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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종교, 사상

[스크랩] 동양사상사

동서인문고전강좌 - 동양사상사

김교빈 성천아카데미 고전강좌 / 호서대 철학과 교수


차 례

1. 동·서양 사유방식의 차이와 유·불·도 삼교의 특징
2. 유교란 무엇인가 - 사람답게 사는 길
3. 도가·도교란 무엇인가 - 道의 세계
4. 불교란 무엇인가 - 해탈의 세계

 


1. 동·서양 사유방식의 차이와 유·불·도 삼교의 특징

1) 동·서양 전통문화와 사유방식의 차이

21세기는 '문화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교통과 통신의 발달이 지구를 한 마을 단위로 좁히면서 나라들 사이의 경제전쟁이 더욱 심해져가고 있지만 더 심각한 전쟁은 지금도 치루고 있고 앞으로 더욱 강화될 문화전쟁이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민족단위 국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 강화하는 길은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보존 확산하는 데 달려있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경우 문화의 기반은 그 속에 담긴 종교와 사상이며 따라서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다시금 자신들의 종교나 사상을 강화해 가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18세기 이후 서양이 동양을 압도해 오면서부터 동양 여러 나라들의 문화와 사상은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비과학적이라는 비판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평가의 기준 잣대는 서구의 문화와 사상이었으며 그같은 시각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부른다. 물론 서구적인 시각에 오래 길들여진 우리 자신도 이러한 시각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서구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이 가져온 인류문명의 위기는 동양의 문화와 사상을 보는 이같은 시각을 여러 각도에서 반성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구자본주의가 파생시킨 도덕적 타락과 인간성 상실, 환경 오염으로 대표되는 생태학적 위기 등이 서구문화와 그 근간을 이루는 서구사상을 되돌아보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위에 근대 이후 서구의 주도권에 눌려 있던 동양의 여러 나라들이 국가간의 냉혹한 경쟁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고유문화와 사상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도 또 다른 원인이 되고 있다.

사실 서양인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까지도 동양의 문화와 사상이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던 사실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동양이 추구한 이상적 인간형인 聖人이나 그 성인이 추구하는 道는 결코 주관적이나 신비한 것이 아니라 아주 현실적인 것이었다. 물론 동양철학에 신비적이고 주관적인 탐구 방법을 추구한 경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요소는 서양철학에도 얼마든지 있었다. 따라서 동양에 대한 오해는 문화적 차이를 잘못 이해한 데서 온 것이다. 예를 들어 달력을 보자. 우리의 전통력은 태음태양력이었다. 태음은 달을 뜻하고 태양은 해를 뜻한다. 특히 전통력의 '24절기'는 태양의 움직임을 알 수 있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농사짓는 일에는 아주 정확히 들어맞았다. 따라서 전통력이 양력에 밀려난 것은 과학성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문화적인 차이 그 근본 이유였다. 현재의 양력보다 더 정확한 '세계력'이 1954년 유엔에 상정되었지만 강대국들의 종교적 전통 때문에 채택되지 못하였다는 사실은 그런 점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동양과 서양은 어떠한 문화적, 사상적 차이가 있으며, 그 근본 원인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씨앗은 같아도 토양이 다르면 꽃과 열매가 달라지는 것 처럼 환경이 다르면 모습 뿐만 아니라 생활양식과 사유체계까지도 달라진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동양과 서양은 그 중심 문화를 이루게 된 자연적 배경이 달랐고 그에 따라서 서로 다른 문화를 이루어 갔다. 그러한 문화의 뿌리는 서양의 경우 게르만으로 대표되는 유목문화였고, 동양의 경우는 황하로 대표되는 농경문화였다. 이같은 차이가 첫째로는 가족제도에서 가부장적 윤리를 중심으로 한 종적윤리와 부부 중심의 횡적 윤리라는 차이를 낳았으며, 사회적으로는 자본주의 단계로의 이행이 쉬웠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의 차이를 낳았다. 둘째로는, 자연에 대한 이해에서 자연을 극복 또는 이용 대상으로 보는 것과 합일 대상으로 보는 차이를 낳았다. 이런 점은 동양의 자연이 최고의 대상으로서 완전성을 상징했다면 서양의 Nature가 그 속에 미개 또는 원시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차이로 나타나기도 한다. 셋째로는 종교적으로 내세와 창조를 말하는 서구적 세계관과 현세중심의 동양적 세계관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넷째로는 기계론적 세계관과 유기체적 세계관의 차이로 드러난다. 기계론적 세계관은 데카르트와 뉴튼 이래 인류를 발전시켜 온 세계관으로서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분리해서 보는 사고이다. 하지만 동양의 세계관은 이와 달리 내적·유기적 연관을 강조하면서 대상 전체를 한 덩어리로 보려는 상관적 사고로 나타났다. 이러한 동양적 관점은 의학과 예술에 잘 나타나 있으며 특히 이러한 특징을 잘 볼 수 있는 개념이 氣이다.

2) 유·불·도 삼교의 특징

이러한 동양적 특징을 잘 담고 있는 사상들이 유교·불교·도교이다. 이 세 가지 사상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는데 유가·불가·도가라고 할 때는 제자백가의 '가(家)'와 마찬가지로 학파라는 뜻이 강하다. 이와 달리 유교·불교·도교라고 부르는 경우는 종교적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교(敎)'의 순수한 의미 그대로 성인의 가르침이라는 뜻이 더 강하다. 특히 이 경우 유교에는 내세에 대한 관심이나 신앙 대상, 신자들의 집단 같은 개념이 없다. 이밖에 유교의 학문적 성격을 강조하여 유학이라고도 부르며, 도가와 도교를 구분하여 도가는 노장사상을 가리키고 도교는 한대 이후 종교화한 부분을 가리키는 것으로 나누어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유교가 정치·경제·사회·교육 등에 영향을 미쳤다면 불교는 종교와 예술에 영향을 끼쳤고 도교는 천문·지리·의학 같은 과학 방면과 예술에 영향을 주었다.

먼저 세 사상의 성립과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유가사상의 큰 틀은 공자가 만들었으며 그 뒤 많은 사상가들이 시대적 요구에 맞추어 이론을 보완하였다. 하지만 공자 자신은 요(堯)·순(舜) 이래의 옛 사상들을 정리하였을 뿐 새로운 것을 만들지는 않았다고 하였다. 그 말대로 공자는 은(殷)나라의 상제(上帝) 관념, 주(周)나라의 천명(天命)사상과 예의 제도 등을 이었으며, 요·순·우(禹)·탕(湯)·문(文)·무(武)·주공(周公)의 사상을 종합한 것이다.

유가의 첫 번째 특징은 인본주의이다. 이 점은 천(天)에 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바꾼 공자에서 시작된다. {논어} [선진(先進)]편에서 공자는 자로가 죽음에 대해 묻자 "사람답게 사는 것도 아직 다 모르는 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고 하였고, 다시 귀신 섬기는 법을 묻자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 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고 하였다. 이처럼 공자의 관심은 살아있는 사람이었으며 그 사람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인(仁)으로 표현하였다. '인'이란 사람다움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임금과 신하, 부모와 자식, 형제, 남편과 아내, 친구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공자는 도(道)에 대해서도 {논어} [위령공(衛靈公)]편에서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 {중용}에서는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한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유가의 도는 인도(人道)인 것이다. 이같은 생각을 이어 받은 맹자는 사람다움의 실현 근거로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순자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였다. 그 뒤 성리학자들은 만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존재를 인간이라고 보았고 양명학 또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유가의 두 번째 특징은 도덕 지향이다. 유가는 인간의 욕구 가운데 도덕 욕구만을 인정하고 사적인 이익 추구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래서 공자는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데 밝은 사람은 군자이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데 밝은 사람은 소인이다"라고 했으며, [헌문(憲問)]편에서는 "이익될만한 일을 보거든 옳은가 그른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하였다. 맹자는 이러한 생각을 이어서 인간의 도덕심과 자연 법칙을 일치시키고, 생리적 욕구를 제외한 4단만을 인간의 본질적 요소로 인정하였다. 또한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도 생리적 욕구를 극복하고 도덕적 실천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이같은 흐름은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중심으로 한 성리학의 수양론으로 이어졌다. 특히 성리학은 만물의 본질을 리(理)로 규정하고 그 리를 도덕법칙으로 이해하였으며, 인간의 본성 또한 리라고 함으로써 도덕적 인간 주체를 확립하였다. 이같은 유가의 입장은 부도덕한 것이나 비도덕적인 것에 대한 강한 반발로 나타난다.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비판한 것이나 성리학자들이 불교와 도교를 비판한 것이 모두 이같은 관점에서 나왔다.

유가의 세 번째 특징은 강한 사회성이다. 유가의 이상적 인물은 자신의 도덕성을 사회에 온전히 드러낸 성인이었다. 공자는 {논어} [옹야(雍也)]편에서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다면 인(仁)하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자공의 질문에, "어찌 인(仁)이라고만 하겠는가. 반드시 성(聖)의 경지일 것이다. 요순도 그렇지 못할까봐 걱정하였다"고 답하였다. 이처럼 공자의 목적은 사회적 실현에 있었으며 그래서 공자 또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돌아다닌 것이다. "아침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혔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는 말 속에 공자의 강한 사회적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유가는 항상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녔으며 그 기준은 {대학}이었다. {대학}은 자신이 가진 밝은 덕을 밝히고 나아가 백성을 새롭게 함으로써 완전한 사회를 이룬다는 세 가지 강령(綱領)을 제시하였다. 이같은 생각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이나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논리로 나타났으며, 그래서 정치·경제·사회·교육 등에 중심적인 이론 근거가 되었다. 또한 이같은 생각은 언제나 지식인으로서 세상을 걱정하는 우환의식으로 남았고 그 결과 관료 지향의 병폐를 낳기도 하였다.

다음은 도가사상을 보자. 도가 사상가로는 양주·노자·장자·열자 등이 꼽히는데 한나라 말에는 이를 바탕으로 한 도교가 나왔다. 도가의 시작은 노자 {도덕경}이지만 노자는 실존 인물이 아니다. 또한 도가와 도교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도가사상을 원용하여 성립한 것이 도교라고 본다. 도교는 우길(于吉)이 태평도(太平道)를 창시하고 장도릉(張道陵)이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만들면서 시작되었는데, 두 사람은 모두 {도덕경}을 중요 경전으로 받들고 신선사상과 무속신앙 등을 포괄하였으며,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 따 도교를 만들었다.

도가의 첫 번째 특징은 인본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대부분의 사상이 인간을 중심에 둔 것과 달리 도가는 모든 불행과 혼란이 인간 중심주의에서 온다고 보았다. 이같은 입장은 {도덕경}에서 "하늘과 땅이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고 한 말이나, 장자가 [제물론(齊物論)]편에서 만물이 똑같다고 한 주장에 잘 나타난다. 노장에서 말하는 도의 작용은 변화이며 만물은 다 변한다. 따라서 인간이 변화에 순응하여 만물과 하나 되는 것이 도를 얻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간을 만물의 주인으로 보는 것은 잘못일 수밖에 없다. 이같은 입장은 주관을 버리고 사물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것을 강조함으로써, 의학을 포함한 자연과학 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자연 법칙에 따르는 것이 완전성을 얻는 길이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생각을 도교에 적용한 것이 연단술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파악이 곧 천체에 대한 관측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천문학의 발전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도가의 두 번째 특징은 도덕 지향에 대한 부정이다. {도덕경}에서는 도를 다듬지 않은 통나무에 비유하고 통나무를 자르고 깎는 인위적 행위를 통해 물건을 만들듯이 도가 무너져서 생긴 것이 예의 도덕이라고 보았으며, 그러한 시비판단의 결과를 절대화시킴으로써 분쟁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지혜나 인·의·예·지 같은 도덕을 반대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백성들을 자연에 맡겨 두는 무위(無爲)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 점은 장자도 마찬가지이다. 장자는 인간이 만물을 구분하는 근거가 도덕 판단에 있으며, 도덕 판단은 사물을 갈라보는 구분의식에서 나오고, 구분의식은 궁극적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가르는 데서 온다고 보았다. 그리고 현실의 법과 제도를 비롯한 모든 도덕적 규제는 자신의 관점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획일화한 것이며, 이것이 고통과 비극을 가져오는 고삐와 멍에라고 보았다. 이같은 도덕에 대한 반대는 유가사상에 대한 부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후대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더불어 도가사상을 가장 중요한 비판대상으로 삼았다.

도가의 세 번째 특징은 평등 지향이다. 도가는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며 만물은 같다는 입장에 서 있다. {도덕경}에서는 "나쁜 일에 좋은 일이 덧붙어 있고 좋은 일 속에 나쁜 일이 숨어 있으며, 덜어내는 일이 오히려 보태는 일이고 보태는 일이 곧 덜어내는 일"이라고 하였다. 장자 또한 삶과 죽음, 꿈과 생시, 아름다움과 추함, 옳고 그름을 모두 한 가지로 보았고, 학의 긴 다리와 오리의 짧은 다리 가운데 어느 하나를 기준 삼아 다른 쪽을 늘이거나 자를 수 없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어느 하나 다른 것보다 못한 것이 없으며, 쓸모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까지도 다 각각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가난한 사람과 돈 많은 사람,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오래 산 사람과 일찍 죽은 사람이 모두 같다는 입장으로 나타났으며, 계급질서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이같은 생각이 노자나 장자에서 적극적인 실천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황건의 난' 같은 역사상 많은 농민 봉기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도가의 네 번째 특징은 개인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이다. 노자와 장자는 사회적 명성보다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데 애썼다. 특히 {도덕경}에서 보인 처세의 지혜가 장자에서는 내면의 수양을 통한 절대적 삶의 획득이라는 문제로 바뀌어 갔다. 임금의 부름을 받고서 화려하게 사당에 모셔지기 보다 진흙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거북이 더 낫다고 한 대답은 바로 그러한 장자의 생각을 잘 보여준다. 이같은 경향은 현실 부정의 도피와 은둔 사상으로 이어져 위진남북조 시기 죽림칠현 같은 풍조로 유행하였다. 그들은 세상의 위선과 정치적 불안에서 벗어나 예의 법도를 가벼히 여기면서 고상한 담론과 개인 생활을 즐겼으며, 이러한 경향이 문인과 화가들의 예술정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연단(練丹)을 통해 신선이 되려고 했던 수련도교에서도 개인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다음은 불교를 보자. 기원전 6세기에 나온 불교는 인도 고유 사상 가운데 윤회설과 업설(業說), 해탈을 목표로 하는 인생관 등을 계승하면서도 계급적 인간관을 평등한 인간관으로, 신 중심의 세계관을 인간중심의 세계관으로, 고행 중심의 수행관을 중도(中道)의 수행으로, 내세적 해탈을 현세적 해탈로 바꾸었다. 그 뒤 중국에 전해져 위진남북조 시기 이후 중국화 과정을 거치면서 큰 발전을 거듭하였다.

불교의 첫 번째 특징은 연기(緣起)적 세계관이다. 연기란 이 세상 모든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다른 존재나 현상과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연(緣)에 의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함경(阿含經)}에서는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으며 이런 일이 생겼기 때문에 저런 일이 일어났다"고 하였다. 이처럼 불교는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존재 자체의 실체성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근본불교의 제법무아(諸法無我)와 대승불교의 공(空)은 모두 이러한 생각을 설명하는 개념들이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 관심은 존재론에 있을 뿐이며, 어떤 것을 절대화하는 시비판단이나 윤리적 규범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이처럼 끊임 없이 변해갈 뿐인 실체 없는 허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의 말씀에 따라 연기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해탈로 가는 길이다. 이같은 연기적 관점에서는 창조론이나 환원론이 나올 수 없다. 다만 연기에 의한 변화를 강조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넘어 끝없이 순환하는 무한 우주관을 보일 뿐이다.

불교의 두 번째 특징은 주체적 인간관이다. 불교는 해탈 가능성과 현실의 고통스러운 생활 사이의 틈이 언제나 열려 있으며, 그 실현 여부는 오직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 인간은 모두 현재의 삶에 대한 책임과 함께 능력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 삶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도 신적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만들어질 뿐이며, 자신의 행위나 생각은 반드시 그 결과가 자신에게 되돌아 온다고 한다. 인과응보나 업보, 윤회설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자신만이 자기 삶의 완벽한 주인이자 책임자이다. 그래서 해탈을 밖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찾는 것이며 이런 입장에서 불교를 자력(自力)종교라고 한다. 범아일여(梵我一如)란 내 안에 있는 불성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집착을 넘어서서 만물과 하나가 된 경지인 것이다. 이같은 생각 때문에 유가로부터 현실을 긍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 관념론적 성격 때문에 유심론(唯心論)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불교의 세 번째 특징은 평등적 세계관이다. 불교는 모든 인간이 해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만물이 윤회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모든 생명체가 해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나아가서는 만물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적 사고는 또한 깨달음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깨달은 사람을 가리켜 부처라고 하지만 이 때의 부처는 먼저 깨달은 석가모니 부처와 대등한 또 다른 부처일 뿐이다. 이같은 평등적 세계관은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할 당시 브라만교의 계급적 관점을 극복하면서 성립한 것으로서 역사적으로는 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2. 유교란 무엇인가 - 사람답게 사는 길

1) 공자와 논어

공자(孔子 기원 전 551-479)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는 중니(仲尼)이며 인류 역사에서 4대 성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힌다. 공자는 노(魯)나라에서 태어났으며 공자의 아버지는 대부 벼슬을 지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낸 공자는 20세 우렵 창고 관리와 정부의 가축을 돌보는 직책을 맡기도 하면서 춘추시대의 혼란상을 가까이서 체험할 수 있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의 장례를 치루었던 23세 무렵에 공자에게는 이미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있었다. 공자는 30대부터 제자들과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견문을 넓혔고, 50세 이후 몇 년간은 고국 노나라에서 지금의 대법관 정도에 해당하는 대사구(大司寇)를 맡아 큰 업적을 이루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웃 나라들의 방해로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없자 다시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사상을 받아줄 임금들을 찾아 다녔고, 그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제자들을 가르쳤다. 모두 일생 동안 72명의 임금을 만나고 돌아다닌 공자는 68세 무렵 고향으로 돌아와 고전과 역사 문헌을 정리하고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삶을 마쳤다.

공자가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정치가로서가 아니라 교육자·역사가·사상가·학자로서의 역할에 있다. 맹자는 바로 이 점을 중시하여 공자를 고대문화의 집대성자라고 평하였다. 공자에게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3천의 제자가 있었는데, 그 가운데 빼어난 제자만 헤아려도 72명이었다고 하며 {논어}에서는 다시 가장 우수한 제자 10명을 추려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들은 공자가 죽은 뒤 중국 전역에 퍼져 공자의 가르침을 전파하였는데, 이것이 유가사상이 중국사상의 핵심을 이루게 된 이유이다.

공자에 대한 평가는 역사상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관점이 달랐던 도가나 묵가 계열의 사상가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그 뒤 한나라에서 유학이 관학으로 채택된 뒤로는 위진 현학가들을 제외한다면 근대에 이르기까지 대체적으로 높이 받들어졌다. 그러나 서구 문물이 들어 온 근대 이후에는 신문화 운동가들의 '공자점타도(孔子店打倒)'를 시작으로 공산 혁명 과정에서는 보수 반동의 사상가로 비판 받았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비림비공(批林批孔)' 운동을 통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은 다시 신유가 사상의 부흥과 함께 중국에서도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고 있다. 이같은 사정들은 공자에 관한 기록과 평가들을 신중하게 판독하여 공자의 본래 모습과 구분해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공자가 5경을 비롯한 중국 고대문헌들을 편찬한 속에도 그의 생각이 담겨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자의 사상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책은 {논어}이다. 반고는 {논어}라는 명칭에 대해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논어는 공자가 제자들이나 당시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응답한 말과 제자들이 서로 주고 받거나 선생님께 직접 얻어들은 말들이다. 당시 제자들이 각기 적어 두었던 것을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에 의논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논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논어}는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언행을 의논하여(論) 편찬한 말(語)이라는 뜻이다. {논어}가 처음 만들어진 시기는 춘추전국시대이지만, 지금의 모습으로 다듬어진 것은 한나라 때이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통해 많은 책을 없앨 때 {논어}도 같은 운명을 겪었다. 그 뒤 제나라 지방에 남은 것과 노나라 지방에 남은 것, 그리고 공자의 옛 집 벽에 감추어 두었던 것까지 세 종류가 나왔는데, 노나라 것을 중심으로 세 책을 종합한 것이 지금의 {논어}이다. 『논어』는 모두 20편이며 각 편의 이름은 처음 나오는 문장의 앞머리 두 세 글자를 따서 붙였다. {논어}는 근대까지 동아시아 지역 모든 지식인들의 필독서였으며, 우리가 쓰는 '살신성인(殺身成仁)'이나 '극기복례(克己復禮)' 같은 대부분의 교훈적인 말들은 {논어}에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문으로 쓰인 대다수의 동양 고전들이 그렇듯이 {논어}도 많은 함축을 지니고 있으며 그 속에 담긴 공자의 중심사상이 인(仁)이다.

인은 보통 어질다는 뜻으로 새기지만 사실 어질다는 풀이만으로는 공자가 말한 인의 뜻을 다 담을 수가 없으며, 서양 사람들이 번역어로 사용한 Benevolence 또한 공자가 말한 의미를 다 담지 못한다. 그렇다면 공자가 말한 인은 무슨 뜻인가? '인(仁)'은 두 이(二)자와 사람 인(人)자를 합쳐 놓은 것으로,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공자의 관심은 분명 인간에 있었다. 저녘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 온 공자가 마굿간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나서 물은 것은 말이 얼마나 다쳤는가가 아니라 다친 사람이 없는가 였다. 사실 공자 이전 인류의 관심은 동서양이 모두 자연 또는 귀신에 있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통해 문제의 중심을 인간으로 돌려놓았던 것 처럼 공자 또한 인간을 핵심 논의로 삼았다. [선진]편에서 자로가 공자에게 죽음이나 귀신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의 답변은 사람의 삶을 제대로 알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공자의 관심은 사람의 삶에 있었으며, 여기에서 공자가 얻은 해답이 인이었던 것이다.

{중용(中庸)}과 {맹자(孟子)}에서는 '인'을 모두 '사람다움(人)'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인'이란 곧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방법(道)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가 추구한 사람다운 사람은 어떠한 사람일까? 공자는 [이인편]에서 '오직 사람다운 사람만이 정말 남을 좋아할 수도 있고 남을 미워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예수가 부끄러운 짓을 한 여인을 둘러 싸고 돌로 치는 사람들에게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사람만이 이 여인을 돌로 치라고 했던 말과 비슷하다. 정말 사람다운 사람은 자신의 사리사욕이 없기 때문에 남을 좋아하거나 미워하더라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공자는 또 '사람다운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있는 사람이 반드시 사람다운 것은 아니다'라고 했다. 사람다운 사람의 용기는 참 용기이다. 따라서 사람다운 사람은 자신이 그 일로 피해를 입거나 목숨을 잃더라도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다운 사람은 맞설 사람이 없다(仁者無敵)'고 했던 것이며 '뜻있는 선비와 사람다운 사람은 구차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다움을 포기하지 않으며, 몸을 죽여서라도 사람다움을 이룬다'고 했던 것이다. 공자는 이처럼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에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까지 했던 것이다.

공자는 사람다움의 출발을 부모에 대한 효와 형제 사이의 우애라고 보았으며, 실천 방법으로 충(忠)과 서(恕)를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충'은 자신에 대한 흔들림 없는 성실성이며, '서'는 남의 입장을 헤아리는 자세이다. 따라서 '충서'란 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다하는 일이고 밖으로는 남과의 관계에서 내 마음을 미루어 남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이다. 이같은 입장은 유학이 자신을 위한 학문에서 출발하여 남을 위한 학문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인'이 사람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덕목이었음을 잘 보여 준다.

공자는 사람다움의 사회적 실현을 통해 당시의 혼란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여겼다. 따라서 공자에게 정치란 사람답게 되도록 바로 잡는 일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로 잡는 것일까? 제나라 임금이 공자에게 정치가 무어냐고 물었을 때 공자는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운 것'이라고 답했다. 사실 모든 사람이 각기 자신의 다움을 다 실현해 냈을 때 사회 질서는 저절로 잡힐 것이다. 실제 윗 사람이 윗사람 답게 아랫 사람을 대하면 아랫 사람은 목숨을 다해 윗사람을 섬기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자는 도둑이 많아서 걱정이라는 임금의 이야기를 듣고서 '당신이 백성들의 물건을 욕심내지 않으면 백성들은 상을 준다고 해도 도둑질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공자는 정치란 질서를 바로 잡는 것이며 그 질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사람 됨됨이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바로 잡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러한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구체적인 표현이 정명사상(正名思想)이었다.

2) 맹자와 순자

원시상태에서 인류가 본 자신의 모습은 아마도 생리적인 면이 더 자연스러운 본질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맹자는 도덕성을 인간의 본질로 규정함으로써 이러한 이해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셈이다. 이같은 맹자의 인간 이해는 공자의 인(仁)을 체계화한 것이라고 평가된다.

맹자는 사람들이 외모나 감각기관에 공통점이 있는 것 처럼 마음에도 공통점이 있으며 그것이 곧 도덕적 품성이라고 보았다. 이같은 이해 속에는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을 하나로 보려는 유가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맹자가 사람의 본성이 착하다는 주장의 증거로 든 것은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고 자연스럽게 생기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었으며, 맹자는 측은지심과 더불어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는 네 가지 실마리(四端)로 제시하였다. 맹자는 이 4단을 선천적인 것으로 보아서 양지(良知), 양능(良能)이라고도 하였다. 그렇다면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 맹자는 산을 비유로 들어 악은 환경 같은 외적 요소에서 온다고 보았다.

이같은 맹자의 인간 이해는 당시 사회 구성체에 대한 이해를 그 밑에 깔고 있다. 맹자는 모든 사람의 본질이 성선이라고 하면서도 다시 '입이 맛에 대한 것과 눈이 빛깔에 대한 것과 귀가 소리에 대한 것과 코가 냄새에 대한 것과 팔 다리가 편안함에 대한 것이 본성이기는 하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命)이 있기 때문에 군자는 본성이라고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말을 통해 맹자가 감각적·생리적인 것도 인간의 본성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본성이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선한 존재를 군자에 한정짓고 있다. 따라서 군자가 아닌 사람들은 감각적·생리적인 것을 본성으로 보기도 한다는 말이 된다. 맹자는 그런 사람들을 소인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맹자는 인간의 요소를 감각적·생리적 욕구와 마음 속의 도덕 욕구로 나누었다. 그리고 감각기관이 하고자 하는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소인이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군자이며, 감각기관은 천한 것이지만 마음은 귀한 것이라고 한다. 소인은 일정한 생활 근거가 있을 때는 변치 않는 마음이 있지만,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어지면 마음도 변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군자는 이와 달리 일정한 생활 근거가 없을 때도 마음을 변치 않는 사람이다. 이 두 종류의 사람이 사회에서 하는 역할을 맹자는 치자와 피치자로 나누어 설명하였다. 따라서 맹자가 본 본성이 착한 사람은 사실 통치 지위에 있거나 아니면 통치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이다. 이처럼 맹자의 성선설 속에는 현실적으로 강한 힘을 가진 지배계층의 존재를 인정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그들 내면에 본질적으로 들어 있는 선의 요소를 완전히 발휘하여 현실의 혼란을 종식시킬 것에 대한 바램이 들어 있는 것이다.

맹자는 이같은 인간 이해를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주장하였다. 맹자는 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낼 수 있는 방법은 왕도정치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왕도정치는 도덕 근원인 하늘의 뜻을 실현하는 일인 동시에 하늘로부터 받은 인간의 착한 본성을 실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사람이 제 마음을 다하면 자기의 본성을 알게되고, 자기의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안다고 한 말은 이러한 맹자의 생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하늘이 도덕의 근원이라는 생각은 맹자의 정치적 입장을 설명하는 이론으로도 연결된다. 맹자는 도덕의 근원인 하늘이 덕이 많은 사람을 택해 임금을 시킨다고 보았다. 따라서 통치자는 하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서도 도덕에 바탕을 둔 정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도정치는 도덕을 바탕으로 백성과 함께하는 정치이다. 물론 맹자의 왕도정치는 현대 민주주의에서 보면 by the people이나 of the people이 아닌 for the people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천여년 전 절대군주들에게 백성들에 대한 양보를 요구한 것은 엄청난 의미가 있다. 맹자는 군주들을 향해 민중을 위하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이 백성이고 그 다음이 국가이며 가장 가벼운 것이 임금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라고 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덕이 없는 임금, 즉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임금은 갈아 엎어야 한다고까지 했다.

순자도 맹자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을 선천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렇지만 순자는 도덕적 측면을 주목한 맹자와 달리 자연적이고 생리적인 욕구에 주목했다. 이 욕구는 곧 감각기관의 이기적 욕구를 의미한다. 그리고 이 욕구대로 간다면 다툼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순자가 볼 때 이러한 인간의 본성이 그대로 나타난 것이 춘추전국의 혼란이었다.

순자는 인간이 사회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했다. 사람들이 살아 가기 위해서는 많은 물건들이 필요하다. 그러나 혼자서 그 물건들을 다 만들면서 살 수는 없다. 그래서 사회와 떨어져 혼자 살면 가난해 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까닭이다. 순자는 또 사람들이 힘으로는 소를 따를 수 없고 달리기에서는 말을 따를 수 없지만 말과 소를 부리며 살 수 있는 까닭은 사회를 이루고 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도 화합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모두가 화합하여 하나가 되면 사회의 힘이 풍부해지고 강해지며, 그 결과로 어떤 것이든 이겨낼 수 있게 된다고 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그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재물은 부족하기 때문에 그대로 두면 서로 더 많이 갖기 위해 다툴 수 밖에 없다. 그 경우 이들을 다투지 않고 화합하게 할 수 있는 통제 수단이 바로 예이다. 순자는 사람에게 예가 없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없다고 한다. 남자와 여자, 부모와 자식의 구분 자체는 자연적인 것이며, 남자와 여자 사이의 분별, 부모와 자식 사이의 아껴 줌은 인위적인 노력이다. 이러한 인위적인 노력이 짐승과 다른 점이다. 순자는 예를 통해 인간의 행위를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규제하려고 하였다. 이 경우 예는 많은 사람들의 욕구를 최대한 고르게 채우기 위한 방법인 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악한 본성을 예로 다스릴 수 있게 되는가? 순자는 인간의 마음 작용을 성(性), 정(情), 려(慮), 위(僞)의 4부분으로 나누었다. 첫 단계인 성은 삶의 자연스러운 본질이자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성이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목마르면 마시고 싶고 피곤하면 쉬고 싶은 생리적 본성이다. 두번째 단계인 정은 밖에 있는 사물들과 만나서 생기는 감정이다.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기쁘다든가, 노엽다든가, 슬프다든가 하는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세번째 단계인 려(慮)는 구체적인 감정이 생긴 뒤에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문제로서 사고 작용에 해당한다. 네번째 단계인 위(僞)는 올바른 선택 이후의 의지적인 실천이다. 순자는 본성대로 가면 결과가 악이고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실천대로 가면 선이기 때문에, 성은 악이고 위(僞)는 선이라고 한다. 따라서 순자의 철학이 갖는 가치는 위(僞)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의지에 기초한 실천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을 거스르는 의지적 노력을 제도화하려고 한 것이 예이었다.

3) 송대 성리학

유학은 한대에 이르러 한무제가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관학이 되었고 그 결과 2천년을 이어가는 유학과 정치의 연결고리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한나라 말기부터 도교와 불교가 세력을 얻으면서 유학은 암흑기에 접어든다. 그 뒤 송대에 이르러 불가와 도가의 존재론을 받아들여 유가 도덕론의 철학 체계를 새롭게 강화한 사유체계인 성리학이 나오게 된다. 성리학은 일반적으로 주렴계의 태극도설에서 시작된 것으로 본다. 주렴계는 이 도설에서 태극 - 음양 - 오행 - 만물의 구도를 설정하고 만물 가운데서 가장 빼어난 존재가 인간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유가의 인본주의적 관점을 잘 드러내었다. 그 뒤 주희는 이 설명체계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이기론을 이용하여 사유체계를 완성하였다. 주희에 따르면 모든 만물은 리와 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 가운데 리가 각 사물의 원리이자 법칙이라면 기는 그 원리를 담아내는 그릇 처럼 보았다. 따라서 인간도 리와 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인간의 리는 바로 마음 속에 들어 있는 성이라고 생각하여 성즉리(性卽理)라는 명제를 내세운 것이다. 하지만 이 리는 기를 통해서만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현실에는 기 속에 담겨있는 리만 있을 뿐이다. 주희는 이러한 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이라고 하였다. 이 경우 기질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그 속에는 가장 바람직한 모습인 본연지성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이 본연지성은 달이 온갖 강물에 비추어 있듯이 각각의 특수한 모습인 기질지성 속에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실에서 기질의 한계를 넘어선 본연지성의 모습을 구현해 내겠다는 것이 성리학의 목표였다.

그러한 목표를 구현하는 구체적인 방법으로 주희가 내세운 것이 거경(居敬)과 궁리(窮理)였다. 이 가운데 거경은 스스로 삼가하고 조심한다는 뜻으로 내면적 수양방법이다. 이 경을 설명하여 주돈이는 주정(主靜)이라 했고, 정이천은 주일무적(主一無適)이라 했다. '주정'은 구체적인 생각이나 감정으로 드러나기 이전의 마음의 본 모습을 흔들림이 없는 고요한 상태로 보고 그 상태를 그대로 지켜나간다는 뜻이고, '주일무적'이란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특히 정이천은 이러한 마음 상태를 병에 비유해서 만일 병 속을 맑은 물로 가득 채워둔다면 더 이상 이물질이 들어갈 수 없는 것 처럼 마음을 옳은 생각으로만 가득 채워둔다면 나쁜 마음이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다. 유가의 선비들은 고요히 앉아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는 정좌(靜坐)를 통해 마음 속에 경을 기르고 유지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선비들의 '정좌'는 어쩌면 불교의 참선과 같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불교의 참선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래서 한국불교의 기틀을 다졌던 지눌도 마음을 비운다는 것을 병에 비유하여 병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병 속을 비우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유가는 불교와 달리 경을 통해 마음을 도덕 의지로 가득 채우려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궁리는 무엇인가? 궁리는 격물치지를 의미하여 격물치지란 사물에 나아가 각각의 사물이 지니고 있는 존재법칙을 탐구하고 이를 확장하여 도덕법칙으로 승화시키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과정의 궁극적 귀결은 내 속에 담겨있는 도덕법칙이 자연의 질서를 의미하는 존재론적 법칙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만물과 하나되는 경지를 터득하는 일이었다.

그 뒤 주자학의 지리멸렬한 공부법을 부정하고 심즉리를 주장한 양명학이 명나라 때 나오며 그 뒤 명말 청초 무렵 기를 중시한 사유가 등장하면서 인간의 욕심까지를 긍정하는 방향으로도 나아갔고 청나라 때에는 근대적 학문방법으로 고증학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3. 도가·도교란 무엇인가 - 道의 세계

1) 노자와 장자

노자는 그 실존여부가 불명확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주나라 왕실의 문서를 관리하던 노자가 쇠퇴한 주나라를 떠날 때 문을 지키던 문지기의 부탁으로 {도덕경}을 지었다고 했고, 또 공자가 예에 대해 물었을 때 한 수 가르침을 주고나서 교만과 욕심을 버리라고 훈계한 인물로 그려 놓았다. 하지만 사마천도 노래자라는 인물이 노자가 아닐런지 라고 물음으로써 스스로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노자는 날 때부터 늙은이였다는 터무니 없는 얘기부터 인도 사람일지 모른다는 주장까지 설이 다양하다. 하지만 오늘날 학자들은 대부분 노자라는 사람은 없었고 다만 어떤 사람들이 노자라는 이름을 빌어 {도덕경}을 지은 것이라고 본다.

{도덕경}은 전체 81장, 5천자 정도로 구성된 철학시로서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은유과 무한한 함축을 지니고 있다. 그 가운데 '도(道)'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되는 1장부터 37장까지를 '도경'이라 부르고, 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38장부터 81장까지를 '덕경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최근 마왕퇴 고분에서 발굴된 비단에 쓰인 '백서 노자'는 '덕경'이 앞으로 나와 있다. 그 뒤 {도덕경}은 도교와 불교가 성행하던 위진남북조 시기에 {장자}, {주역}과 더불어 '삼현(三玄)'으로 높여졌고, 특히 민간도교의 경전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오늘날도 영어 번역판의 수가 성경 다음으로 많을 정도로 세계적인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다.

{도덕경}은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다운 도가 아니다. 무엇이라고 이름붙여진 이름은 참다운 이름이 아니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 말은 언어와 같은 사회적 약속이나 도덕규범까지도 절대적인 것은 없음을 의미한다. 노자는 인간의 참 모습을 억압하는 불합리한 구조와 이념은 모두 허구이며, 이는 힘 있는 지배자가 제멋대로 규정한 가치일 뿐으로서 또 다른 질곡을 만들어 낸다고 보았다. 그래서 '세상을 바로 잡는다고 못하게 하는 것이 많아지면 백성들은 더욱 가난해지고, 백성들이 편리한 도구를 많이 쓰면 나라는 더욱 혼란해진다. 사람들에게 기교가 많으면 기이한 물건들이 더 많이 생기고 법령이 많이 발표될수록 도둑은 더 늘어난다'고 하였다. 이러한 입장에서 노자는 세상을 위해 만들었다는 도덕이니 법령이니 하는 것들이 모두 인위적인 것일 뿐이라고 부정한다. 인위란 목적의식이 있는 행위이며 그 바탕에는 언제나 사사로운 이익 추구가 깔려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도 겉에는 그럴 듯한 명분을 붙인 도덕적 포장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노자는 이러한 질곡을 벗어난 참다운 모습을 도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같은 허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노자는 이를 위해 모든 절대성을 부정하고 상대화시켰다. '화(禍)에 복(福)이 기대어 있고 복 속에 화가 숨어 있다.'는 말은 바로 화나 복이 모두 상대적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와도 비슷하다. 노자는 어떤 것도 절대 불변은 없다고 보았다. 그치지 않을 것 같은 엄청난 비바람도 며칠 못가며, 없으면 죽을 것만 같던 애인 사이도 얼마 안 가 달라진다. 변치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다 변한다는 사실 뿐이며 이같은 만물의 변화 법칙이 바로 道이다. 하지만 우리는 꽃이 피면서 동시에 시들어 간다는 사실을 보지 못하며, 슬픈 일 속에 기쁨의 씨앗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쇠고기 통조림 공장의 한 쪽에서는 새 통조림이 쏱아져 나오지만 그 반대쪽에서는 소가 쉴새 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 새로운 창조인 셈이다. 이처럼 좋고 나쁨, 얻음과 잃음의 두 축이 함께 있는 법이며 그 가운데 어느 한 쪽이 더 좋은 것도 아니다. 그래서 '덜어내는 것이 보태주는 일이고 보태주는 것이 덜어내는 일'이라고도 하였고, '되돌아 오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다'라고 하였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노자는 역설의 논리를 편다. 강함보다 약함을, 굳셈보다 부드러움을, 높음보다 낮음을, 많음보다 적음을, 큼보다 작음을, 남자보다 여자를, 받기보다 주기를, 유창함보다 어눌함을, 나아감보다 물러섬을 강조하는 것이 노자의 논리이다. 자벌레를 보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뒤로 꿈틀하고 물러선다. 나아가기 위해 오히려 뒤로 물러서는 자벌레의 움직임을 노자는 높이 산다. 마찬가지로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법이며 진실한 말은 유창한 말이 아니라 오히려 몇 마디 안되는 더듬거리는 말일 수도 있다.

노자는 도를 깨닫기 위해서는 감각·지식·행위 모두를 버리라고 한다.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은 아무 것도 덧붙이지 말고 자연을 자연 그대로 두라는 뜻이다. 노자는 아무것도 아닌 것,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의 가치를 안 사람이다. 방이 방구실을 할 수 있는 까닭은 벽이나 문 때문이 아니라 가운데 있는 빈 공간 때문이며, 밥그릇도 빈 공간 때문에 밥을 담을 수 있다. 이것이 노자가 말하는 무(無)이다. {도덕경}에서 말하는 덕은 이같은 도의 실현이며, 그 덕은 다듬지 않은 통나무 처럼 순박한 그대로의 상태이다. 통나무는 하잘 것 없어 보이지만 책상이니 의자니 어떤 것이든 만들어 낼 수가 있다. 마찬가지로 노자는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고 한다. 물은 언제나 낮은 곳부터 채워 간다. 만들어내고도 자기만이 가지려고 하지 않으며 애쓰고서도 공로를 자랑하지 않으며, 윗자리에 있으면서도 마음대로 간섭하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이 노자가 바라던 사람이었다.

이를 위해 노자는 분명한 행동 지침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여성적이고 수동적이며,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역설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보이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노자의 철학은 아무리 짓밟혀도 다시 자라는 잡초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장자의 사상은 어떠한가? 장자(莊子 기원 전 370?-300?)의 이름은 주(周)이며, 2300년전 전국시대의 혼란 속에 약소국 송나라에서 태어났다. 사마천은 {사기} 「장주열전(莊周列傳)」에서 초나라 왕이 사신을 보내 장자를 모셔가려 했을 때 "당신 나라에 신주로 모셔둔 신령스런 거북이 있지요? 그 거북은 죽어서 영원히 신주처럼 모셔지는 것을 바랐겠소, 아니면 제가 살던 물에서 자유롭게 삶을 즐기고 싶었겠소? 나는 진흙탕에서 꼬리를 흔들며 자유로이 살겠소"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장자가 남긴 10만자로 된 {장자}의 풍부한 우화 속에 장자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사상이 담겨 있다. 장자는 평생토록 성공을 바라며 애쓰는 인간, 지친 몸을 끌면서 가는 곳이 어딘지도 모르는 인간, 얕은 지혜를 부리며 살아가는 어리석은 인간, 죽으면 없어질 신체에 얽매인 인간, 물욕의 노예가 되어 명예나 감각적인 것을 탐닉하는 인간들에 대해 그러한 삶과 다른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제시했던 것이다. 그의 사상이 잘 담겨 있는 {장자}는 내편 7편, 외편 15편, 잡편 11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내편만을 장자의 저작으로 보기도 하고 내편 가운데 「소요유(逍遙遊)」·「제물론(齊物論)」·「양생주(養生主)」 세 편만을 장자의 저작으로 보기도 한다.

{장자} 첫째 편 [소요유(逍遙遊)]에는 붕새 이야기가 나온다. 장자는 세속의 모든 구속을 벗어난 참 자유를 추구한 사람이었으며, 붕새 우화는 장자가 추구한 그같은 참 자유의 상징이다. 장자의 철학은 선악을 분명하게 구분짓는 유가의 입장과 다르다. 이런 것은 구속일 뿐이며 자유로울 수 없게 만드는 착고이다. 따라서 장자는 가치판단을 버리고 모든 것을 상대화시켜서 풀어 헤치는 방법을 제시한다. 이것이 만물제등(萬物齊等)의 철학이다. 만물제등이란 절대평등을 뜻하며 {장자} 둘째 편 [제물론]에는 그런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만물은 환경이나 조건이 달라지면 그에 대한 평가도 달라진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하나의 획일화된 기준을 두지 않았다. 엄청난 미인이 물고기나 새들에게 가까이 가면 물고기나 새들이 놀라서 달아난다. 그렇다면 누가 참다운 아름다움을 아는 것인가? 사람은 나무에 매달려 자거나 진흙탕 속에서 잘 수 없지만 원숭이는 나무에 매달려 자고 미꾸라지는 진흙탕 속에서 잔다. 그렇다면 누가 편안한 잠자리를 아는 것인가? 결국 이런 판단은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 장자는 부인이 죽었을 때 시체를 깔고앉아 항아리를 두들기며 노래했다. 마침 조문하러 온 친구 혜시가 그 꼴을 보고 놀라자, 장자는 "나도 처음엔 슬펐다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슬퍼할 일이 아니더구만. 집사람이 태어나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 것 뿐인데 슬퍼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라고 답하였다. 장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장자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죽거든 들에 버리라고 하였다. 깜짝 놀란 제자들이 "아닙니다. 좋은 땅에 잘 묻어드리렵니다."라고 하자, "땅에 묻으면 굼뱅이나 벌레가 파먹고, 들에 버리면 날짐승과 길짐승이 뜯어 먹을테지. 들에 버리면 하늘과 땅이 내 관이고, 해와 달과 별이 내 관 속에 들어 있는 장식품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같은 우화는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장자는 모든 것이 같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만물을 상대화시켰다. 어느 날 호랑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꿈을꾸다가 잠에서 깬 장자는 고민에 빠졌다. '내가 본래 호랑나비인데 지금 장자가 된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면 내가 본래 장자인데 호랑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가.' 이 우화는 꿈꿀 때와 깨어있을 때가 상대적이라고 한다. 도둑이 무서워 튼튼한 금고에 큰 자물쇠를 채워도 더 큰 도둑은 금고째 훔쳐 가면서 혹시 자물쇠가 약해서 물건이 쏱아지면 어쩌나 걱정하는 법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서면 절대적인 것이란 없다. 어느날 제자가 장자에게 물었다. "선생님, 도가 어디 있나요?" "도란 어디든 없는 곳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지요." "쇠파리속에 있네." "어찌 그렇게 지저분한 데 있습니까?" "잡초 속에 있네." "농담이시겠지요?" "깨진 기왓장 속에 있네."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데요?" "똥오줌 속에 있네." 이것은 결국 도가 만물 속에 있다는 말이다. 쇠파리든, 잡초든, 깨진 기왓장이든, 똥오줌이든 다 변한다. 도란 바로 그런 변화일 뿐이며, 따라서 만물에는 모두 도가 들어있는 셈이다.

장자는 도를 따르는 일은 자연을 따르는 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어느 소잡는 사람이 문혜군 앞에서 시범을 보였다. 그가 칼을 쓱쓱 썩썩 놀릴 때 마다 살점과 뼈, 힘줄이 툭툭 갈라져 나갔다. 그의 솜씨는 하나의 예술이었다. 한참 넋을 잃고 보던 문혜군이 탄성을 질렀다. "어허, 어떻게 기술이 저럴 수 있을까!" 그러자 그 백정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기술이라니요. 이건 도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온통 소만 보였습니다. 그러나 3년이 지나자 소가 통째로 보이는 경지를 넘어섰고, 이제는 마음으로 볼뿐 눈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직 결 대로 칼을 움직이면서 살과 뼈, 뼈와 뼈 사이의 빈 곳에 칼을 넣을 뿐입니다. 솜씨 좋은 소잡이도 가끔씩 엉겨 붙은 살을 가르기 때문에 1년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그보다 못한 소잡이는 자꾸 뼈를 건드리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 칼을 바꿉니다. 그러나 제 칼은 19년 동안 수 천 마리의 소를 잡았어도 금방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문혜군은 "훌륭하도다. 이제야 비로소 양생의 비결을 알았다"고 말했다. 도를 따르면 자연과 하나 된 자유를 누리지만 그렇지 못하면 무뎌진 칼날 처럼 질곡 속에서 자신을 소모시킬 뿐이다. 도를 따르는 삶은 가치판단에 얽매이지 않고 나와 남을 구분짓지 않으며 만물과 하나가 된다. 장자의 사상은 그 뒤 문학과 예술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중국에서 선불교가 발전하는데 큰 바탕이 되었다. 또 한편으로는 사회비판적인 측면이 농민봉기를 통해 혁명정신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불로장생과 신선세계를 꿈꾸는 신비주의적 사상으로 발전하기도 하였다.

2) 위진 현학과 도교

한나라는 말기에 이르면 대규모의 농민봉기가 일어나면서 통치계급은 사분오열되고 지주호족은 군대를 모아 자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한나라를 엄청난 혼란에 빠뜨렸고 그 결과 220년에는 한나라가 망하고 위(魏).촉(蜀).오(吳) 삼국이 정립하는 국면에 이르렀다. 그 뒤 위나라가 촉을 무너뜨리고 다시 서기 265년 사마씨(司馬氏)가 위나라를 대신해 서진(西晉)을 세웠지만 317년에 이르러 중국의 북쪽에는 흉노·갈·선비·강·저 등의 다섯 이민족이 서로 나라를 세우고 무너뜨리는 일을 반복하는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를 열었고 남쪽은 한족의 여섯 왕조가 바뀌는 혼란을 맞았다. 이 시기는 589년 수나라의 통일로 막을 내리는데 이 시기를 앞 시대와 합쳐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한다. 따라서 후한의 멸망부터 치더라도 무려 369년간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혼란은 지식인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에 따라 엄청난 사상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유가사상의 몰락과 도교·불교의 대두이다. 그러한 모습 가운데 하나는 위나라가 한을 무너뜨리면서부터 위를 무너뜨린 서진이 망할 때까지의 약100년 간, 즉 위진시기에 유행한 현학이다.

위진현학은 노장사상이 중심이 된 새로운 사조였다. 이 흐름은 사회구조의 변화를 통해 지식인들의 의식이 바뀌면서 시작되었다. 본래 한나라는 추천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선거제(選擧制)를 택하였다. 물론 추천 기준은 유학적 소양이었다. 그러나 집안끼리 서로 추천을 거듭하면서 명문 귀족이 문벌화하고 이에 따라 귀족들의 권한이 강화되어 갔다. 따라서 정치·경제·문화를 모두 손에 넣은 명문 귀족들은 더 이상 벼슬을 얻기 위한 유가 공부에 집착하지 않게 되었으며 한나라 말의 혼란이 정치로부터 자유롭고자 하는 자유로운 생활태도를 부추긴 것이다. 위진시기에 들어서면 이들의 모습은 청담(淸談)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노자}, {장자}, {주역}의 삼현(三玄)을 중심으로 완곡한 풍자를 통해 자유로운 본성을 추구하는 경향으로 나아갔다. 그런 대표적인 인물들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이었다. 친구들에게는 청안(靑眼)으로 대하고 세속인들에게는 백안(白眼)으로 대했다는 완적이나 술을 많이 먹었고 나체로 잘 지냈다는 유령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위진현학의 주된 관심은 '자연'과 '명교'(명분교화)의 조화에 있었다. 명교는 봉건사회의 정치제도와 윤리도덕 등 봉건문화의 총칭이며 자연은 최고 법칙인 도로서 자연관과 인생관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경향은 바로 유가와 도가의 절충을 의미한다.

이 시기 중요한 인물들로는 노자를 철학적으로 해설한 {老子注}와 송대 역학에 큰 영향을 준 {周易注}를 저술한 왕필, 음악 자체는 슬픔이나 기쁨 같은 감정과 관련이 없다는 의미에서 '성무애락론(聲無哀樂論)'을 주장한 혜강, {장자}를 철학적으로 해설한 곽상 등이 있다. 이들의 학문 경향이 서예, 음악, 회화 등을 사대부들의 교양으로 정착시킨 것이다.

두 번째 흐름은 도교와 불교이다. 이 두 사상은 당시 유행한 전염병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한나라 말기부터 중국에는 엄청난 규모의 역병이 여러 차례 돌았다. 그런데 이러한 역병은 비슷한 시기 로마에 돌았던 역병과도 관련이 있었다. 엄청나게 떨어진 두 문명권의 전염병은 인도의 습지에서 발생한 병균이 장사꾼 몸을 이동 도구로 삼아 실크로드를 통해 오간 것이다. 전염병의 유행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져왔고 이런 상황이 종교의 전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즉 이 시기 로마에서는 기독교가 국교로 지목되었고 중국에는 도교와 불교가 전염병의 치유와 관련하여 광범위한 지지를 얻어갔다.

그 가운데 도교는 고대부터 내려 온 민간 신앙을 기반으로 하면서 그 가운데 신선설을 중시하고, 여기에 도가 역리 음양 오행 참위 의술 점성 등의 이론을 덧붙였으며, 불교의 체제와 조직을 본따서 교단을 만든 종교이다. 도교는 특히 방술가(方術家)들이 노장사상을 가져다가 이론을 갖추었으며 불로장생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런 점에서 도가와 도교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도가에서는 죽음을 자연스러운 변화과정으로 생각하는 반면 도교는 죽지 않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 뒤 후한 말기에 이르러 장각(張角)과 장로(張魯)가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만들면서 교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들은 당시 유행하던 전염병을 고쳐주면서 일반 사람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그 결과 황건적의 난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특히 오두미도는 병을 고치거나 배우기 위해 장도릉을 찾는 자들에게 모두 쌀 다섯 말을 바치도록 하였고 어떤 병에 걸린 사람이라도 장도릉의 가르침을 믿고 그가 규정한 규율과 의식에 따르며 부적을 태워 물에 타서 마시면 반드시 낫는다고 하였기 때문에,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장도릉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가르칠 때 {도덕경}을 읽고 암송하게 하였다.

위진 시기에 이르면 위백양(魏伯陽)과 갈홍(葛洪)이 신선술의 이론적 근거와 방법을 제시하면서 도교의 기초를 다졌다. 백성들의 엄청난 호응을 등에 업은 도교는 남북조 시기 북위(北魏)의 구겸지(寇謙之)에 의해 국가 종교가 되었고 이같은 흐름은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에까지 그대로 이어졌으며, 특히 당나라 왕실은 노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아 위세를 과시하면서 집집마다 {노자도덕경}을 한 권씩 갖추게 하였다. 훗날 도교는 민간신앙과 습합하여 서민들의 애환을 어루만지는 역할을 하였다.



4. 불교란 무엇인가 - 해탈의 세계

1) 불교의 발생과 중요 이론

불교는 인도에서 발생하였다. 불교가 발생하기 전 인도에는 브라마니즘(Brahmanism - 바라문교라고도 한다)이 있었다. 이 브라마니즘에서 불교로의 전환은 2500여년전 석가모니(釋迦牟尼)에 의해 일어났다. 특히 브라마니즘에서 불교로의 변화는 크게 네 가지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 첫째는 브라마니즘의 계급주의에서 만물 일체 평등으로의 변화이다. 둘째는 신중심적 사고로부터 인간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이다. 셋째는 고행(苦行) 중심의 수련에서 중도(中道) 중심의 수련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넷째는 내세적 해탈을 추구하는 것에서 현세적 해탈을 바라는 것으로 발전하였다.

불교의 근본원리 가운데 하나는 삼보(三寶)론이다. 삼보는 불(佛)·법(法)·승(僧)을 의미하는데 그 첫째인 불보론(佛寶論)은 교조론(敎祖論)으로서 최초로 해탈한 인간 불타, 즉 석가모니에 대한 이야기와 진리가 곧 부처라는 입장에서의 논의이다. 둘째로 법보론(法寶論)은 불교의 교리에 해당하는 것으로 객관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불교의 진리를 의미한다. 셋째로 승보론(僧寶論)은 대승·소승 같은 교단이나 해탈론을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불교를 이해하기 위하여 알아야 하는 개념 가운데 하나가 삼법인(三法印)이다. 삼법인은 제행무상(諸行無常)·제법무아(諸法無我)·열반적정(涅槃寂靜)을 가리키는데, 그 가운데 첫번째인 제행무상은 일체 모든 만물의 생성 발전과정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두 찰나에 생멸(生滅)한다. 따라서 만물 가운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마치 고정된 무엇인가가 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고정된 무엇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자신이라는 존재이다. 하지만 방금 있었던 나 조차도 불변의 존재가 아니다. 계속 변해가는 나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법무아를 말하는 것이며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깨달음의 경지는 없는 것인가. 그 깨달음의 경지를 열반적정이라고 하며 이것이 바로 만물의 본 모습일 뿐이다. 우리가 살면서 무엇인가가 변하지 않고 존재한다고 보는 까닭은 그 사물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러한 집착은 번뇌를 낳을 뿐이다. 하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내 속에 있는 욕망의 불을 끌 수 있다면 바로 열반적정의 상태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연기설(緣起說)에 대해서 살펴 보자. 연기설은 앞에서 본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원인을 설명하는 이론이다. 석가는 일찌기 '연기를 보면 法을 본다.'고 하였다. 이 말은 연기의 원인을 제대로 깨닫는다면 불교의 진리를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불교적 세계관에서는 이 세상 만물 가운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래서 초기 경전인 {아함경}에서는 '이 것이 있으므로 저 것이 있게 되고 이런 일이 생겼기 때문에 저런 일이 생겨난다'고 하였다. 이처럼 세상 모든 것은 필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같은 사고는 창조론적 사고나 환원론적 사고 같은 유한적 사고가 아니라 시공을 초월한 무한 우주관을 의미하며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 생명은 어떠한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지금 한 일이 다음의 업보(業報)로 연결되는 것이므로 모든 인간은 자기 삶의 완벽한 주인이 될 뿐이다. 불교가 다른 사상에 비해 주체적인 점이 강한 까닭은 바로 이러한 업보, 또는 인과응보라는 관점에 철저하기 때문이다. 연기설에는 다양한 이론들이 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2연기설로서 초기 불교 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이론이다. 12연기설은 12가지 요소로 연기를 설명하는 이론인데 그 12가지는 無明, 行, 識, 名色, 六入處, 觸, 受, 愛, 取, 有, 生, 老, 死이며,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번뇌의 근본으로서 진리에 대한 무지를 뜻하는 무명이다.

다음은 사성제(四聖諦)를 보자.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서 고제(苦諦)·집제(集諦)·멸제(滅諦)·도제(道諦)를 가리킨다. 그 가운데 고제는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고통의 연속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세상을 고해(苦海)라고도 하는 것이다. 두번째로 집제는 고통의 원인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그 고통의 원인은 연기설에서 언급한 무명이며, 그 결과 번뇌가 쌓여서 삼법인의 진리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번째로 멸제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부분이다. 그 방법은 고통의 원인인 번뇌와 무명을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번뇌와 무명을 없애는 구체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네번째인 도제이다. 도제에서는 그 없애는 방법으로 중도(中道)를 제시한다. 중도란 고통도 아니고 쾌락도 아닌 비고비락(非苦非樂)으로서, 석가모니가 깨우쳐 간 수행법의 진수이다. '있음이 곧 없음이요 없음이 곧 있음(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명제는 바로 중도를 말하는 것이다.

다음은 팔정도(八正道)를 보자. 팔정도는 사성제에서 말한 중도의 구체적인 실천법이다. 그 여덟 가지는 정견(正見 - 연기의 원리를 바로 봄), 정사(正思 - 불타의 가르침을 바로 생각함), 정어(正語 - 바르게 말함), 정업(正業 - 바르게 행동함), 정명(正命 - 바르게 살아감), 정정진(正精進 - 바르게 노력함), 정념(正念 - 바른 생각을 지속함), 정정(正定 - 진정한 三昧)를 가리킨다.

다음은 불교의 분류를 보자. 불교는 기준 잣대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분류는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이다. 대승이니 소승이니 할 때의 승(乘)자는 수레라는 뜻이다. 따라서 대승은 여럿이 탈 수 있는 큰 수레이고 소승은 혼자밖에 탈 수 없는 작은 수레를 뜻한다. 본래 불교는 깨달음을 통해 해탈을 얻음으로써 생·노·병·사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는 것이 목적이며, 해탈을 이루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윤회의 고통을 끊임없이 되풀이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는 내가 이번 생애에서 해탈을 못이루더라도 좀 더 많은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사회적 실천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동안 쌓은 공덕으로 보면 충분히 부처가 되고도 남겠지만 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보살로 남아있다는 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인물인 셈이다. 이와 달리 소승은 자기 혼자만의 해탈을 이루려고 하기 때문에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니까 대승불교가 대중교통과 비슷하다면 소승불교는 몇 사람 밖에 탈 수 없는 택시와도 비슷하다. 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는 그 분포 지역에 따라 북방불교와 남방불교라는 말로도 쓰인다.

또 다른 분류 가운데 하나는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는 것이다. 교종은 석가모니의 가르침, 즉 경전을 중시하는 교파이고 선종은 이와 달리 깨달음 자체를 중시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부처나 경전의 권위를 부정하는 교파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 직지인심(直指人心), 교외별전(敎外別傳) 등은 모두 선종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말이다. 선종은 특히 중국에 들어 와 6조대사 혜능에 이르러 큰 발전을 보았기 때문에 중국화한 불교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 밖에 경전을 중시하는 현교(顯敎)와 주문이나 의식을 강조하는 밀교(密敎)를 나누기도 한다.


2) 중국의 불교수용과 전개

특히 한국불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불교를 이해해야만 한다. 동아시아 역사상 가장 큰 사상적 변화 가운데 하나는 불교의 중국적 변용이다. 인도불교의 중국 수용은 이질적인 인도문명과 중국문명의 상호작용이었으며, 이 상호작용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의 도전에 응하면서 계속 자기변화를 겪어 간 문화양상이었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온 공식 기록은 AD67년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불교는 상당 기간을 지나 한나라 말과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거치면서 비로소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된 배경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한나라 말의 혼란과 위진남북조 시기 이민족의 중국지배였다. 앞 서 보았듯이 한나라 말에는 여러 차례 큰 전염병이 돌았다. 그 속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사람들은 비위생적 생활을 꾸려가던 대다수 민중이었고 이들에게 도교가 했던 것 처럼 불교 또한 질병 치료와 관련하여 지지기반을 넓혀 갔다. 또한 장기간에 걸친 혼란은 민중들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그에 따라 윤회로부터의 해탈이 불교의 궁극 목표임에도 많은 민중들은 지금 생에 열심히 살면 다음 생에는 더 나은 조건으로 태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불교를 믿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민중들의 불교 수용과 달리 지식인들은 그들의 정신세계를 지탱해주던 중화의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비로소 외래 사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였다. 특히 남북조 시기에 이르면 중국의 북쪽 지방을 오랜 동안 이민족들에게 빼앗기면서 중국인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또 다른 측면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유학 독존시대의 마감과 관련된다. 중국불교는 한대 유학의 이면에 숨겨진 취약성이 노출되고 나서야 비로소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중국의 불교수용은 결국 한대 유학과의 변증적 종합인 셈이다. 한대 유학은 동중서를 통해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연결하는 거대한 이론 체계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거대한 이론 체계는 지나친 유비추리의 결과 오히려 자생력을 잃고 말았다. 이 점에 대해 일부 지식인들은 유교에 덧씌워진 상징적 종교적 첨가물을 걷어내고 자연 질서의 내재 원리인 道를 추구함으로써 개별 존재의 의미를 찾고자 했다. 이것이 바로 도가적 요소를 통해 극복하려 했던 위진현학의 유행이었다. 이런 흐름은 중국인들의 사유 범위를 확대시키고 사변적 깊이를 더해 주는 긍정적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 공간을 불교가 채우게 된 것이다.

불교의 중국적 수용은 크게 두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 단계는 후한 초기부터 위진시대(65∼317)까지이며, 둘째 단계는 여러 이민족이 북중국을 지배하던 남북조시대(317∼589)이다. 중국불교사에서는 앞 시기를 중국불교의 준비기라고 하고 뒤 시기를 토착화 시기라고 하기도 한다. 첫 단계에서는 먼저 도가와 유가의 용어를 비조직적으로 사용한 불경 번역이 이루어졌다. 중국의 토착 용어를 단편적으로 차용하는 이러한 단계를 의탁불교(依託佛敎)라 한다. 하지만 곧 오상과 오계의 일치 처럼 체계적인 '개념 짝짓기'로 나아갔으며 이러한 단계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고 한다. 그 뒤 토착화 단계인 남북조시대에 이르면 지배세력의 적극적 지원 아래 불교의 이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불교가 어떠한 세력을 지니고 있었는지는 운강이나 용문의 웅장한 석불상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과거 질서 정도를 뜻하던 '리(理)'라는 개념에 불교의 형이상학적 의미가 부여되었고, 현학에서 말하는 본말(本末)이나 체용(體用) 범주를 가지고 경험세계와 초월적 원리를 설명하기도 하였다. 물론 불교의 중국화가 쉽지만은 않았으며 왕권과의 대립 갈등 때문에 폐불의 참극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이 오히려 '지금' '여기'에 사는 자신들의 삶과 정신에 지주가 되는 불교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위진남북조의 혼란을 지낸 통일 국가 수나라와 당나라는 민중의 지지를 광범위하게 받고 있던 불교와 도교를 민심 수습의 차원에서도 적극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당나라에서는 화엄, 천태 등을 비롯한 교종의 다양한 종파 뿐만 선종이 화려하게 꽃피었고 도교도 당나라 왕실이 노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받들고 집집마다 도관을 갖추고 도덕경을 비치하도록 하면서 거의 국교와 다름 없는 지위를 누렸다. 그리고 이처럼 얽힌 유불도 삼교의 교섭이 또 다시 새로운 유학의 틀, 즉 성리학을 만들어 내는 힘이 될 수 있었다.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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