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다시 보는 마오쩌둥
대구대 경제학과 金載勳 교수
1. 마오 쩌둥(毛澤東), 그는 누구인가
요즘 대학을 다니는 세대들에게는 마오쩌둥은 유비, 조조, 공자 등과 원근감의 차이가 달리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현대의 인물이었고, 현재의 세계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그는 1893년 12월 중국 호남성(湖南省) 상담현(湘潭縣) 소산(韶山)에서 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논어 등 사서(四書)를 배웠고 호남제일사범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북경대학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1921년 상해에서 있었던 12명의 중국공산당 창당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1933년 1월 당 중앙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5년 1월에는 당 중앙서기처 서기로, 10월에는 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그리고 1943년 당 중앙위원회와 중앙정치국의 주석으로 선출되어 최고지도자로 활동하였다. 그의 지도 아래 중국공산당은 항일(抗日)전쟁에서 승리했고 국민당을 사당(私黨)화했던 장제스(張介石)와의 내전(內戰)에서 승리,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였다. 그 후 그는 중국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을 주도한 후, 1976년 9월 뻬이징에서 사망하였다.
2. 무엇이 그의 탁월한 점인가?
(1) 맑스주의자로서의 마오쩌둥
등샤오핑(鄧小平) 이후 중국은 세계 다른 나라들과 함께 시장경제를 적극 도입, 비록 정치체제는 사회주의를 고수하고 있다 하더라도 경제면에서는 사회주의적 요소를 거의 탈색시켜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맑스주의자로서 공산당 운동을 주도했던 그가 이제 와서 무슨 의미를 가질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함께 대량생산방식으로 무장한 서구 열강이 아편전쟁 이후 중국을 침략한 동안, 바로 자신들의 땅에서 '중국인과 개는 공원(公園)에 들어오지 마시오'라 붙은 팻말을 볼 정도로 억압과 멸시를 받고, 또 일본인으로부터 난징(南京)대학살과 같은 만행을 겪은 중국인들이 그들에 대항할 사상적 수단은 맑스주의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여기에서 실천적 사상가로서의 마오쩌둥을 보는 것은 그 개인을 보는 것인 동시에 20세기 초반 그 시대적 조건, 그리고 그를 선택했던 중국인민을 보는 것이기도 하다. 또 그의 방법을 적극 따랐던 베트남,남미 등 제 3세계 곳곳의 피압박 대중들, 그리고 서유럽과 미국에서 전후 사회변화를 주도하던 '68세대'의 그에 대한 경도를 보는 것이기도 하다.
(2) 뛰어난 통찰력으로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다
K.맑스 이후 많은 추종자들은 계급적 모순을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관점, 따라서 자본주의경제를 노자간의 모순으로 보는 관점을 고수하였고, 그 실천방안으로 도시 공장지대에서 노동자들의 운동만을 중요시하였다. 중국에서도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陳獨秀) 등 초기 중국공산당 지도자들도 역시 그랬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중국의 농민에 주목하였다. 그는 후난성(湖南省)의 농민 속에 들어가 직접 겪으면서 분석해 1926년 3월과 27년 3월 차례로 <중국 사회 각 계급 분석>, <호남 농민운동 조사보고>로 정리하였다. 무산계급이 주도하되 농민과 연합하는 노선을 세우고, '도시로부터 농촌으로'가 아닌 '농촌에 근거지를 세워 도시를 포위·장악'하는 방책을 제시하였다.
또 중국과 같은 약소민족의 경우 사회적 모순은 고전적인 이행을 겪은 사회와는 다르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변증법의 모순을 기본모순과 주요모순으로 해석하고 당시 중국사회에서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이 각각 그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의 <모순론>에서 제시하였다. 이러한 견해 위에 소수 친일파를 제외한 민족자산계급을 포함, 민족 대단결을 주장하고 일제 침략 아래 항일보다는 중국공산당의 토벌로 일관하던 장제스의 국민당에 항일을 위해 국공합작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쑨원의 미망인 쑹칭링(宋慶齡) 혹은 군벌 장샤오량(張學良)을 비롯한 중국인민의 지지를 받아 항일전쟁을 승리로, 마침내 국공내전에서도 승리하여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할 수 있었다.
3. 사회주의 체제의 확립과 그의 한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52년까지 3년 동안 그는 당을 이끌어 국민경제를 회복시켰고, 토지개혁, 반혁명 진압, 3反 5反운동을 이끌었고, 1952년 이후 사회주의 공업화와 농업·수공업·상업을 사회주의로 개조시켜 갔다. 1958년에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생활 모든 측면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지향하는 인민공사로 전 농촌을 재편하는 대약진운동에 들어갔다. 또 1966년부터는 사회제도를 사회주의화한 데서 더 나아가 인간 자체를 사회주의화하기 위한 문화대혁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은 지금에 볼 때 큰 실패였다고 평가된다.
우선 공업과 농업분야에서 기계제 대경영의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소경영을 무리하게 합작체제로 전환한 것은 오히려 작업의 의욕과 능률을 크게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소규모 소매분야까지 국영체제로 전환한 상업분야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더구나 그것은 생산담당자들의 자발적 판단보다는 당의 지도에 의한, 위로부터 강행된 것이었다. 그리고 대약진운동은 마오쩌둥의 무모함의 결정판이었다. 2년 만에 농업생산이 급격히 하락, 수 천만명의 아사자(餓死者)를 낳은 뒤 마오는 당의 정책을 류샤오치(劉少奇) 등에게 넘기고 한 발 물러나야 했다.
문화대혁명도 무모함에서는 마찬가지였고, '10년대란(大亂)'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그러나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조반유리(造反有理)'의 논리는 구미 학생운동 등 '否定의 否定을 통한 새로운 창조를 위한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중국인들이 과거 헤어나지 못했던 수 천년 봉건적 인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청소년의 '하방(下放)'운동은 무지에 젖어있던 농촌 수억 농민들에게 근대문명을 접할 수 있게 해서, 농촌경제는 오히려 성장했다고 평가된다.
또 그의 내륙개발정책은 비록 미국과의 제3차 세계대전을 위한 군사적 목적에 따른 것이었고 따라서 투자의 효율성은 나빴지만, 마찬가지로 근대문명을 접할 수 없었던 서부내륙지방을 개발하는 계기를 이루었고, 그 곳에서 수 천년 살아왔던 소수민족들에게 근대화의 혜택을 볼 수 있게 했다. 인민공사 아래 형성되어 사대기업(社隊企業)의 경우에도 인민공사 해체 후 문혁기에 남아 오늘날 그리고 향후 향진기업(鄕鎭企業)으로서 중국경제 성장의 모태로 그 가능성을 이미 보이고 있다. 대체로 문혁 기간에 정치 사회적으로는 '대란'이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착실한 발전을 거두어 농촌과 도시 대중의 소비수준이 상승하였고, 그 상승곡선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개혁 개방정책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4. 결론-종합적으로 본 마오쩌둥
이렇게 볼 때 우리는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선진열강에 대해 전혀 맨 손으로 그 독립자존의 깃발을 높이 들어 관철시킨 마오와 사회주의화를 강행한 또 다른 마오, 그리고 그 시대적 조건들(제국주의, 그 성격변화)을 종합적으로 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예컨대 중국의 대중은 오늘날 대외개방정책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경제와 적극적 교역을 진행하고 있는데, 그 시절 장제스정부 하에서는 왜 그것을 거부했는가와 같은 물음이 제기될 수 있고,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그러한 전반적 정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가운데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대구대신문, 2000년 4월 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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