 명의 정치국, 군사위 간부들이 주석 毛澤東을 기다리고 있었다. 3시5분, 毛澤東이 비서의 부축을 받으며 회장에 들어섰다. 그 뒤에는 주은래와 엽검영이 따랐다. 모두 기립해 毛澤東을 반겼다. 毛澤東은 맨먼저 주덕에게 손을 내밀었다. 주덕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면서 毛澤東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주석 동지, 안녕하십니까?』

毛澤東이 말했다.

『총사령 동지, 안녕하십니까? 당신은 붉은 사령관입니다. 어떤 사람은 당신을 검은 사령관이라고 하지만 나는 언제나 그들을 비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붉은 사령관이라고 합니다. 그래 지금도 붉은 대표가 아니십니까?』

주덕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주석 동지가 총사령이십니다』

毛澤東이 머리를 저으며 재미있게 말했다.

『아니, 아닙니다. 주(朱-猪) 모(毛)니까 당신은 「猪」고 나는 그 몸의 털입니다. 「猪」가 없으면 어떻게 「毛」가 붙어 있겠습니까?』

중국어로 붉을 朱와 돼지 猪자의 발음이 비슷한 것을 빗댄 毛澤東의 유머였다.

1928년, 정강산에서의 「會師(회사)」로부터 어느덧 45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때 35세이던 毛澤東은 이제 80이 되었고, 42세이던 주덕도 87세 나이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정강산 이래로 두 사람 사이는 정말 돈독했었다. 1935년 1월, 長征 도중의 준의회의에서 毛澤東은 실질적인 중공당과 軍의 지도권을 쥐게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毛澤東을 지지했던 주덕은 그냥 그대로 중공당의 중앙혁명군사위의 주석 자리와 중국 工農江軍 총사령관을 맡는다. 1937년 抗日戰爭(항일전쟁)이 본격화되면서 중공군은 國共합작에 의해 국민혁명군 제八路軍(8로군)으로 편입되는데, 역시 주덕이 팔로군의 총사령관 직을 맡게 된다. 전략과 정치는 毛澤東, 전쟁 지휘는 「홍군의 아버지」인 주덕이라는 식이었다.

오늘에 와서 되돌아 볼 때, 1973년 겨울은 문화대혁명의 퇴조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4인방」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당시의 정황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아주 각박하기 짝이 없던 시기였다. 朱德은 나라의 장래와 老혁명 동지들의 불운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어떻게 손을 써볼 수도 없는 자신의 처지에 혼자 분을 삭이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거의 소원했던 두 사람이 이렇게 만난 것이었다. 이날의 모임이 있고 3년 뒤에 주덕은 北京에서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毛澤東이 죽기 두 달 전인 1976년 7월 6일이었다.


인민일보의 스탈린觀


이상하게도 이 해에 주은래, 주덕, 毛澤東 등 사실상 중공당의 정상에 있었던 세 사람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주덕은 老年(노년)에 詩도 쓰고, 각종 혁명기념물의 휘호 등을 쓰면서, 비교적 권력과는 멀리 처신하고 있었다. 원래부터 정치적 야심이나 권력욕 같은 것이 없는, 담백하고 낙천적인 성격의 그였지만 한때 中蘇(중소) 분쟁에 휘말려 毛澤東으로부터 斜視(사시)의 눈길을 받은 적이 있었다.

1956년 7월,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 중공 대표단의 단장으로 毛澤東을 대신하여 70세의 朱德이 참석하였다. 그때 그는 중공 국가 부주석, 국방위 부주석 등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전혀 예기치 않았던 사태가 주덕을 기다리고 있었다.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주덕은 즉시 毛澤東에게 電文(전문)을 보내 지시를 내려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상황으로 보아 소련측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자기의 의견을 비쳤다고 한다. 어떤 毛澤東 측근의 기록에 의하면, 주덕의 보고를 받은 毛澤東은 화가 나서, 주덕이나 흐루시초프나 다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당시 중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모스크바에서 공부하던 한 학생의 회고를 통해 소련에서 전개되고 있던 스탈린 격하운동의 한 단면을 알아보기로 하자. 현재 연변대학의 박사 지도교수로 재직중인 鄭判龍(정판룡) 박사는 그의 저서 「고향 떠나 50년」에서 소련 유학생으로서 겪었던 당시의 모스크바 분위기를 간결하고,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다.

정판룡의 고향은 대나무의 고장인 한국 전남 담양군이다. 그는 1933년생으로 다섯 살 때인 1937년 3월에 부모의 손에 이끌려 낯설고 추운 만주땅으로 갔다. 그는 현재 연변조선족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암과 투병하면서도 정력적으로 저술 활동을 하고 있다.

『1957년 7월에 모스크바에서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가 열렸다. 당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노선과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 내용인즉 미국 같은 제국주의 국가와 평화공존을 해야 하며 사회주의 혁명도 폭력으로가 아니라 국회 선거를 통하여 평화적 이행을 할 수 있다는 것 등이었다.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스탈린에 대하여 再평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 이번 대회에서 논의되었다는 것이다.

스탈린은 우리가 이전에 생각하던 것처럼 그런 위대한 분이 아니고 사업 가운데서 오류를 많이 범했고 특히 1930년대 숙청운동 시기에 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처단한 독재자라고 하였으며 2차 대전 시기 소련이 한때 큰 실패를 본 것도 스탈린 때문이라는 소문까지 돌았다. 우리 중국 유학생들은 무슨 영문인지를 몰라 중국대사관에 가서 물어보았으나 아직 이에 대한 상급의 지시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 당국의 대응이 중국 유학생들에게 전달된다.

『중국대사관에서 「인민일보」에 스탈린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한다는 데에 대한 중요한 글이 실렸으니 모두 주의해 보라는 통지가 왔다. 「무산계급독재의 역사적 경험에 대하여」란 제목의 글인데 내용인 즉 스탈린의 과오에 대하여 역사적으로 보아야 하며 또 스탈린은 일부 과오가 있기는 하나 과오보다 공로가 훨씬 큰 위대한 마르크스-레닌주의자라는 것 등이었다』


「東風이 西風을 압도한다」


毛澤東과 흐루시초프의 갈등은 서서히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毛澤東이 두 번째로 소련을 찾아왔다. 1956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열리는 사회주의국가 공산당회의와 11월7일의 소련 10월 사회주의혁명 40돌 경축대회 참석차 모스크바에 온 것이다. 모스크바의 중국 유학생들은 대사관에 毛澤東을 따로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11월의 어느 날 오후 3시경에 毛澤東은 유학생들이 기다리는 모스크바대학 강당에 나타났다.

『毛澤東 주석은 강당 입구 앞에 서 있는 우리를 보더니 수고한다고 하면서 손을 내밀었다. 나는 평생 처음으로 毛澤東 주석의 두터운 손을 잡아보았다… 학생회 간부들이 毛澤東 주석 일행을 안내하여 강당에 들어서자 거기서 기다리던 학생들은 강당이 떠나갈 듯이 「毛澤東 주석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어 毛澤東 주석은 국제정세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원래 호남성 사람인 그의 말에는 호남성 사투리가 더러 섞여 있었다. 그래서 나처럼 아직 중국어에 능통하지 못한 조선 사람은 좀 알아듣기 힘들었다. 毛주석은 한참 동안 나라 이름들을 들어가면서 국제형세를 분석하더니 큰소리로 「지금은 西風이 東風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동풍이 서풍을 압도한다」는 말은 중국 고전명작 「紅樓夢(홍루몽)」에 있는 명구의 하나라고 하였다. 毛澤東 주석은 중국 고전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날 미리 준비 없는 강화를 하면서도 고전들을 수없이 인용하고 있었다』

주덕이 인솔했던 대표단에 등소평이 있었다. 주덕을 단장으로 한 중공 대표단은 주덕 외에 등소평, 담진림, 王稼詳(왕가상) 등이 대표로 참석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다들 혼쭐이 난 사람들이다. 그중에서도 왕가상은 연안 시절부터 毛澤東의 측근에서 毛澤東 사상을 정립하는 데에 있어서 사실상의 일등 功臣(공신)이었다. 필자가 서안의 八路軍辦事處(팔로군판사처) 옛 터를 찾았을 때, 전시실 벽에 걸려 있는 각종 자료들을 보다가 학자풍의 젊은 공산주의자 왕가상이 책상 앞에서 집필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에 눈이 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 설명에, 「毛澤東 사상」이라는 말을 최초로 쓴 사람이 왕가상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더욱 기억이 선명하다.


王稼詳의 영욕


왕가상은 또 스탈린과 코민테른이 毛澤東을 중국 공산당의 지도자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모스크바에서 중국 연안으로 갖고 온 사람이었다. 준의회의 이후 줄곧 주은래와 함께 毛澤東의 지도력을 뒷받침하는 데에 헌신적이었던 그는 정부 수립 후 초대 駐소련 대사, 이어서 외교부 副부장과 중공 중앙 대외연락부 부장 직을 오랫동안 맡았었다.

그런 그가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바로 체포되었다. 1967년 그는 홍위병 앞에서 갖은 곤욕을 다 치렀고, 주은래 축출에 앞장섰던 어느 외교관으로부터는 뺨을 맞고 쓰러지기도 했다. 18개월간 독방에 갇혀 고생하다가 1970년 임표의 지시로 武漢(무한) 서북쪽의 시골로 쫓겨 갔다. 1974년 1월, 73세로 왕가상은 죽었다.

毛澤東은 지역별로 영향력이 있는 8大 軍區(군구)사령관들의 인사 배치를 새로이 하는 한편으로 軍의 선배격인 등소평을 다시 기용, 군사위원회의 실질적 리더로 부각시켰다. 군구사령관과 軍의 원로들 앞에서 文革기간 중 실각했던 등소평의 再등용을 알리면서도 毛澤東은 등소평에게 일침을 놓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다.

『나는 오늘 군사위원회에 지도자 한 분을 모셔왔습니다. 그분의 성함은 등소평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분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를 조금 어려워합니다. 그는 일을 과단성 있게 처리합니다. 그도 나와 마찬가지로 70%는 유용한 일을 해왔으며 30%는 잘못되었습니다. 그는 동지들의 옛 상급자였는데 내가 청해왔습니다. 나 한 사람이 청해온 것이 아니라 정치국에서 청해왔습니다』

이렇게 등소평을 소개하며 치켜세웠던 毛澤東은 등소평에게, 毛澤東 자신에 못지않게 반항적인 등소평의 성격을 꼬집어 주의를 준다.

『소평 동지. 남들이 동지를 좀 무서워 하고 있는데 내가 동지에게 두어 마디만 말하겠소. 外柔內剛(외유내강), 綿里藏針(면리장침)하라고 말이오. 겉으로는 상냥스럽되 속은 강철 바늘이 되란 말이오. 지난날의 결점은 점차 고쳐 나가십시오』

그동안 軍은 홍위병의 난리와 「4인방」의 횡포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으며, 軍의 위신은 물론 士氣(사기)까지 떨어지고 있었다. 毛澤東은 임표가 사실상 통괄 지배했던 軍을 추스려야 했고, 그것을 맡을 유일한 적임자로 등소평을 꼽았다. 그러나 毛澤東은 등소평을 다시 등용하는 데에 있어서 엽검영을 내세워 주덕 등 軍의 원로들과 의논하는 모양을 갖추었다.

등소평은 軍의 선배로서 당시 군구사령관들로부터도 인간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고 있었다. 군구사령관의 인사 이동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동안 군구사령관들은, 임표의 지원을 받아왔고, 혁명 1세대들이 계속 숙청을 당해 중앙당의 장악력이 약해진 상태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날로 커가고 있었다.


『나는 임표의 말만 듣고 오류를 범했습니다』


자기 死後(사후)의 지방 분할과 軍閥化(군벌화)에 몹시 신경을 써왔던 毛澤東으로서는 이 시점에서 군구사령관들의 위치를 싹 바꾸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임을 통해 毛澤東 자신에 대한 軍의 신뢰와 충성을 再확인하고 軍의 사기를 북돋워야 했다. 毛澤東이 입을 열었다.

『…제2방면군의 賀龍이 보이지 않는군요. 내 보기에 하룡 동지의 문제는 잘못 처리되었습니다. 이 일은 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당시 나는 賀龍에게 「당신은 다릅니다. 당신은 한 개 방면군의 깃발입니다. 나는 당신을 보호하려고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총리도 그를 보호했습니다』

당시 억울하게 毛澤東과 임표로부터 내침을 당했던 軍 지도자가 적지 않았다. 賀龍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시했던 毛澤東은 이어 그들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까지도 거론했다.

『명예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렇잖으면 하룡을 잃게 됩니다… 모두 임표가 저지른 일입니다. 나는 임표의 말만 들었기 때문에 오류를 범했습니다. 또 羅瑞卿(나서경)의 명예도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소평 동지는 말하기를, 임표가 상해에서 나서경에게 불의의 습격을 가했는데, 나서경에게 불만을 가진 임표가 그런 짓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임표를 지지했습니다. 말하자면 임표의 말을 듣고 나서경을 못살게 굴었습니다』

이때 주은래가 거들었다. 毛澤東에게 보낸 나서경의 편지에 대한 毛주석의 回示(회시)가 있었는데 이것은 정치국에 이미 보내졌고, 곧 羅瑞卿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毛澤東이 다시 말을 이었다.

『명예를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잘못 투쟁당한 사람들의 명예를 몽땅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몇 번이나 한쪽 말만 들었는데 잘못된 일입니다. 잘못되었어요. 오늘 동지들에게 自己批判(자기비판)을 합니다. 셀프크리티시즘(Selfcriticism!)』

주은래와 毛澤東이 다시 말을 주고받는다. 주은래가 입을 연다.

『저도 자기비판을 하겠습니다. 老(노)동지들을 주석께서는 줄곧 보호하셨습니다만 많은 경우 저의 사업이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당신인들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었겠소? 「최고 지시」도 소용없었는데 그들이 당신의 말을 들었겠소?』


對立物의 통일


이날 毛澤東은 많은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자리를 옮기는 사령관들에게 일일이 다짐을 받았고, 주의와 지시도 했다. 毛澤東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그의 발언 몇 대목을 옮겨본다.

『…내가 한 말이라고 해서 모두가 靈壇妙藥(영단묘약)이 아닙니다. 주로는 동지들 자신이 조사 연구한 것에 의거해야 합니다… 나와 楊得志(양득지) 동지도 처음부터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습니다. 그가 한 개 旅(여)의 병력을 거느리고 연안에 왔을 때에 비로소 그를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도망병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나는 그에게 도망병을 붙잡지 말라고 했습니다.

도망가는 것은 있기 싫어서 하는 짓인데 도망을 가게 내버려 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만약 붙잡았다면 도망병의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돼지 고기를 한 끼 톡톡히 먹이라고 일렀습니다. 포승줄로 억지로 동여매서 붙잡아 와서 어찌 부부가 될 수 있고 같이 혁명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가 내가 시키는 대로 했기에 우리는 서로를 잘 알게 되었습니다. 익숙하지 못한 것이 많았었지만 지금은 서로 너무 익숙합니다』

毛澤東은 또 이 자리에서 세상 일이란 항상 兩面性(양면성)이 있게 마련이고, 그 양면의 대립성과 통일성에 대해 자기 나름의 생각을 피력하기도 했다.

『차 한 잔, 담배 몇 개비면 됩니다. 君子(군자)들 사이의 사귐은 물처럼 담담하고, 술로 사귄 친구는 믿음직하지 못합니다. 우리 일부 동지들은 술로 친구 사귀기를 즐기는데, 그래도 이 일은 괜찮습니다. 세상 일이란… 언제나 두 측면을 갖고 있게 마련입니다. 廉潔(염결)이 있으면 반드시 貪汚(탐오)가 있고, 탐오가 있으면 또 염결이 있는 법입니다. 염결만 있고 탐오가 없어도 안 됩니다. 이 손은 염결이고 이 손은 탐오인데 이게 바로 「對立物(대립물)의 통일」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일이란 모두 대립물의 통일입니다… 오늘 적잖게 말을 했는데 이만 그칩시다』

毛澤東의 말이 끝나자 주은래가 일어나 큰소리로 제안을 했다.

『한 가지 건의를 하겠습니다. 「3大 규율 8항 주의」란 노래의 제1절을 함께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毛澤東이 손뼉을 치며 찬성했다.

『그래요. 그 대목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8항 주의가 있는데, 첫 번째로 말을 친절하게 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로 주의할 점은 軍閥(군벌) 작풍을 근절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 모두 만년의 절개를 지켜가야 합니다. 등소평 동지가 지휘하기로 합시다. 소평 동지, 모두 동지의 지휘를 받겠소』

등소평이 손을 내저으며 사양한다.

『아닙니다. 총리께서 지휘를 맡으시는게 좋겠습니다』

주은래 역시 다급하게 사양의 뜻을 밝힌다.

『아니, 아닙니다. 주석께서 지휘하셔야 합니다』


建軍기념일 반란사태


毛澤東이 흔쾌히 지휘를 맡겠다고 나섰다. 그는 힘겹게 일어서서 몇 구절 가사를 흥얼거리더니, 그의 큰 손을 휘둘렀다. 주덕, 주은래, 엽검영, 등소평… 문자 그대로 중국 공산혁명의 별들이 이제는 「역전의 용사」들이 되어 다시 모여 젊은 시절의 노래를 합창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날 1973년 12월21일은 문화대혁명의 照明燈(조명등)이 서서히 꺼져가는 시기였다. 거꾸로 말하면 그날을 계기로 조명등의 불빛이 천천히 照度(조도)를 조절해 가고 있었다고나 할까.

「南昌起義」의 날짜를 기념하여 제정된 이 「8·1 건군절」이 하마터면 문화대혁명 기간 중에 완전히 뒤엎어져서 역사 속에 매몰될 뻔했다. 1967년이면 全 중국이 문화혁명의 열기와 광기에 휩쓸려 있을 때이다. 날씨조차 싸늘한 2월4일, 아침부터 남창市의 중심 광장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10만의 군중이 되었다. 「8·1 건군절에 대한 역사적인 오류를 바로잡는」 대규모 군중대회가 열린 것이다.

가장 신성한 毛澤東 주석이 영도하고 일으킨 「9·9 추수기의」가 있는데, 어떻게 총리인 주은래가 영도한 「8·1 남창기의」 기념일이 건군절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모주석 만세!」는 있어도 「주총리 만세!」는 없지 않은가? 「8·1의 역사적 오류」를 「9·9의 역사적 진실」로 바꾸어야 한다…이렇게 군중들은 외치면서, 남창 시내의 「8·1」이 들어가 있는 모든 공공건물과 장소의 사용을 금지하고, 「남창 8·1기의 기념관」도 초대소나 식당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들고 일어났다.

남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어처구니없는 「건군기념일 반란사태」를 毛澤東이 알게 된 것은 毛澤東의 上海(상해) 출장에 수행하고 있던 해방군 대리 총참모장 楊成武(양성무)의 보고에 의해서였다.

양성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주석님. 지금 어떤 사람들은 8월1일을 건군절로 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8·1」이라는 軍 휘장도 없애려고 합니다. 남창뿐만이 아니고 北京 등 여러 도시에서 이같은 소리들을 떠들어대고 있습니다』

毛澤東이 이상하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묻는다.

『그건 왜요?』

『그들은 毛주석께서 영도하신 「추수기의」의 기념일인 9월9일을 건군절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그들은 남창기의 때 내걸었던 것이 국민당 군대의 깃발이고,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이름으로 영도했기 때문에 결국 국민당이 일으킨 기의나 다름없다고 말합니다. 대신 추수기의는 완전히 毛주석께서 영도한 순수한 공산당 영도하의 기의이며…』

『헛소리!』


『무슨 놈의 「9·9建軍節」이란 말인가』


毛澤東이 양성무의 말을 가로막는다.

『무슨 놈의 「9·9 건군절」이란 말이오? 말도 안 될 소리. 그들은 몰라도 너무 모르오. 남창기의가 먼저고, 추수기의는 그 후란 말이오… 그리고 두 번의 기의는 다 黨에서 결정해서 일으킨 것이란 말이오. 내가 黨에서 파견되어 추수기의를 일으켰다면 주은래 역시 黨의 파견을 받아 기의를 영도했단 말이오』

『…』

『우리는 역사 유물주의자들이오. 추수기의를 일으킨 그날을 건군절로 한다는 건 역사의 진실에 어긋나는 것이고 역사유물주의 관점에 맞지 않는 거요』

『…』

『받아 적으시오. 내가 말하는 걸』

양성무가 필기도구를 가져오자 毛澤東이 말을 이었다.

『이 일은 1933년 중화소베트공화국 임시정부에서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반란파들은 역사를 모르고 행동하고 있다. 남창기의는 전국적인 것이고 추수기의는 地域的인 것이다… 8·1절이 멀지 않다. 올해의 건군절 招待會(초대회)는 규모를 기왕의 것보다 더 크게 한다. 老元帥(노원수)들을 모두 초청한다』


毛澤東에 대한 중국인들의 평가


중국 사람들에게 다시 毛澤東 시대에 살고 싶으냐고 물으면 백이면 백 사람이 고개를 젓는다. 오늘의 이 윤택한 삶과, 그러한 삶에 대한 모처럼의 기대와 희망을 함부로 포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나간 그 시대엔 그래도 무언가 활기가 있었고, 순수한 열정이 있었고, 부패나 貧富差(빈부차)를 용납하지 않는 엄격함이 있었다고들 말한다. 다같이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一體感(일체감)과, 평등, 사회적 정의 같은 것이 그래도 그 당시의 사회 저변에는 깔려 있었다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1993년은 毛澤東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그 해가 다 저물어 가는 12월20일, 고향 소산에서는 큰 행사가 있었다. 毛澤東의 銅像(동상) 제막식이었다. 중산복 차림의 미소를 머금은 毛澤東의 거대한 동상이 江澤民(강택민) 주석이 참석한 가운데 제막되었다. 9라는 숫자를 상징하는 듯 아홉 개의 계단이 있고, 그 위에 동상 높이 6m, 대리석으로 된 좌대가 4.1m, 총 10.1m 높이의 毛澤東 동상이 소산의 높은 산자락을 배경으로 세워졌다.

필자는 호남성의 省都(성도)인 長沙(장사)에 갔었다. 1998년 1월16일, 정강산으로 가기 며칠 전이었다. 먼저 毛澤東이 다녔다는 장사 제1사범학교부터 찾았다. 시내버스에 올라타고 가까운 정거장에서 내려 조금 걸어가니 아담하고 정갈스런 옛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제1사범이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밖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넓었고 현대식 건물도 여러 개가 들어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웅장하고 古風스런 분위기에 공원같이 아름다운 학교였다.

낯선 이방인이 들어서도 제지하는 사람도 없었다. 복도를 걸어도, 전시실을 자유롭게 다녀도, 『당신 누구요』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학생 몇몇이 나서서 자청해서 학교를 안내해 주었다. 학생 식당에서 점심까지 사 먹으며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현재 재학생 수는 2000여 명. 호남성의 가장 우수한 교사진이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자랑했다. 학생들 역시 毛澤東의 직계 후배라는 긍지가 대단했다.

毛澤東이 책벌레이며, 별명이 「時事通(시사통)」이었다는 것도 거기서 처음 들었다. 사범학교 학생 毛澤東이 세계지도와 영어사전과 노트북을 늘 끼고 다녔었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毛澤東은 소년 시절부터 호남성의 좁은 소산에서 뛰쳐나오고 싶어했고, 큰 도시인 장사에서 공부하면서도 중국 전체와 중국 밖의 더 넓고 큰 세계에 대한 憧憬(동경)과 갈망이 컸던 것 같다. 자연히 그는 바깥 소식과 정보를 전해주는 신문이나 잡지류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다.

정강산 혁명열사기념당 전시실에서 바깥으로 나오면 오른쪽에 열사들의 얼굴 조각과 입체 동상들을 모아 놓은 雕塑園(조소원)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유난히 눈에 띄는 젊은 여인의 全身像(전신상)이 하나 있었다. 전신상이긴 하나 완전한 立像(입상)은 아니고, 무릎 부위 윗부분만 좌대에 올려져 있는 하얀 대리석 조각이었다. 강인한 눈빛으로 먼 하늘을 바라보는 젊은 여인, 길다랗게 땋은 머리다발이 앞가슴으로 흘러내리고 있는 조각작품의 여인 앞으로 다가서니, 「賀子珍(하자진)」이란 이름이 조각 좌대에 새겨져 있었다. 毛澤東의 두 번째 부인이다.


毛澤東의 신문 구해오기


하자진의 회고에 따르면, 毛澤東은 정강산 시절, 신문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정강산에 대한 중국 국민당군의 봉쇄가 아주 철통 같았던 것이다. 당시 상해에서 발행되던 「申報(신보)」라는 신문을 한 달이 지나서야 겨우 구해볼 수 있었다고 한다. 毛澤東은 부하를 변장시켜 인근의 도시와 읍 근처로 특별히 보내서 소상인들과 접촉하여 비싼 값으로 신문을 사 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부하들을 敵陣(적진)으로 침투시켜 신문을 빼앗아 오기도 했다. 1929년 홍군은 감남 지방과 민서 지방으로 진군한 뒤에도 그러한 방법으로 신문을 구하고 있었다.

한 번은 하자진 자신도 이 신문 노획 작전에 참가하였었다. 宋裕(송유)란 사람과 두어 명이 瑞金(서금)으로 가서 신문을 빼앗아 오기로 했는데 하자진도 동행했던 것이다. 그녀는 서금성을 공격하여 縣(현) 정부에 돌진해 들어갔다. 국민당 정부의 「中央日報」와 상해, 광동, 복건, 강서의 지방 신문들을 큰 보자기에 싸서 가져온 그녀를 毛澤東이 어느 사당의 문간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 묶음의 신문을 손에 든 毛澤東이 감격해서 『이토록 많은 정신의 양식을 나는 어떻게 먹을 수 있을까?』라고 외쳤다고 한다.

사숙 공부를 끝내고 毛澤東은 1910년 신식 학교라는 湘鄕(상향) 동양소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 학교는 아직도 經書(경서)만을 다룰 뿐, 신식 학과를 가르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毛澤東은 학교의 작은 도서관에 가서 혼자서 「新學(신학)」을 공부한다. 주로 역사와 문학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그는 친구인 肖子昇(초자승)으로부터 「세계영웅호걸전」을 빌려 읽었는데, 워싱턴, 링컨, 나폴레옹, 피터 大帝(대제), 루소, 몽테스키외 등 서양 영웅들의 생애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는 빌린 책이라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책에다 마구 줄을 긋고 방점들을 찍으며 흥미 있어 했다. 그는 독후감에 이런 말도 남겼다고 한다.

『중국 또한 이와 같은 인물들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베트남과 朝鮮(조선)과 인도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毛澤東이 한반도의 역사와 운명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발언일지도 모르겠다.

이 무렵 그는 嚴復(엄복)이 번역한 세계의 명저들을 많이 읽었었다고 한다. 아담 스미스의 「國富論(국부론)」, 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헉슬리의 「天演論(천연론)」, 밀의 「논리학」, 젱크스의 「정치학사」, 예본스의 「논리학 입문」 등과 다윈의 「種(종)의 기원」에 관한 이론서들이었다.


司馬光의 「자치통감」에 감명받아


새로 지은 北京대학 도서관에 가보면 국내외 인사들의 흉상들이 복도와 로비에 세워져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이색적인 인사로는 인도 詩人 타고르가 있고, 北京대학 초대 교장이었던 엄복(1853~ 1921년)의 흉상도 새로 만들어져 있다. 엄복은 유명한 학자이며 유수한 번역가였다. 복건성 출신으로 계몽사상가였던 엄복은 최초로 영국 유학을 다녀온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위의 「천연론」, 「국부론」, 「법의 정신」 등 서양의 명저들을 중국의 청년과 지식인들에게 소개하였다. 北京의 민족출판사가 1999년 7월에 펴낸 「影響中國歷史100名人」이란 책에는 엄복이 100명의 역사적 명인 속에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이 책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최근의 중국 지식인들의 역사에 대한 視角(시각)의 한 단면을 엿볼 수가 있다. 10명씩 묶어 총 10편으로 되어 있는데, 제1편엔 黃帝(황제), 공자, 毛澤東, 등소평 등이 있고, 제2편엔 李世民(이세민), 朱元璋(주원장), 孫中山(손중산), 蔣介石(장개석) 등이 들어 있다. 장개석 편의 표제는 「통일민국을 건립한 장개석」으로 되어 있다.

제4편엔 굴원, 사마천, 이백, 두보, 사마광, 소동파, 양계초, 노신 등 역사가와 문인, 제7편엔 주희, 엄복, 진독수 등과, 제10편엔 관우, 제갈량, 악비, 채원배 등이 등장한다. 끝으로 부록으로 10명의 지탄받을 대표적 인물을 소개하고 있는데, 은나라의 紂王(주왕), 수나라의 煬帝(양제), 慈禧太后(자희태후), 秦檜(진회), 趙高(조고), 董卓(동탁)과 袁世凱(원세개) 등이 중국에 해를 끼친 못된 인물로 꼽히고 있었다.

장사에 있는 호남 제1사범학교에 毛澤東이 들어간 것은 1913년, 그의 나이 스무살 때였다. 1918년 여름, 그가 이 학교를 졸업하기까지의 5년간은 중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격동과 변화가 컸던 시기였다. 재학 중에 그는 역사와 문학, 철학 등에 특별한 흥미를 보였는데, 평생을 두고 존경하는 선생님들을 만나는 행운도 가질 수 있었다. 袁仲謙(원중겸)이라는 漢語(한어) 선생이 있었다. 그는 古文(고문)을 매우 중시하여 毛澤東에게 고문을 많이 읽도록 지도했다. 毛澤東은 「詩經(시경)」과 「楚辭(초사)」 등을 열심히 읽었고, 韓愈(한유), 柳宗元(유종원), 蘇軾(소식) 부자 등 唐宋(당송) 8대가의 詞文(사문)도 구해 읽으며 古文을 익혔다. 역사 과목에도 관심이 컸던 그는 학교 수업 후에도 유명한 史書(사서)들을 찾아 읽었다.

그런 그에게 司馬光(사마광)의 「資治通鑑(자치통감)」은 눈이 번쩍 뜨이는 책이었다. 北宋(북송)의 사마광(1019~1086년)이 쓴 이 방대한 史書(사서)를 毛澤東은 열일곱 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후에 毛澤東은 「자치통감 評釋(평석)」을 써서 이 책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과 해박한 지식을 세상에 알렸는데 매우 높은 수준의 勞作(노작)이라는 말을 듣고 있다.

毛澤東은 사마광이 불우한 환경을 극복하여 이 역사적인 저술을 완성한 것을 높이 평가하였다. 1975년에 毛澤東은 마지막까지 그의 신변을 돌보았던 孟錦雲(맹금운)과 이야기하면서 이러한 면을 특히 강조하였다.

『중국에는 두 개의 大作(대작)이 있다. 「史記」와 「통감」이다. 두 작품은 모두 재간을 지닌 사람이 정치적으로 불우한 처지에서 편찬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람이 타격을 받고 어려움에 처해졌다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재간과 뜻이 있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두 가지를 갖추지 못한 사람은 타격을 받으면 의기소침해지거나 마구잡이가 되고 만다. 심지어 자살까지도 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맹금운의 회고에 따르면, 毛澤東은 晩年(만년)에 침대 머리에 늘 「자치통감」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너무 많이 읽어서 책이 너덜너덜해졌으며, 적지 않은 페이지는 투명 반창고로 붙여놓기까지 하였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반나절인데, 지치면 몸을 고쳐 앉으며 또 몇 시간이나 通鑑을 읽었다. 어느 날, 毛澤東은 점심 식사를 끝내고 대청의 소파에 한가하게 기대어 앉았다. 맹금운이 보기에 오늘은 책을 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毛澤東이 맹금운을 향해 빙그레 웃으며 책상 위의 「통감」을 가리키며 묻는 것이었다.


政見 다르다고 학문마저 부인해선 안 돼


『孟부자. 내가 이 책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아시오?』

毛澤東은 맹금운이 대답할 겨를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열일곱 번을 읽었소. 읽을 때마다 새삼스레 수확을 얻곤 하오. 정말 보기 드물게 훌륭한 책이오. 아마 이번이 마지막 한 번일지 모르겠소. 읽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럴 겨를이 없단 말이오』

毛澤東은 맹금운에게 자치통감을 해설해 놓은 책을 주면서 읽어보라고 권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두 사람은 「통감」을 놓고 많은 얘기를 하였는데, 하루는 맹금운이 몹시 궁금했던 것을 하나 물었다.

『王安石(왕안석)과 사마광은 敵手(적수)이면서 친구였다고 하는데 어찌된 영문입니까?』

『두 사람은 정치면에서 적수였소. 왕안석은 改革(개혁)을 주장했고 사마광은 이를 반대하였지요. 그러나 학문에서는 좋은 친구로 서로 존중하였소. 그들이 존중한 것은 상대방의 학문이었소. 우리는 이것을 배워야 한단 말이오. 政見(정견)이 다르다고 해서 학문마저 부인해서는 안 되지요』

그러면서 毛澤東은 그 자신의 적수에 대해서도 말을 꺼내어 맹금운을 놀라게 한다.

『나에게도 정치면의 적수가 있는데, 난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소. 그러나 그들의 학문은 존중하지요. 적어도 승인은 해야 하는 거지요』

『주석 동지께도 적수가 있다구요? 그건 과거의 일이겠지요. 지금에 어디 적수가 있습니까?』

『적수가 없다니, 맹부자, 어떤 때엔 당신이 바로 나의 적수요. 억지로 내게 약을 먹이니, 이게 적수가 아니고 무엇이오? 정치 적수가 아니라 생활 적수란 말이오』

『제가 어찌 감히 주석님과 맞서겠습니까? 주석님의 고집을 누가 이기겠습니까?』

『고집을 말할라 치면 사마광을 들 수 있소. 마음먹은 일은 꼭 해내고야 말지. 고집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니지요. 그러나 학문하는 데에는 이런 정신이 필요하단 말이오. 오락가락하는 사람보다는 나은 법이지요. 그러나 옳고 그른 것도 다 바뀔 때가 있는 법이오. 그 당시엔 옳은 것도 몇해가 지난 후엔 꼭 옳다고 할 수 없는 것도 있지요. 마찬가지로 그 당시엔 틀렸다고 했던 것이 몇 해 뒤엔 반드시 틀린 것만은 아니게 되는 경우도 있소. 때문에 무슨 일이나 급히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오. 역사가 공정한 평가를 내릴 것이니 말이오』


北京大 도서관 직원 시절


毛澤東이 李大(이대소)를 만난 것도 운명이었다. 양창제의 소개로 당시 북경대학의 도서관장으로 있던 이대소를 알게 되어 그의 추천으로 毛澤東은 북경대학 도서관의 직원이 되었다. 1918년 8월, 그가 장사 제1사범을 졸업한 얼마 뒤의 일이었다. 생전 처음의 北京 길이었다. 북경대 도서관은 독서광이라 할 毛澤東에겐 더할 수 없이 좋은 직장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중국 정황은 그를 그 자리에 오래도록 붙잡아 둘 수 없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듬해 4월 毛澤東은 고향인 호남으로 갔다. 이어 중국 천지를 뒤흔든 5·4 운동이 일어나자 毛澤東도 이 열풍에 휘말린다.

1921년 7월,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 대표대회가 열렸는데 이대소, 진독수 등이 산파역을 맡았다. 이 역사적인 모임에 毛澤東이 참석하여 창당 멤버가 된다. 이들은 중국 내의 모든 좌경 단체들에게 초청장을 보냈으나 참석한 사람은 13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나마 경찰에 쫓기는 형편이 되어, 버려진 거룻배 하나를 구해서 江上(강상)대회를 치렀다. 이날의 대표대회에는 장사의 毛澤東, 何叔衡(하숙형), 北京의 張國燾(장국도), 劉仁靜(유인정), 무한의 董必武(동필무) 등이 참가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毛澤東은 호남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해 온 지방 공산주의 운동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날의 창당대회에 참석함으로써 그는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먼 뒷날 중국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정통성과 역사성을 부여받게 된다. 3년 뒤에 그는 국민당 제1차 全國대표대회에서 24명의 중앙집행위원에는 선출되지 못했으나 17명의 후보위원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 당시는 國共(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때라 毛澤東도 중공당의 직책과는 별도로 중국 국민당의 삿갓도 같이 쓰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스승 李大와의 만남


1924년 毛澤東은 중공 중앙 조직부 부장이 되는데 1925년엔 국민당 중앙 선전부의 대리 宣傳部長(선전부장)직을 맡았고, 1926년 1월의 국민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다시 중앙집행위의 후보위원으로 선출된다. 그는 그해 7월부터 국민당의 중앙농민운동강습소의 소장으로 활동하는 한편으로 11월부터 중공당의 농민운동위원회 서기직을 맡는다. 1927년 6월에는 중공 호남성 黨委의 서기로 선출된다.

毛澤東과 주은래 등 많은 공산주의 지도자들이 공산당원이면서 국민당 당원으로 있었던 사정을 좀더 명확하게 알기 위하여서는 이대소의 다음 성명서를 읽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1923년 손문과 소련의 애드리프 요페의 공동성명으로 국민당의 聯蘇容共(연소용공)이 공식화되자 공산주의자로서 제1차로 국민당에 입당한 사람이 이대소였다. 그의 뒤를 이어 많은 공산당원들이 차례로 국민당에 입당했다. 毛澤東은 1949년 北京 입성 직전 맨 먼저 이대소를 회고했다.

『30년이 지났군요. 30년 전에 나는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인생의 쓴맛도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운 좋게 北京에서 훌륭하신 선생님 한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대소 동지였습니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그분은 이미 혁명을 위하여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는 나의 참되고 훌륭한 스승입니다. 그의 가르침과 교화가 없었더라면 나는 오늘도 어디로 가야만 할지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잦은 지방 출장의 의미


毛澤東은 이대소가 주선해 들어간 北京大 도서관 생활을 잘 활용하였다. 도서관이라는 좋은 학습환경을 충분히 살려서 보고 싶은 책을 실컷 읽을 수가 있었고,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대소와 만나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의 가르침을 받는 일이었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지식과 신념도 이대소를 통하여 그에게 전수되고 심화되어 갔다. 毛澤東은 『나는 이대소 밑에서 北京大 도서관의 직원으로 일하면서 마르크스주의 방향으로 급속히 발전되어 갔다』고 회고하였다.

1924년 1월, 毛澤東도 참석하였던 중국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이대소는 손문의 배려로 대회 主席團(주석단)의 한 사람이 된다. 그리고 대회 선언문과 국민당 규약 초안심의에 참여하며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된다. 毛澤東은 후보위원이 된다. 이대소는 국민당 北京집행부가 성립되자 조직부장직을 맡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최후는 비참하였다. 동북 군벌 張作霖(장작림)에 의해 희생된 것이었다. 1927년 4월6일에 그는 장작림 軍에 체포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혹형과 회유에 이중적으로 시달렸는데, 끝내 굴하지 않았다. 옥중에서 이대소는 자신의 혁명 일생을 회고하고 변함 없는 그의 혁명 의지를 표명한 「獄中自述」이란 책을 쓰기도 하였다. 체포된 지 20여 일 만에 그는 전격적으로 비밀리에 처형되었다. 이대소의 나이는 서른여덟이었다. 1983년 北京 香山(향산)에 이대소 열사능원이 만들어졌다. 북경대학 구내에는 이대소의 반신상 동상이 서 있는데, 이것은 北京大 졸업생들의 모금으로 세워진 것으로 유명한 조각가 傅天仇(부천구) 교수의 작품이다.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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