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신앙이란 무엇인가
이창익(서울대 강사)
먹고 사는 게 다 종교다
엘리아데 마지막 역작 『세계종교사상사』 번역
"고인돌·현대건축 속엔 불멸 꿈꾸는 종교성이…"
노년의 미르치아 엘리아데.
마을 어귀의 장승과 천년 고찰의 불상 사이엔 과연 어떤 차이가 있는가. 20세기 최고의 종교학자로 꼽히는 미르치아 엘리아데(1907~86)에게 둘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모두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인간의 종교적 염원을 담고 있을 뿐이다. 음식과 섹스, 그리고 노동도 어떤 경건한 의식보다 종교적일 수 있다. 인류의 신화.의식.신앙.사상을 망라한 엘리아데의 역작 '세계종교사상사'(전3권, 이학사)가 번역.출간됐다. 2000쪽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종교갈등으로 전쟁도 불사하는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
종교나 종교학에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엘리아데의 저서를 한두 권쯤 읽어봤을 것이다. 30여 년 전에 '우주와 역사: 영원회귀의 신화'가 정진홍 교수에 의해 번역된 이후 엘리아데의 저술은 이미 국내에 10여 권이 번역돼 있다. 특히 이번에 번역된 '세계종교사상사'(원제 Histoire des croyances et des id?es religieuses)는 엘리아데의 마지막 저술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각별하다. 그러나 이 책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몇 가지 예비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엘리아데에 대한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대부분의 사람은 엘리아데의 종교적 지식이 갖는 통시적이며 문화적인 넓이와 깊이에 압도되고 만다. 그러나 이것은 자료의 무분별한 취사선택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둘째, 엘리아데의 신비주의적 색채에 공감, 혹은 반감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엘리아데의 비역사성 문제와 직결된다. 그리고 두 가지 반응이 조합되면서 한편으로는 엘리아데 숭배가, 다른 한편으로는 엘리아데 비판이 생겨난다. 동일한 이유로 숭배되거나 비판받는다는 것, 바로 여기에 '엘리아데의 역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 비판의 핵심은 주로 그의 '비역사성'에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엘리아데의 마지막 저술이 '역사적인' 저술을 표방하는 '세계종교사상사'였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관건은 정말 엘리아데가 '역사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가의 문제일 것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종교개혁에까지 이르는 책의 전개 방식은 일면 통상적인 역사서술의 연대기 방식을 따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보편역사에 대한 의식, 즉 "인류 정신사의 통일성에 대한 의식" 자체가 근대적이며 서구적인 '종교적 창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저 너머의 초월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역사 안에서 역사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방식을 의미한다. 근대는 역사가 종교를 대신하는 상황, 즉 '종교 아닌' 비종교가 종교가 되는 상황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엘리아데는 '종교의 종말'이야말로 새로운 근대적 종교성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종교의 죽음조차도 재생의 징후로 파악하는 엘리아데에게는 '죽어가는 종교'를 부활시키려는 몸부림이 없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선돌이나 고인돌 같은 신석기 거석문화를 이야기하면서, 엘리아데는 돌이 죽은 자의 영혼을 담는 불멸의 용기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엘리아데는 거석문화의 장례의식적 가치를 곧장 돌 구조물로 이루어진 후대의 신전문화와 도시문화에 연결한다. 신을 모시는 신전과 돌로 지어진 도시가 사실은 '무덤의 종교성'을 연장하고 있다는 역설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돌로 뒤덮인 현대도시는 불멸을 추구하는 새로운 종교성의 현현이라 재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엘리아데는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을 이야기하면서, 콜럼버스의 계산에 의하면 세계의 종말이 155년 뒤에 찾아올 예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처음부터 신세계로서의 아메리카는 종말론적 발견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콜럼버스의 종말론적 비전에 내재한 이러한 '아메리카의 종교성'을 곧장 현재의 미국에 적용해 볼 수도 있다.
또한 엘리아데는 이스라엘의 종교가 토착적인 가나안의 종교구조를 수용하여 어떤 방식으로 변형되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스라엘의 야훼주의가 갖게 된 의례의 구조, 성소, 성지, 사제계급 모두가 가나안의 모델을 모방했다는 것이다. 가나안 토착종교를 비판했던 예언자들의 엑스터시 체험 자체가 가나안 토착종교에 뿌리를 둔 것이라는 역설적인 주장도 한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이 주장한 순수한 야훼신앙이 사실은 그들이 비판했던 가나안 종교와의 동화 과정의 산물이었다는 것이다. 엘리아데의 관점에서 순수한 종교현상은 가설적인 것이지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세계종교사상사'는 엘리아데가 자기 학문의 전 과정을 담아 서술한 '학문적 자서전'이다. 역사서술을 통해 자기 학문을 완결한 점이나, 역사서술 안에서 새로운 종교성을 발견한 점에서 볼 때 엘리아데는 누구보다도 근대성에 충실한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비근대적이며, 비역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엘리아데에 대한 몰이해의 일단을 드러내는 것은 아닐는지.
불교도 기독교도 감싸 안는 '종교적인 힘'
왜 엘리아데를 읽어야 하는가? 우리는 종교란 사회로부터 유리된 것이며, 비밀스러운 뭔가가 저장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엘리아데를 읽는 순간 종교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일상을 향하게 된다. 종교란 독특하고 특이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현상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역으로 엘리아데를 통해 우리는 모든 인간현상 안에는 종교적인 구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또한 배우게 된다.
엘리아데는 개별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보다 일반범주로서의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가 이야기하는 종교는 기독교.유교.불교.이슬람 등과 같은 개별종교가 아니라 모든 종교를 생성시키고 변형시키는 '종교적인 힘'을 가리킨다. 그래서 그는 한 종교의 믿음이나 관념이 어떻게 다른 종교 안에 스며들어서 변형되고 동화되는가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종교적 관념이 어떻게 한 종교에 의해 종합되는지, 역으로 한 종교의 창조물이 어떻게 분산되고 변형되는지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여, 인간의 '종교적 창조성'이라는 문제를 건드린다.
몇 년 전 박노자는 엘리아데의 '부드러운 파시즘'을 비판했다. 그는 신비의 기술을 파는 장사꾼인 엘리아데의 이상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 몸처럼 움직이는 유기적 사회"라고 말했다. 종교를 포르노나 마약과 등가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박노자의 입장에서 볼 때 엘리아데의 신비주의적이며 비역사적인 태도는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문제는 박노자와 엘리아데의 종교 개념이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박노자는 엘리아데에게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비도덕적인 종교를 유포시켰다는 책임을 묻는다. 그러나 엘리아데에게 종교는 진리나 도덕이나 미학이 아니다. 그에게는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종교적인 현상이기 때문이다. 종교는 참일 수도 거짓일 수도, 도덕적일 수도 비도덕적일 수도, 아름다울 수도 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역시 선택에 있다.
이창익(서울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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