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마르크스주의 유입과 毛澤東의 사상
안동대 사학과 안중은
Ⅰ. 들어가며
Ⅱ. 20세기초 중국의 사회
Ⅲ. 사회주의 사상 전파와 3대계파
1. 무정부 사회주의
2. 길드 사회주의
3. 마르크스 사회주의
Ⅳ. 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1. 러시아 「10月革命」과 그 영향
2. 독립청원의 실패와 민족운동의 방황
3. 중국共産黨의 창당
Ⅴ. 마르크스주의와 毛澤東
Ⅵ. 毛澤東의 사상
1. 인간과 교육
2. 농촌과 도시
3. 군중노선
4. 부단(不斷)혁명
Ⅶ. 나오며
Ⅰ.들어가며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던 중국이 세계를 향해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의 잠재력과 거대한 시장으로서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세계는 근현대 중국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중국과 근접해 있는 우리나라는 아직도 분단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커다란 틀을 유지하려고 하는 중국과의 교류를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있다. 때문에 중국 근현대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갈증이 우리에게는 더욱 절실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근대사는 서양 열강의 침략과 그에 대항하는 중국인들의 처절한 몸부림으로 점철되어 있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고 국가를 재건할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주의는 민중 속으로 퍼질 수 있었다. 20세기 초에 중국에 처음 소개되어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던 사회주의사상은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성공으로 끝난 후 급속도로 중국에 파급되어지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중국의 사회주의자들은 중국을 사회주의 이념에 부합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고 그 결과 중국은 1949년 共産黨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에 이른다.
이 글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중국 유입과정과 共産黨 지도자인 毛澤東이 마르크스 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여 중국화시켜 나가게 되는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Ⅱ. 20세기초 중국의 사회
근대중국에게 있어 사회주의사상의 발생은 국력이 쇠약해짐으로서 조성된 민중의 각성 그리고 서구사상의 유입이 그 원인으로 이들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민국초기에 시행되었던 두 차례의 反動政治(遠世凱의 帝制運動과 張勳의 復辟運動)와 軍閥政治,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아래 전개된 극렬한 침략행위는 중국을 내우외환의 상태에 처하게 함으로써 중국 민중의 위기의식은 따라서 팽배해지게 되었다. 이런 혼란한 상황아래 일부 사명의식을 가진 지식인들은 중국의 위기를 구제하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民主」와 「科學」을 사상적 준거로 한 전면적 서구화론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 접촉하고 있는 서구가 결코 귀감이 될 수 없다는 데서 서구열강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생겨나고 이에 지식인들은 보다 효과적인 구국행동을 전개하기 위해 유력한 참고기준과 지도이론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20世紀 초 중국이 「現代化」를 위하여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는 다음의 세 가지였다. 첫째는 민주화문제이다. 당시의 중국은 專制王朝의 支配體制下에 있었으며 「臣」과 「民」의 예속관계는 분명하였다. 민중은 서구의 진보적 문명의 자극을 받아 점차 지식인 중심의 민권쟁취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둘째는 民族解放問題이다. 아편전쟁이래 서구 열강이 중국영토를 분할하면서 민족해방운동은 시작되었는데 주권회복이 당시의 목표였다. 20세기 초 민족해방운동의 방향은 대외적으로는 英․日 등 제국주의의 침략에 대한 저항운동이었고, 대내적으로는 이민족지배에서 벗어나 한족해방을 쟁취하려는 민족주의 운동과 滿淸封建王朝를 타도하려는 민권주의운동이 결합되어 있었다. 셋째는 국민 생활수준의 향상문제이다. 중국은 인구가 조밀한 농업국가로 토지제도에서 파생된 사회빈부격차 및 지주의 농민착취는 농민생활을 곤궁에 빠뜨려 비참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지식인은 사회경제체제의 개혁필요성을 절감하였고 이는 지주의 수탈에서 농민을 해방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5․4시기 중국의 일부 지식인은 위와 같은 현대화를 추구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수용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의 대표적인 진보지식인 李大釗가 가장 관심 있었던 문제는 “신중국의 건설”․“중국 민중의 미래의 광영”으로, 사회주의 중 특히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에 심취하였으며 레닌이 주장하는 “낙후된 식민지 국가는 반제국주의 운동을 진행해야 한다”는 혁명이데올로기에 매료되어 ‘마르크스주의의 전문가’가 되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에 기초하여 중국 사회를 분석하였는데 “국제 자본주의의 압박은 전 중국인을 무산계급으로 바꾸어 놓았고 중국인민은 全 세계범위의 무산계급 혁명․민족해방운동인 계급투쟁에 참여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볼셰비키黨이 신봉하는 마르크스 사상으로 자본주의국가를 비판하고,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관계를 분석하였을 뿐 아니라 이를 혁명건국의 지도적 이론으로 인식하였다. 그러므로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벗어나서 강한 국가를 건설하려는 지식인들에게 이 이론은 자연히 큰 호기심을 갖게 하였고 또한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새로운 방안으로 새롭게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국가와 식민지 사이의 모순이 내재되어 있던 당시 상황에서 중국의 민족해방운동과 맥을 같이하는 反外勢主義가 자연스럽게 결합함으로서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강력한 혁명이념으로 승화하였다.
Ⅲ. 사회주의 사상 전파와 3대계파
중국의 지식인들은 구미 민주국가에 대해 실망하고 군벌정치를 혐오하게 되면서 새로운 중국의 미래를 찾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은 사회주의가 구국의 길이라 인식하고, 각종 사회주의 학설을 동경하기 시작하였다. 사회주의의 유파 중 정부와 권위일체를 반대하는 무정부 사회주의, 개혁을 주장하고 계급투쟁을 반대하는 길드 사회주의, 개혁을 반대하고 계급투쟁을 주장하는 마르크스 사회주의 등의 3대계파를 지향하였다.
1. 무정부 사회주의
사회주의 사조 중 무정부주의 사상이 가장 먼저 중국에 수용되었으며 20세기 초 이 사상은 이미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07년 6월 프랑스에 유학중인 학생들은 파리에서 ꡔ新世紀ꡕ를 발간하였고1) 일본 유학생들은 1907년 6월 「社會主義講習會」를 동경에 결성하고 ꡔ天義ꡕ報2)와 ꡔ衡報ꡕ3)를 발간하며 정치혁명을 제창하였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 혁명을 선전하였다. 1909년 이후 무정부주의 사상은 중국에서 더욱 더 왕성하게 발전하였다. 1913년 劉師復이 廣州에 「醒社」를 설립하며 그가 제창한 「12개 항목의 금지조항」이 全 중국에 유명하였는데4) 그것은 이상사회에서의 인간상을 몸으로 실천하기 위해서였으며, 그들의 엄격한 금욕주의와 간소 청결한 사상은 청년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무정부주의자들은 민국 초기 혼미한 정치에의 혐오로 인해 서방의 학설을 빌려 “사회상에는 정치의 조직과 법률이 불필요하며 개개인은 도덕으로 인류간의 평화를 유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창도자 劉師復이 1919년 3월 27일 폐병으로 서거한 후 그 당파는 점차로 소실되었다.
무정부주의는 10월혁명을 전후하여 그 공격대상이 뚜렷하게 구별된다. 즉 10월혁명 이전에는 주된 공격대상이 군벌통치 계급이었으나, 10월혁명 이후에는 그 대상이 마르크스주의자로 바뀌었다. 러시아혁명이 크로포트킨5)을 포함한 무정부주의자를 공격하였으므로 반전제․반권위․반계급의 기치를 내세우고 10월혁명이 계급투쟁을 제창하는 것을 비평하였다. 또한 소련 共産黨을 「식인」의 「강도주의자」라고 비난하며 볼셰비키에 대한 비난을 전개하였다. 1917년 5월 북경대학의 무정부주의자들이 ꡔ자유록ꡕ을 출판하여 무정부 사회주의를 선전하는 간행물을 출판하게 되면서 아나키즘운동은 중국북방에서 다시 활약하기 시작하였다. 1919년 「5․4애국운동」부터 1920년대 초기까지 무정부 사회주의의 단체와 간행물이 신사조와 사회주의의 명목 아래 진일보한 전파 기회를 얻게되어 전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출현하기 시작했었다.6)
5․4시기에 성립되었던 무정부 사회주의 단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회원의 자율성에 기초한다는 조직원리를 기본으로 하였으므로 인원이 적고 조직이 산만하였으며 사상과 행동의 일치성이 결여됐다는 점, 그리고 離合集散이 빈번하였고 존재시간이 짧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는데 이러한 사실은 무정부주의운동이 전체적 통일성을 갖고 효과적인 운동세력으로 발전하는데 장애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기본관념 즉 국가․권위․정치를 폐지하고 도덕을 강조하는 등의 주장은 5․4시기 신문화운동의 의미를 풍부하게 하는 데에 영향을 끼쳤고 신문화 지식인들의 사회변혁을 갈구하는 변화심리를 반영하고 있었던 한편, 중국공산주의 운동의 주도사상 즉 구질서에의 도전․진보와 현대화에의 갈구․군중운동 및 혁명의 순결의식 강조 등은 모두 무정부 사회주의자들의 선전과 상관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2. 길드 사회주의
길드 사회주의는 개량 사회주의라고도 불리는데 1919년에서부터 1920년대에 梁啓超․張東蓀․張君勵․蔣方震 등이 중심이 되어 중국에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 사상은 중세유럽의 길드사상을 현대의 자본주의사상․무정부 공단주의 사상7) 등과의 혼합을 도모하여 노동자들이 반드시 계급투쟁을 통하지 않고도 압박에서 벗어난다는 것을 주장하는 일종의 자본주의 개량사상이다. 단순노동자와 공정기술인원이 연합하여 산업의 동업연합을 조성하여 평화적인 즉 내부로부터의 감독을 실행하는 방법이다. 길드 사회주의자는 전체 노동자를 길드로 조직되게 하면 이는 現行의 一切組織을 대체할 것이며 평화적으로 자본주의를 소멸하고 노동자를 해방하게 될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길드 사회주의의 핵심은 당시 상황에서 사회개조의 방법 즉 사회혁명이냐 사회개량이냐는 문제에 초점이 맞추어졌는데 자본주의가 붕괴된 후 사회주의로 전환된다는 발전방법을 인정하면서도 자본주의의 우선적 발전을 주장하며 급진적인 사회혁명을 부정하고 점진적인 개량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길드 사회주의의 중견인물이 중국 국내의 정치계파 중 硏究系에 속했는데 그 계파가 정치무대에서 세력을 잃음으로써 길드파는 중국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3. 마르크스 사회주의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주의 중에 가장 환영을 받았다. 중국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전파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초부터지만 마르크스주의자의 조직은 10월 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성립되었다. 10월혁명 후 사회주의 학설에 심취했던 중국 지식계는 적극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매료되었으며 그 주된 원인은 볼셰비키黨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적색정권을 건립했다는데 있다. 당시 중국인은 전제적인 짜르정부의 전복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체계가 그 효용을 발휘했기 때문이라고 인식하여 중국 지식인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연구의 흥미를 직접적으로 자극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毛澤東도 「論人民民主專政」에서 “10월혁명의 총소리는 우리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날라다주었다”고 찬양한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10월혁명은 마르크스주의의 구체적 실천을 선전하였고 은연중에 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서 왕성하게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추진력을 제공한 셈이며 마르크스사상의 전파에 신기원을 이루게 하였다.
5․4시기에 있어 마르크스주의의 전파과정 중 李大釗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은 당시 청년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전문가」로 인식되어 있다. 그는 잡지를 간행하여 마르크스학설을 선전하는 외에도 연구회조직과 대학강의8) 등 방법을 통해 그 학설을 고취하였다. 그러므로 5․4시기 李大釗의 명성과 그 영향력은 같은 시대 마르크스주의를 선전․소개하였던 기타의 지식인들을 훨씬 상회하고 있다. 李大釗와 같은 많은 지식인들은 각종 간행물들을 통해 마르크스주의의 이론과 학설을 소개하였지만 실제로는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중국 전파는 1919년 이전까지 그 영향력이 극히 미약하였고 1921년 7월 중국共産黨이 상해에서 창당된 후에야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陳獨秀가 주관하는 ꡔ新靑年ꡕ은 第7권 第6호부터 공산주의 이론을 전파하는 잡지로 성격을 바꾸었다. 그 후 共産黨원은 각 지역에 ꡔ共産黨月刊ꡕ․ꡔ嚮導ꡕ․ꡔ先驅ꡕ․ꡔ中國靑年ꡕ․ꡔ前鋒ꡕ․ꡔ勞動ꡕ 등 간행물을 창간하였으며 또한 인민출판사를 설립하고 ꡔ馬克思全書ꡕ를 출판하였다.9)
중국 共産黨 창당 이후 마르크스 사회주의는 각종 사회주의 사상 중 주도권을 잡게 됐는데 이 사상이 黨 탄생에 사상적․이론적 기초를 형성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상에서 비추어 볼 때, 민국 초기부터 중국 사상계는 외환으로부터의 자극과 시대의 각오로 공전의 변화가 생겨났음을 알 수 있다. 5․4시기의 지식인들은 서양학습을 통하여 중국을 개혁하려 하였고, 이 과정 중에 사회주의를 발견하고 중국의 문제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어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특히 이러한 신사조의 영향으로 청년학생들은 직접적인 정치활동에 휩쓸리게 되었는데 그들은 구국하기 위해서는 군중의 일치된 행동이 있어야함을 각성하고, 급진사상에 물들어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에 가서 노동군중을 조직하였다. 또 그들은 많은 평민학교를 설립해서 노동자를 교육하는 등 사회주의 혁명의 조직에 기초를 닦기도 하였다.
Ⅳ.사회주의 사상의 확산
1. 러시아 「10月革命」과 그 영향
20세기초 러시아에서는 1905년부터 1917년 사이에 연속적으로 세 차례의 혁명이 발생한다. 짜르정부의 보수적․전제적이며 부패․무능 등의 원인 외에도 혁명과정 중 농민․도시 노동자․지식계급 등 주체세력의 흥기는 19세기 후반기 러시아 사회주의의 발생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특히 지식계급은 1870年代에 「민중속으로」라는 운동을 주도하였고 곧이어 출현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농민 외에 신흥의 도시 노동자 등 무산계급층을 규합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의 역량을 과시하였다. 1917년 10월 25일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黨이 유약한 임시정부를 전복시키고 소비에트정권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을 역사적으로 「10월혁명」이라 부른다.
중국에서 10월혁명을 칭송한 최초의 선전가는 李大釗이다. 1918년 7월부터 11월 사이에 그는 「法俄革命之比較觀」․「庶民的勝利」․「Bolshevism的 勝利」 등을 발표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원리를 소개하여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10월혁명이 성공했을 당시 중국은 각파군벌이 각축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遠世凱가 사망한 후 중앙의 정치권력을 좌우했던 군벌은 단기서였다. 그는 1917년 독일에 선전포고하고 1차대전에 참가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과 결탁하여 차관과 지지를 얻어 무력으로 국내통일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였다. 10월혁명 성공 이후 일본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을 간섭하고 시베리아 지구를 침략하려는 음모에 중국을 끌어들였다. 1918년 3월 段祺瑞는 내각총리의 지위에서 일본과 차관을 협의하며 이른바 중일공동방적군사협정을 성립하여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략하는 간섭전쟁에 단서를 만들었다. 이러한 매국행위는 민중들의 반대를 야기시켜 같은 해 5월 군사협정을 체결하자 북경의 학생은 반단시위를 거행하며 협정폐지를 요구하였다. 민중의 반군벌정서는 정치적 행동으로 큰 주목을 받았다. 북경군벌은 민중의 반항을 제지하고 간섭전쟁에 참가한다는 구실로 시베리아에 출병하기 위하여 강력히 10월 혁명을 비방하게 되었고 과격화를 비난하는 내용들이 군벌들의 관문서와 신문들에 충만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 李大釗가 10월 혁명의 성질과 의의를 기술한 논문을 발표하여 군벌의 선전아래 형성된 비관적․회의적 태도를 불식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군벌의 선전에 대하여 직접적인 반격을 가하여 반군벌의 민중시위를 지지하였으므로 자연히 당시의 정치투쟁에 호응하게 되었다.
1918년 10월 중국 민중의 반단투쟁과 군벌 내부의 파벌투쟁으로 段祺瑞는 내각총리의 지위는 잃었지만 여전히 참전 독판으로써 중앙 정국에 영향을 끼치는 실력파였다. 1차대전 종결 이후 段祺瑞는 중국이 전승국이 된 것을 자신의 공로로 돌리고 자신의 정치자본을 증강시켜 재차 중앙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李大釗는 단계군벌의 기도를 폭로하고 중국은 전승국으로 자처할 필요가 없음을 지적하였다. 李大釗는 1차대전의 종결은 10월 혁명의 결과라고 지적하며 10월 혁명은 세상에 가을이 왔음을 알리는 오동나무 잎에 불과하다... 이 세계의 군중운동에서 역사상의 잔여물인 황제․귀족․군벌․관료․군국주의․자본주의 등 새로운 운동의 전진을 방해하는 것들을 반드시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몰아내야 한다... 지구의 도처에는 반드시 볼세비즘의 승리의 깃발이 나부낄 것이며 도처에서 들리는 것은 모두 볼세비즘의 승리의 노래라고 희망에 차서 선언하였다. 李大釗의 문장은 중국인이 10월 혁명 후에 발생했던 일시적 혼란 때문에 세계조류를 대표하는 혁명을 무시하지 말 것을 경고하며 북경군벌의 음모를 불식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또한 정치개혁 요구의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민중의 정치적 각성을 제고시켜서 당시의 정치투쟁에 직접 참여하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2. 독립청원의 실패와 민족운동의 방황
1917년 말부터 1919년 초까지는 제국주의의 압박을 받는 약소 민족국가들에게는 자극과 희망의 시기였다. 특히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이후 레닌이 공포한 「약소민족에 관한 해방선언」과 베르사이유 회담 중 윌슨이 발표한 「민족자결원칙」은 약소 민족에게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표면적으로 볼 때 레닌정부가 공포한 일련의 민족자결에 대한 전술적 선언들은 선동성과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의 정세로 볼 때 신생 레닌정부의 실력과 권위는 국제정치에 영향을 끼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약소 민족의 관심은 자연히 윌슨의 민족자결원칙과 미국정부의 태도에 집중되었다. 중국의 또 다른 대표적 진보지식인 陳獨秀는 ꡔ每週評論ꡕ 창간호에서 대외적인 독립․평등의 요구를 제출하고 윌슨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평가하며 공리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베르사이유 회담은 새로운 국제질서를 건립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던 것이므로 협약국과 동맹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의 주요 내용은 독일과 헝가리․오스트리아의 해체문제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었다. 따라서 회의에서 이른 바 민족자결의 원칙은 전승국 임의로 해석되어서 피압박 약소 민족의 민족해방과 독립문제는 완전히 배제되었던 것이다. 이로부터 약소 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은 방황과 침체기에 빠지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레닌정부는 약소 민족에 관한 해방선언 등 일련의 전술성 선언을 통해 선전과 선동을 강화하고 세계공산주의혁명을 이끈다는 명목 아래 1919년 3월 「코민테른」을 창설하여 유럽혁명과 기타 식민지 국가의 민족해방운동을 선동하였다. 또한 레닌정부는 러시아주변의 동방국가 및 압박받는 여러민족들에게 우호적이고 전력으로 원조할 것이라는 외교정책을 취해서 서구열강에 실망한 약소국가가 러시아편에 가까워지게 하였다. 실제로 1919년 7월 이후부터 이듬해까지 당시 외상대리였던 카라한을 통해 제정 러시아가 획득한 중국에서의 모든 이권을 포기한다는 「중국국민․서남정부 및 북경정부에 보내는 선언서」를 발표하여 중국 민중의 혁명투쟁을 적극 지원할 것임을 약속함으로써 소련의 대중국정책은 중국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상해․북경․천진의 일간지들은 이 소식을 일제히 보도하고 「세계인류사에 전무했던 의거」라고 칭송하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서방 국가에 크게 실망하고 있었으므로 혁명 후의 소련에 주의를 기울이며 레닌을 윌슨과 대체하여 공리와 정의의 화신으로 인식하며 친소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는 레닌정부가 내전과 외국의 무력간섭으로 약해진 국가안전을 도모하기 위한 현실적 수요에서 채택한 정책이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이것은 식민지․반식민지 민족해방투쟁을 빌려 반제투쟁을 유럽의 무산계급 혁명과 결합하여 볼셰비키 혁명을 세계화하려는 일종의 의식형태상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다. 레닌정부와 코민테른의 선전과 선동 그리고 그들의 이념상․물질상의 지원공세 및 유혹으로 일부 약소 민족국가의 지도자들은 소련에 경도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친소의 결과 피압박 민족국가의 민족운동에 사회주의의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고 또한 좌우익의 분열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중국의 지식인들은 1차대전 때 서구의 사상․문화를 국내에 소개하였는데 그들의 서구화론은 「科學」(새선생)과 「民主」(덕선생)로 표현되며 이것으로써 중국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삼으려했다.10) 그들은 영국․프랑스 등 협약국이 민주와 인도주의를 대표하며 독일 등의 동맹국은 군주와 침략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파악하였고 따라서 공리․정의를 대표하는 협약국과 침략․강권을 대표하는 동맹국의 전쟁으로 세계대전을 인식하였다. 그러나 베르사이유 회담의 결과 중국 지식인들은 열강에 의지하여 중국을 독립시키려는 환상을 깨고 실제행동으로서 민족해방의 의지를 관철하려 하였다. 5․4시대의 지식인들은 기대가 실망으로 바뀐 현실외교로 인하여 자유․진보․민주를 대표하는 서방 국가가 중국을 침략한다고 인식하게 되었고 중국이 제국주의의 위협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서 구국적인 행동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따라서 자본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생긴 각종 사회주의 이론은 그들이 볼 때 자본주의국가를 반대하는 의미를 가지므로 제국주의에 반항하는 지도이론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자본주의사회를 비판하며 제국주의 흥기는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최고봉을 이룰 때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으로 해석하였으며 서구열강의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침략의 원인이라고 인식하여 반제국주의의 지도이론이 되었다.
베르사이유 회담과 「5․4애국운동」은 결코 중국 지식인을 직접적으로 마르크스주의의 길로 밀어 넣은 것은 아니지만 일단의 지식인이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도록 준비상태를 만들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볼 때 사회주의는 서방 기존의 정치와 사회질서를 부정할 뿐 아니라 중국과 열강의 관계까지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중 마르크스의 이론은 비판과 해석의 능력이 가장 풍부하여 비교적 쉽게 중국에 수용되어 사회주의가 성장하는 온상을 형성하게 되었다.
3. 중국共産黨의 창당
중국에서의 사회주의는 5․4시기에 전파되었고, 당시의 사회환경은 共産黨의 활동에 상당히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중국의 전통사상이 광범위하게 공격을 받고 파괴되었는데 이렇게 격렬한 반전통 기운은 사회주의 이론의 전파에 확실히 유리하였다. 더구나 중심사상이 수립되어있지 않았을 때 서방의 각종 사상이 중국에 분분히 유입되어 그중 사회주의가 일단의 지식인들의 사상적 진공상태를 채워주었고, 또 5․4운동 중 지도적 인물들이 후에 중국 共産黨의 발기인으로 되어 이것이 당시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둘째, 5․4시기는 중국에서 반제국주의가 가장 고조됐던 시기로 당시 소련 共産黨은 공동으로 제국주의를 타도할 것을 선전해 중국의 사회심리에 영합되었으며 이는 또 일단의 지식인들이 심리적으로 소련에 경도되게 하였다. 셋째, 1차대전 기간에 중국의 공업은 상당한 발전을 이루어 노동자계층이 형성되었고 노동자의 계급의식과 반항능력은 은연중에 군벌과 제국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단체로 성장하였다. 중국 共産黨의 활동은 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로 볼 때 노동자계층의 돌출은 중국 共産黨의 발전에 사회적 조건이 되었다.
1921년 7월 중국 共産黨은 코민테른의 지도 아래 상해와 절강가흥의 남호에서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하고 黨의 강령과 결의를 통과시켰으며 중앙영도기구를 확정하고 정식으로 중국 共産黨의 탄생을 선언하였다.
Ⅴ. 마르크스주의와 毛澤東
毛澤東11) 사상에 대해 중국共産黨에서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본원리에 근거하고 중국의 오랜 혁명실천이라는 독창적 경험이 만들어낸 이론으로 중국의 실정에 부합하는 과학적 지도사상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보편원리와 중국혁명이라는 구체적 실천을 상호 결합시킨 산물로 파악하고 있다.12) 중국적인 길을 강조한 毛澤東 사상은 중국혁명의 과정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사실 중국혁명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서구 열강의 침략과 도전으로 인해 비롯된 중국의 전통적 질서와 세계관의 붕괴를 극복하고 정체감을 회복하기 위한 중국의 대응형태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毛澤東 사상은 아편전쟁 이후 계속되어 온 중국인들의 사상적 모색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아편전쟁 이후의 개혁 움직임은 洋務, 變法 등 청조라는 전통적 체제 내부에서 처음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辛亥革命을 전후해서는 서구적 민주주의 체제의 수용이 적극 검토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움직임은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틀 속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것들이었으며 따라서 반식민, 반봉건적 상황에 시달리고 있는 중국의 구원을 위해 충분한 것이 되지 못하였다. 그 뒤 陳獨秀 등이 주도한 신문화운동에서는 전통이 부정되고 그 대체물로 다양한 서구의 사상이 모색되었지만 5․4운동과 러시아혁명을 통해 중국의 구원을 위한 희망으로 여겨졌던 서구가 바로 중국의 타락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으며, 러시아혁명의 직접적인 자극과 함께 중국의 사상계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관심의 폭을 넓혀 가게 되었다.
毛澤東의 사상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그의 특별함은 당시 중국의 마르크스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소련의 지도와 노선을 거부하고 중국의 특수한 상황에 따른 새로운 방식을 주장한 데 있다. 毛澤東 사상의 이러한 특징은 혁명 당시 共産黨 내의 권력다툼과도 어느 정도 관련을 맺고 있다. 즉 毛澤東의 사상을 중국적인 마르크스주의로 이론화하기 시작한 것이 1937년경이었는데 당시가 王明 등 소련유학파와 대립하고 있던 시기임을 감안한다면 보다 정통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적 입장을 갖는 그들에 대해 중국의 특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는 일은 당내의 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한 정치적 무기가 될 수 있으며, 이는 또한 이후 혁명 과정에서 중국 共産黨에 대한 모스크바와 코민테른의 지시와 간섭으로부터 이념적, 조직적 독립을 확보하는 데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毛澤東 사상의 이러한 측면으로 인해 共産黨 내에서 毛澤東이 권력을 장악해 가는 과정은 바로 당 내부에서 毛澤東이 교리적 소외를 극복해 가는 과정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중국혁명의 역사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毛澤東 사상의 非교조직인 특징은 그것이 혁명이라는 구체적 경험을 겪으면서 형성되어 온 탓에 매우 현실적이며 유연성을 갖는데서 그 주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다시 말해 아편전쟁 이후 중국인들이 다양한 서구사상 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반식민, 반봉건적인 현실로부터 근대적이고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이루어내려는 현실적 필요성 때문이었으며 마르크스-레닌주의 역시 부국강병을 위한 '도구적 유용성'이라는 기준에 의해 받아 들여졌다는 데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교조적이고 정통적인 것과 구별되는 毛澤東 사상의 특징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실제로 毛澤東은 "우리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공부하는 것은 그것이 보기에 좋다거나 어떤 신비한 것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그것이 매우 유용하기 때문이다"13)라고 말한 바 있다. 중국적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毛澤東의 최초의 명백한 언급은 1938년 10 월 『中國共産黨在民族戰爭中的地位』라는 글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毛澤東은 우리들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주의자로서 역사를 단절해서는 안 된다. 공자로부터 손문까지의 역사를 모두 결합하고 그 가운데의 귀중한 유산을 계승하여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반드시 우리 나라의 구체적인 특징과 결합하고 일정한 민족적 형식 을 거친 후에야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중국에서 구체화되고 그 모든 표현 속에는 반드시 중국적 특징을 가져야만 한다고 말했다. 毛澤東의 이러한 표현은 아편전쟁 이후 끊임없이 부정되어 온 중국의 전통이 毛澤東에 이르러 새로운 형태로 마르크스주의와 결합되고 있으며, 외래사상에 대한 맹목적인 수용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중국적인 것으로 토착화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그 뒤 1940년 에 발표한 『新民主主義論』에서 보다 분명한 어조로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서 毛澤東은 소위 전면적 서구화(全般西化)의 주장은 잘못된 관점이다. 외국 것에 대한 형식적 흡수로 인하여 중국은 과거에 큰 손실을 입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중국에 적용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주의의 보편적 진리와 중국 혁명의 구체적 실천을 완전하고 올바르게 결합시켜야 한다. 즉 민족적 특징과 결합하고 일정한 민족형식을 거쳐 적용해야 하며 주관적이고 공식적으로 적용하려 해서 는 안 된다.. 중국문화는 마땅히 자기의 형식을 지녀야 하며 그것은 바로 민족형식이라고 하여 서구적인 것에서 중국 구원의 희망을 모색한 과거를 비판함과 동시에 혁명과정에서 러시아와 구별되는 중국적 특수성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毛澤東의 사상은 흔히 레닌과 비교되어지는데, 레닌의 사상이 원래 19세기의 유럽사상인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여 그것을 러시아라고 하는 특수한 환경 속에 적응시키고, 보다 높은 형태로 발전시킨 러시아화한 마르크스주의(Russianized Marxism)이라면, 레닌주의를 중국이라는 특정 환경 속에 적응하고 발전시킨 것은 바로 毛澤東 사상이라는 평가이다. 다시 말해 毛澤東은 마르크스주의를 유럽형에서 아시아형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에서 그 업적이 평가되고 있다.
Ⅵ. 毛澤東의 사상
1. 인간과 교육
毛澤東은 노동자의 폭동이 아닌 전쟁을 통해 혁명을 이뤄야 한다고 주장한 최초의 공산주의자 중의 하나였지만 처음 구성된 紅軍은 혁명의식과 사상적 무장이 갖춰진 정예는 결코 아니었다. 홍군은 대부분 농민과 노동자였지만 유민 및 심지어 井崗山의 산적 무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구성원의 잡다함은 이후에도 지속되는데 그 것은 蔣介石 군대와의 군사적 투쟁이라는 상황의 절박함과 아울러 이후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중국 민족주의의 발흥에서 비롯된 탓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毛澤東의 인간관에서 연유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인간관이 사회경제적으로 조건 지워진 계급이라는 틀을 통해 규정하는 것에 비해 毛澤東은 계급적 출신이 정치적 입장과 역할을 필연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교육을 통해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14). 따라서 산적이라고 할지라도 교육을 통해 그들의 본성을 변화시키면 훌륭한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으며 새로운 정치, 사회적 일체감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육을 통한 인간의 가변성에 대한 毛澤東의 믿음은 계급적 관대함으로 나타났다. 「新民主主義論」에서 毛澤東은 국가운명을 결정하는 기본 세력으로 무산계급, 농민 이외에도 지식층과 소자산계급을 포함하였으며 해방 직전인 1949년 6월에 발표한 「論人民民主專政」에서는 노동자계급, 농민계급, 도시소자산계급과 민족자산계급까지 인민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교육을 통해 계급적 일체감을 얻을 수 있다는 毛澤東의 신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毛澤東에게 있어 교육의 중요성은 사상적인 측면이며 많은 지식의 획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毛澤東은 학문과 연구를 통한 전문적인 지식의 획득을 부정하였다. 실제로 毛澤東은 사상개조, 특히 지식인의 사상개조는 우리 나라의 전반적인 민주주의적 변환과 진보적 산업화에 중요한 조건이라고 하여 지식인에 대한 그의 적대감을 드러냈으며, 현실적인 체험과 노동을 통한 농촌형의 현장지식을 보다 강조하였다. 이에 따라 교육은 공산주의의 이상적 인간형의 창조라고 하는 차원에서 사상주입과 육체노동의 중시라는 형태로 전개되었으나, 전문지식에 대한 毛澤東의 경시는 이후 중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장애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2. 농촌과 도시
중국혁명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무엇보다도 혁명주체로서의 농민과 농촌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만큼 농민과 농촌중심의 혁명전략은 중국혁명의 고유한 특징을 대표하는 것이다.
毛澤東은 이미 1925년에 발표한 글에서 농촌의 인구가 중국 전체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극소수의 대지주와 부재지주를 제외한 대다수가 피착취농민이라고 하여 중국 사회의 주요모순이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간의 문제가 아닌 지주-농민간의 것임을 밝혔다. 또한 2년 후에 발표한 글에서는 농민이 단순한 수적 우위를 점할 뿐만 아니라 혁명의 역량에서도 선봉임을 주장하였다.
우리가 민주혁명의 성취를 10으로 본다면, 도시거주자와 군인은 단지 3정도의 비중에 불과하며 나머지 7의 비중은 농촌의 농민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15). 라는 말은 毛澤東이 농민을 혁명의 기반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창조력과 정치적 판단기준의 원천으로 간주하였고 농민들의 자발적 혁명활동과 집단적 잠재력을 찬양한 것이라고 하겠다. 당시 중국의 근대적인 도시들이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놓여있었음을 감안할 때 毛澤東에게 도시는 마르크스에게서처럼 혁명의 무대가 아닌 외부세력의 거점이었다. 따라서 도시는 이질적인 곳이며 농촌은 보다 중국적인, 중국고유의 요소가 보존되어 있는 장소로 이해되었다.
농민의 혁명역량에 대한 믿음과 농촌지역의 상대적 순수성에 대한 중시는 혁명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해방 후 정책추진 과정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문화혁명 중에 제창되었던 3대 차별의 극복은 노동자와 농민, 도시와 농촌, 육체노동과 정신노동간의 차별을 극복하겠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의 해결책은 농촌을 도시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문화적, 육체적 편리함을 제거하고 하방(下放)16) 등을 통해 농촌의 생활양식에 익숙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결국 문화혁명은 도시에 대항하는 농촌의 운동이며 노동자에 대한 농민의 운동이란 성격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도 毛澤東의 이상적인 삶의 근거가 도시적인 것이 아니라 농촌에 놓여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 군중노선
혁명의 과정에서 농민의 혁명적 자발성과 잠재력을 신뢰한 毛澤東은 해방 이후 정책추진과정에서 인민 대중의 자발적 참여에 의존하는 군중노선을 취하게 된다. 毛澤東의 군중노선은 延安의 경험을 통해 확립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안 시절의 경험은 그것이 공산혁명의 승리에 크게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연안정신'이라는 혁명투쟁의 영웅적 전통을 창조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생활은 크게 두 부분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절제, 검소, 근면과 자기희생과 같은 금욕적이고 평등주의적 가치관이 혁명의 추진력으로 찬양되었으며, 다른 하나는 정치적 영역에서 상층의 통제라는 관료주의적 지배를 대신하는 군중노선이 강조되었다. 이러한 연안의 경험은 지도자와 대중의 간격을 좁혀 줄 수 있으며 관료주의의 병폐를 제거 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실제 경제정책의 추진에서 있어서는 자원의 효과적인 배분과 효율성을 제고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 왔다.
연안의 경험이 혁명과정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건설과정에서도 본질적인 것으로 믿고 있는 毛澤東에게, 혁명의 승리가 농촌지역에서 도시로 옮겨지면서 혁명전사들은 관료가 되어 대중과 분리되고 자신의 명예와 이익에만 관심을 갖게되는 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었다. 毛澤東은 「中國共産黨在民族戰爭中的地位」에서 共産黨원은 민중운동 중에서 마땅히 민중의 친구이어야 하며, 민중의 상사(上司) 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많은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스승이 되어야 하며 관료주의적 정객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와 같은 毛澤東의 관료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관료 중심의 계획경제노선과 상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의 교정을 위해 毛澤東은 대중동원과 관료적 특권의 박탈을 추진했다.
그러나 반관료적이고 분권적인 연안의 경험을 통해 형성된 이러한 노선의 전개가 毛澤東의 개인숭배와 권력의 집중으로 귀결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4. 부단(不斷)혁명
마르크스의 역사발전이론이 단계적 발전을 거쳐 공산사회라고 하는 궁극적 도달점을 상정하고 있음에 비해 毛澤東 사상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 는 이와 같은 최종단계의 성취가 결코 완전성을 지닌 고정체가 아니며 대립되는 것들 간의 끊임없는 변화와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 점이다. 『矛盾論』에서 毛澤東은 소위 형이상학적이고 저속한 진화론적 우주관은 고립되고 정지된 단편적인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 유물 변증법적 우주관은 사물의 내부로부터, 사물간의 관계로부터 사물의 발전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사물의 발전은 사물 내부의 필연 적인 자기 운동으로 간주해야 하며... 사물의 운동은... 사물의 내부에 포함된 두 가지 모순하는 요소가 상호 투쟁함으로써 발생한다고 하여 변화를 사물의 본래적 속성으로 간주했다. 또한 1958년에는 "균형 상태는 순간적인 것이고 상대적인 것이며, 불균형상태는 정상적이고 절대적인 것" 이라고 하여 이러한 입장을 보다 분명히 했다. 고정적이지 않은 변화의 상태를 궁극적인 것으로 간주한 毛澤東의 입장에서 볼 때 공산사회라는 것 역시 변화상태의 정지라기보다는 끊임없는 운동과 추구의 과정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毛澤東은 공산사회에서도 여전히 투쟁은 존재할 것임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달성하게 되면 투쟁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공산주의를 달성하게 되더라도 거기에 투쟁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毛澤東의 부단혁명은 공산사회로 중국을 이끌게 할 생산력의 발전을 위한 경제, 기술적 혁명과 정치적 이념적 전선에서의 사회주의혁명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는데 사실 강조점은 후자에 놓였다. 毛澤東은 인간의 의지와 의식에서 변화의 동력을 찾았으며 따라서 발전의 조건으로 순수한 의식의 유지를 위한 사상혁명이 강조되었다. 毛澤東에게 있어 계급은 경제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의식에 따른 것이었으므로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자본가 계급은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사탕발림은 우리 대오 중 의지가 약한 자들을 정복할 수 있다. 이와 같은 共産黨원들은 창을 가진 적은 정복하였으나... 사탕이 발린 포탄의 공격 앞에는 패배하고야 만다고 毛澤東은 일찍이 경고한 바 있다. 따라서 이를 막고 공산주의적 이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계급간의 투쟁, 곧 변혁이 요구되며 혁명은 결국 영원한 자기정화의 과정이 되는 것이다.
Ⅶ.나오며
반외세․반봉건의 민족주의 운동인 「5․4애국운동」이 분수령이 되어 사회주의는 사상의 주류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민족해방의 의지를 관철하는 지도이론이 되었고 또한 反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가장 중요한 무기가 되었다. 10월혁명 이후 소련 共産黨은 마르크스 사회주의의 선전역량을 더욱 강화하였지만 실제 중국에 대하여 중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1919년 7월 25일 소련 외상대리 카라한을 통해 대중국선언을 발표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코민테른의 체계적인 이론․조직의 지도원칙에 따라 중국 共産黨이 1921년 상해에 성립되었는데, 이는 바로 이 시기 및 민심의 경향을 이용한 것이었다. 중국 共産黨의 창당은 이후 중국의 정치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한편 毛澤東은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드려 중국화시켰으며 이를 통해 중국화된 사회주의, 즉 毛澤東 사상을 완성하게 된다. 이러한 毛澤東의 사상과 지도력을 바탕으로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의 건설에 성공하였다. 비로소 19세기 아편전쟁에서부터 이어져온 중국은 혼란의 종지부를 찍게 되었던 것이다. 毛澤東의 이러한 사상은 사회주의 국가 건설 이후에도 중국에서 지도적인 이념으로 이어져 오고 있으며 毛澤東 사후 등장한 鄧小平 및 지도부들에게도 전해져 오늘날의 중국을 유지시켜가는 힘이 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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