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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종교, 사상

[스크랩] 毛澤東 思想이 成立된 時代的 배경과정과 中國 政治社會 전반에 미친 影響

 毛澤東 思想이 成立된 時代的 배경과정과
    中國 政治社會 전반에 미친 影響 硏究

 

중어중문학과  여 동 미
                                      
                   한국방송대학교

 


 
                  目        次

 


         Ⅰ. 序  論
              
         Ⅱ. 毛澤東과 마르크스 主義 
               1. 時代的 激動期 - 毛澤東의 靑年期
               2. 마르크스 主義의 鼓吹와 政治活動

         Ⅲ. 毛澤東의 革命的 鬪爭 科程
                  1. 第1次 國共合作 기간의 農民 運動
               2. 大長征을 통한 階級鬪爭

         Ⅳ. 毛澤東 思想의 成熟과 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
                  1. 延安時代와 毛澤東 路線의 確立
               2. 第2次 國共合作의 決裂과 國民黨 瓦解
               3. 革命의 勝利와 中共의 수립
 
         Ⅴ. 文化革命으로 나타난 體制 葛藤과 毛澤東
             思想의 再評價

         Ⅵ. 結  論

         ※  參考文獻

 

 

 


Ⅰ. 序   論

 

 오늘날 社會形態의 多樣性으로 인해 현실적 가치로 체계를 확립한 歷史의 새로운 의미는 올바른 批評과 硏究의 필요성을 동반한다. 아울러 이웃이 어느 면에서는 나 자신보다 나에 대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環境의 중요성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中國現代史의 새로운 章을 연 毛澤東을 硏究할 필요성은 새삼 그 意義를 論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많은 國際社會가 좋든 싫든 간에 毛澤東 思想의 影響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엄연히 받고 있다는 現實의 反映이다.

 

 또한 毛澤東은 현재 中國에서 그 밖의 어떤 인물보다도 훨씬 더 커다란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다. 이 그림자는 십수억 인구와 몇 세대 中國人의 모든 生活을 뒤덮고 지배해 왔으며 장차에도 오랫동안 거듭해서 硏究될 대상일 것이다.

 

 어떤 歷史적 現象이든 거기에 나타난 史實 表面은 언제나 그를 형상화시킨 배후의 主動 人物과 表裏 關係를 이룬다. 歷史的으로 가려진 뒷면의 내용을 들추어 表面과의 實際 關係를 바로 잡아 주는 것이 史實의 의미를 具體化 하는 捷徑이라면, 人物 硏究가 歷史 硏究의 主要 課題라는 觀點에서 毛澤東에 대한 연구는 現代中國의 이해를 위해 주요한 과제이며 아울러 우리의 입장을 정립할 수 있는 하나의 接近法일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毛澤東 思想의 成立이후 中國에 미친 影響을 알아보고자  Ⅱ.에서는 모택동과 中國의 마르크스 主義의 출발에 대해 살펴보았고  Ⅲ.에서는 農民運動과 大長征을 통한 毛澤東의 階級鬪爭을 정리했다. Ⅳ.에서는 延安時期를 거쳐 성숙된 毛澤東 思想과 革命의 勝利 要因을 밝혀보고  Ⅴ.에서는 建國과 10年에 걸친 文化革命으로 나타난 體制葛藤과 毛思想의 再評價를 알아보았다. 마지막으로 結論 부분에서는 毛澤東이 支配했던 現代中國의 모습을 정리하고 現社會主義 中國의 미래를 展望해 보려 했다.

 

 


Ⅱ . 毛澤東과 마르크스 主義

 

1. 時代的 激動期 - 毛澤東의 靑年期

 

 毛澤東은 1893年 12月 26日 中國 湖南省 湘潭縣 韶山沖이란 산골 농가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淸나라가 沒落을 재촉하는 時代的 激動期인 當時 이 고장은 政府의 행정력마저 잘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지만 中國史에서 湖南의 위치는 重要한 意味를 지닌다. ?湖南사람이 있는 한, 中國은 멸망하지 않는다?는 속담이 전해질만큼 이들 지역민의 排他性과 優越感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毛澤東의 民族主義的 성향이나 학문적인 創意力, 强忍한 實踐性등의 요소는 그를 전형적인 湖南人의 한사람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선량한 어머니와 殘忍한 아버지의 矛盾된 性格을 물려받은 毛澤東은 性格이 强하고 聰明하였다. 毛澤東은  少年시절 고향의 사숙에서 많은 儒家의 經典을 읽었으나 興味를 느끼지 못하였고, 그가 즐겨 耽讀한 冊은 인간의 正面보다 負面을 강조한 中國의 古典的 傳記小說이었는데 특히 그의 思想에 가장 큰 影響을 끼쳤던 것은 그가 몰래 읽었던 「三國志演義」,「精忠兵傳」,「水滸傳」, 「隨唐演義」,「西遊記」등 神奇, 叛亂, 武俠類의 小說들인데 거의 외우다시피 하였다고 한다.

 

 이같은 毛澤東의 讀書 趣味와 그의 행동을 볼 때 그는 中國의 歷史 表面을 이해하기보다는 사회의 허다한 경쟁에서 이기려는 成功에의 숨은 열쇠를 찾기 위해 歷史的 勝敗의 뒷면을 꿰뚫어 보고자 했다. 그 중에서도 勝者의 정치적 지배에 특히 매료되었다.「水滸傳」등의 冊은 그러한 생각에로의 길잡이가 된 셈이다. 그가 政治的 支配過程의 뒷면을 보고 거기에 매력을 느낀 것은 그로서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소망이었으며 가능성을 향한 꿈을 키워 갔다는 뜻이다. 그에게 있어서 저항은 현실을 이겨 내야 할 자신의 必然적 과제였다.

 

 毛澤東은 틈만 있으면 책을 읽고 외워 나아갔다. 淸末 鄭觀應이 쓴 「盛世危言」을 읽고 思想上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하고 농사보다는 공부를 하고 싶은 열망에 16세 때에 고향 부근의 新武소학교인 東山高等小學堂에 入學하였다.

 

 1911年 毛澤東은 長沙로 가서 中學에서 공부하였는데 이 해에 辛亥革命이 일어나 그는 처음으로 孫文의?同盟會?의 機關報인 「民主報」를 보고, 民主共和政體의 수립에 관한 ‘革命綱領?을 듣게 되었으며, 10月 10日 무창봉기 후에 크게 고무 받아 革命軍에 참가하였다.

 

 1912年 1月 1日 정식으로 中華民國이 建立되고 280年을 이어온 大淸帝國이 崩壞되어 戰爭의 危機가 해소되자 辛亥革命의 成果가 袁世凱에 의해 탈취되고 民主共和國의 희망이 사라진 후 毛澤東은 軍隊에서 더이상 발전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半年 동안의 軍生活을 마치고 다시 社會의 물결 속에 뛰어들었다.
 毛澤東은 학업을 계속하여 나라와 민족을 구할 진리를 추구하기 위하여 1912年 봄 省立 第1中學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의 半年은 그의 思想형성에 있어서 지극히 重要한 意味를 지닌다. 곧 中國歷史의 歷代 政治過程을 담은 「資治通鑑」을 通讀한 귀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후에 그는「資治通鑑」에 나오는 많은 인물들을 主觀的 견지에서 辛辣히 비판한다. 여기에서 그가 주장하는 論理的 體系는 理論 槪念이기 보다는 현실 중심의 개념이라는 특징을 가진다.「資治通鑑」을 읽고 얻은 結論으로 자기 나름의 실력을 기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그는 具體的 실천 방법으로 독서에 몰두하여 湖南 도서관에서 半年동안 苦學 생활을 하였다.

 

 이 기간 중에 그는 매일 도서관에 나가 世界地理와 歷史를 위시하여 아담 스미스의 “國富論”, 찰스 다윈의 “種의 起源”, 죤 스튜어트 밀의 “自由論”, 무어의 “論理學”, 스펜서의 “社會學”, 몽테스키외의 “法의 精神”, 헉슬리의 “進化와 論理” 그리고 詩와 로맨스, 희랍 로마의 古典 문예작품에까지 다방면에 걸친 독서를 하였다.

 

 이것은 그의 시야를 넓혀 주어 서구의 民主主義 思想을 접촉케 함으로써 그의 철학 연구에 대한 興味를 불러 일으켰다.

 

 1913年 부터 1918年 여름까지 毛澤東은 湖南 省立 第1師範에서 공부하였다. 毛澤東의 革命 民主主義 思想과 초기의 哲學 이론의 관점은 주로 이 시기에 形成되었다. 이때에 毛澤東은 이미 傳統에 대해 반대하고 正面의 倫理道德 보다는 反面 즉 負面의 권모술수를 더 좋아했다.

 

 그의 革命思想은 갈수록 성숙되어지고 황제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첫번째 작업으로 학식을 넓히고 사상을 다지는 외에 우선 인간적인 인연을 맺어 그들을 자기 목적하의 도구로 이용할 기초 작업을 계속했다. 이른바 軍시절 알게 된 친구인 談俉本과의 談論을 통해 ?황제수업?이라는 실체로서의 구상을 받고 동지를 규합하는 黨의 결성이 그것이다. 毛澤東이 第1師範에 재학중일 당시 국내에는 軍閥의 混戰이 잇따라 湖南은 3차례나 北洋軍閥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日本帝國主義 역시 中國에 대한 침략을 强化하였다.

 

 이러한 內憂外患과 심각한 形勢는 더욱 毛澤東의 애국 열정을 불러 일으켜 청년들을 糾合하여 공동 투쟁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1915年 학생 자치회인 ?學友會?를 發起, 組織한 그는 노동자 夜學을 운영하였는데 몸소 수업과 사무 관리를 함으로써 노동자에 관한 초보적인 경험을 체득하여 勞動者 階級과 관계를 형성하였다.

 

 第1師範 시절 교수였던 양창제의 주선으로 北京大學 도서관에 잠시 몸담았을 때 그곳의 ?철학회?와 ?신문학회?에 가입하여 李大釗, 陳獨秀 등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들과 交流했으며, 이 기간은 毛澤東이 社會主義에 關하여 집중적으로 探究한 기회였다.
이때, 그의 관심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社會主義 革命과는 다른 中國的 특성을 주장한 정통 프롤레타리아 革命의 가능성을 성취할 수 있는지의 여부였을 것이다.

 


2. 마르크스 主義의 鼓吹와 政治活動

 

  1918年부터 1921年初에 걸쳐 毛澤東의 政治思想과 哲學思想은 急擊히 變化하였다. 그는 革命 民主主義者에서 共産主義者로, 觀念論에서 辨證法的 唯物論으로 變貌를 보이면서 마르크스 主義者가 되었다.
 毛澤東의 마르크스주의자로의 變貌는 그가 積極的으로 참가한 政治鬪爭의 實踐, 마르크스 主義의 硏究 學習 및 反마르크스주의와의 鬪爭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이다. 

 

 

 1919년 5.4運動이 일어난 후 毛澤東은 長沙로 돌아와 직접 湖南의 靑年 學生運動에 參加하여 湖南省 學生聯合會를 組織하였다. 또한 1919년 7월 學生聯合會의 機關紙인 湘江評論을 發刊하였으며, 이 機關紙의 編輯長을 맡았다. 5.4運動을 前後하여 反帝, 半封建 鬪爭의 推進과 마르크스주의의 影響아래 毛澤東의 世界觀은 커다란 변화를 보였다.

 

 처음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에 서기 시작한 毛澤東은 蘇聯 10월 革命의 勝利를 讚揚하고  이른바 마르크스주의를 鼓吹하여 암암리에 民衆蜂起를 劃策하는 革命的 急進성을 강하게 나타냈다. 
 그러나 당시 中國에 마르크스主義가 막 傳播되었던 때라 마르크스주의 經典 著作의 飜譯과 紹介가 비교적 적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는 强大한 思潮를 아직 形成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毛澤東의 學習과 理解 역시 限界性을 띠었고, 몇 가지 문제에 있어서 모순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차이를 明確히 區分하지 못하였다.

 

 湘江評論을 통해 발표된 毛澤東의 過激한 革命思想과 煽動的인 言論은 長沙사회에 일종의 革命前夜의 恐怖雰圍氣마저 造成하였고 이로 인하여 獨裁的인 湖南省의 省長 張敬堯로 부터 湘江評論은 不穩思想의 선전물로 指目되어 5號로써 廢刊되고 말았다. 湘江評論 廢刊後 毛澤東은 張敬堯 湖南省長 打倒運動을 展開했다.

 

 여기서 毛澤東은 北京代表로 選出되어 1920년 2월 두번째의 북경길에 올랐다. 북경여행에서 毛澤東은 마르크스주의 經典을 읽었고 러시아혁명에 관한 文獻을 모조리 읽어 思想的으로 마르크스주의 信奉者로 자처하게 된것이다.

 

 그는 湖南省을 北京政府로부터 離脫시켜 獨立시키고 광동에 있는 革命政府에도 歸屬되지 않는 하나의 自治省을 만들자는 湖南改造聯盟을 構想하여 陳獨秀의 支持와 協助를 받았다. 政治的 의도가 명백한 建議書를 발표한 毛澤東은 學生과 群衆을 동원하여 省議會를 解散한다는 구호를 외치며 대대적인 示威를 敢行하였다.

 

 만일 사태의 進展이 그의 意圖대로 進行된다면 적어도 湖南省이라도 通治하는 小皇帝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警察의 彈壓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毛澤東의 湖南省 掌握의 꿈은 水泡로 돌아가고 이 一場의 政治鬪爭에서 실패한 毛澤東은 새로운 미래에 있을 政治的 挑戰을 준비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 硏究會 會員에서 中國 共産黨員으로 轉向, 全的으로 共産黨과 大衆組織을 위한 政治活動에 總力을 集中하게 된다.

 

毛澤東의 마르크스주의 硏究방법은 獨特했다. 즉 原理,原則에 구애됨이 없이 마르크스   理論과 中國의 실제 狀況을 聯關시켜 硏究한 것이다. 無政府主義를 攻擊하고 학생들에게는 마르크스主義를 普及시키는 한편?長沙日報?를 통해 끊임없이 막스.레닌主義에 관한 글을 써 냈으며 “共産黨”이란 日刊紙에 (蘇聯共産黨의 歷史)(레닌의 歷史)(勞動制度의 硏究)등 여러편의 論文을 發表하였다.

 

 理論과 實踐을 똑같이 尊重하는 毛는 자신의 硏究結果를 글로 발표하고 講義하는 외에 1920년 7월 31일 文化書社를 만들었으며 8월에는 自修大學을 세워 마르크스주의의 具體的 실천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文化書社는 온전히 各自의 自修를 爲主로 하는 것이 特徵이었다. 附設 圖書館에는 주로 막스.레닌主義에 관한 書籍과 雜誌들이 所長되어 있어 大學이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共産黨 專門 訓練所와 다름이 없었다.

 


 이는 크게 社會에 물의를 일으켜 不正不軌하다는 이유로 廢校處分을 받았다. 그러자 다시 湘江中學이란 名目으로 開設하여 계속 共産幹部를 養成하는 訓練機關으로 이용되었다.

 

 이밖에도 모택동은 勞,工團體를 組織하였으며 호남 無産階級의 유일한 最高實力者로 君臨한 것이다. 毛澤東은 革命路線을 따라 階級鬪爭을 거쳐 勞農專政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階級鬪爭만이 改革의 유력한 路線이라는 信念으로 共産黨에 加入, 험하고도 먼 “革命의 길”을 떠난 것이다.


 


Ⅲ. 毛澤東의 革命的 鬪爭過程

 

1. 第1次 國.共合作期間의 農民運動

 

 1921年 7月 중국대륙에는 소수 지식인들에 의해 中國共産黨이 창당되었다. 中國共産黨은 間接的으로는 1917年러시아의 볼셰비키 革命과 1919년 중국의 5.4運動에 의해 영향을 받았으나 보다 直接的으로는 1919年 3月에 창설된 코민테른(共産主義 인터내셔날)의 영향을 받아 결성되어졌다.

 

 그러나 당시의 코민테른은 封建的 後進國인 中國에서 미미한 共産黨의 힘으로는 革命을 달성할 수 없다는 판단아래 中國共産黨으로 하여금 國民黨과의 合作을 추진하게 하였다.   創黨初期의 中國共産黨은 1922年 7月 제2차 全國大會에서 國民革命을 돕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國民黨과의 合作路線을 決意했고, 共産黨員들이 個別的으로 國民黨에 가입할 수 있게 하였다.

 

 이에 모택동도 이때 國民黨員이 된 것이다. 孫文은 새로 入黨한 毛澤東을 호남에 보내어 國民黨의 組織을 擴大하도록 指示했으나 그는 表面上으로는 國民黨의 旗幟를 내걸고 실제로는 共産黨 活動에 腐心하였다.

 

 한편 모택동은 1924년 1월 20일 國民黨이 中共黨員의 加入을 허용한 國民黨 改造후 처음으로 開催된 廣東의 國立高等學校에서 열린 一全大會에서 毛澤東은 陳獨秀,李大釗,瞿秋白 등 대선배와 함께 出席하여 候補中央執行委員에 被選되었고 여기서 모택동은 이제까지 숨어살던 秘密活動에서 벗어나 中央의 하나의 政治人으로서 政治舞臺에 당당히 進出, 이름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절대 聰明人”으로서 “皇帝의 길”에 조금씩 접근해 간것이다.

 

 모택동은 國民黨 上海 執行部 비서직과 中共.中央黨 組織部長일을 겸해보면서 특히 관계를 두텁게 하였다. 이런 지방색의 과다한 노출로 상해의 國民黨員들과의 관계가 惡化되자 모택동은 호남으로 휴양차 歸鄕했으나 이는 중앙당의 공직보다는 農民을 비롯한 下層階級에서 진실한 基礎를 닦을 수 있다고 파악한 때문이다.

 

 農民組織化 작업에 성공한 毛澤東은 그의 산 經驗을 통해 師範學校時節부터 막연히 構想해 오던 中國革命運動중에서 차지하는 農民運動의 重要性을 再確認하고 이때문에  共産主義者로서의 毛澤東이 當選되었고 그이 理論과 주장은 사실상 採擇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므로 毛澤東의 실제 勢力은 이미 陳獨秀를 壓倒하고 있었던 것이다. 손수 中共黨을 창설한 領導人物이었던 陳獨秀가 肅淸되자 黨은 잠시 集團指導體制를 채택, 毛澤東의 新路線을 지지하는 瞿秋白,李維漢, 向忠發등 8명의 常務委員에 의해 운영되었다.

 


2. 大長征을 통한 階級鬪爭

 

  中國 共産黨은 1927년 1월 武漢政府를 수립하고 동년 8월 1일에는 朱德,周恩來,賀龍등이 左翼勢力 3만여명을 규합하여 南昌暴動을 시도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고 같은해 10월 秋收暴動도 역시 失敗하여 中共黨은 支離滅裂의 危機에 逢着했다. 28세의 革命家 毛澤東은 黨中央의 蔑視속에서 그리고 끊임없이 追跡해 오는 國富軍과 싸우면서 千여명의 牧場農民을 이끌고 井岡山으로 敗走, 革命根據地를 構築하게 됨으로써 暴動主義,冒險主義 路線은 끝나고 毛澤東의 異端的인 遊擊戰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毛澤東은 兩湖秋收暴動의 실패에서 純農民路線과 武力鬪爭을 경유해야 한다는 것을 節減했다. 어떤 革命도 자기가 掌握한 武力이 없이는 成功할 수 없는 것으로 都市攻擊보다는 農村에 根據地를 만드는 일이 必要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革命鬪爭方法과 실제 經驗은 자신의 心理的 또는 精神的인 面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井岡山을 據點으로 農民大衆을 動員包攝하고 紅軍을 擴大시켰으며 農民의 지지를 獲得하기 위해 土地革命을 斷行하게 된 것이다. 모택동은 大衆의 民心을 휘어잡는데 軍民一致을 强調하고 세심한 主義를 기울인 用意周到한 人物이었다. 勢力을 擴張한 그는 1930년 11월 1일 瑞金에서 제1차 全國소비에트 代表大會를 開催하여 初代主席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38세의 毛澤東은 새로 建立한 소비에트 中央政府 廳舍에서 主席에 就任하니 共産黨에 가입한지 10년만에 名實相符한 皇帝가 된셈이다.

 

 10여년가량 毛澤東의 中共黨 생활을 槪觀해 보면 그는 共産黨員이기는 하였지만 黨權을 爭取할 뜻을 두거나 黨을 위해 獻身할 態度는 보이지 않고 자기나름의 勢力形成을 위해 거의 黨과는 分離되다시피 獨自的인 路線을 志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黨에 대한 露骨的인 不服과 單獨行爲로 인해 그는 세차례의 際黨, 여덟차례의 重謹愼 處分을 甘受해야 했다.
 이제 毛澤東은 독자적으로 成就한 相當勢力의 紅軍과 定式宣布한 政府를 가졌다. 이런 微妙한 易學關係로 中共黨 高位層과 毛澤東 사이에는 금이 가 있었다.

 

 특히 中國의 레닌을 자처하는 호언장대한 李立三과 中國的 막스.레닌 主義를 강조하는 毛澤東 사이에는 理論과 路線이 相反되어 치열한 暗鬪를 벌였다. 中國에는 李濟瀋,陳銘鉤등 失儀한 군인들이 福建省에서 反亂을 일으켜 1933년 11월 25일 또 하나의 人民政府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李,陳政府는 國富軍의 대대적인 討伐로 組織成立 1개월만에 崩壞되고 말았다. 이렇게 事態가 惡化되자 제3국가에서는 中共에 명령 그 失敗의 責任所在를 追窮하여 毛澤東은 다시 瑞金으로 召還,紅軍의 主力과 함께 包圍網을 뚫고 逃避하라는 명령을 받고, 도리없이 자신의 생명과 殘餘勢力을 保存하기 위해 비통한 心情으로 長征의 길에 올랐다.

 

 1927년 제1차 國.共合作이 결렬되면서 國民黨은 1930년 부터 1933년까지 5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작전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과정 중인 1931년에 滿洲事變과 1932년 上海事變이 발생하는 등 日本의 중국에 대한 帝國主義的 侵略이 잇따르자 國民黨의 紅軍 소탕전은 상당한 차질을 빚게 되었다.

 

 한편 이러한 와중에서 紅軍은 國民黨軍의 소탕작전을 피해 1934년부터 1년이상 도피하는 大長征을 敢行하였다. 大長征期間 동안 紅軍은 國民黨軍과의 수차례에 걸친 전투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紅軍은 大長征을 통해 인민들에게 階級鬪爭을 선동하고 소비에트 組織 및 그 통치방법 등을 가르침으로써 사회저변에 공산주의의 土臺를 構築해 나갔다.

 

 毛澤東의 黨內職權은 回復되었고 그의 주장이 모두 옳았음이 實證된 셈이다. 일주일여의 準備期間을 거쳐 12-13만명이 1934년 10월 15일 萬里行軍을 감행하였다. 毛澤東은 國民黨 政府軍의 討伐에 밀려 지루하고도 긴 1년여의 長征 끝에 延安에 도착하였고, 1935년 11월 6일 약 1년간의 長征은 終了되었다.
 長征은 역사가 생긴이래 처음 있는 일로서 全世界를 향해 紅軍은 英雄豪傑이고 帝國主義者들과 그들의 앞잡이인 蔣介石 도배들은 전혀 쓸데없는 것임을 宣言하였다.

 

 

 

Ⅳ. 毛澤東 思想의 成熟과 中華人民共和國의 樹立

 

1. 延安時代와 毛澤東 路線의 確立

 

  毛澤東은 大長征중인 1935년 8월1일 國民黨에 대해 抗日民族統一戰線의 결성을 제의했는데, 이러한 제의는 日本帝國主義를 중국으로부터 몰아내려는 表面的인 이유외에도 共産黨勢力을 재정비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려는 고도의 戰略戰術이 깔려있었다. 당시 중국 국민들 사이에는 反日感情이 彭排해 있었던 반면, 國民黨의 蔣介石은 먼저 共産黨勢力을 제거한 뒤 日本의 침략에 대응한다는 생각에 毛澤東의 이러한 제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1936년 12월 西安事變의 발생으로 인해 國民黨과 共産黨은 1937년 제2次 國.共合作을 하게 되었다.모택동의 遵義에서의 승리는 바로 그때로부터 그가 최고 지도자로 되어가는 과정의 시작에 불과했다.이 때 그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限界的 狀況인 軍事的 指導라는 면에서 능력을 평가 받아 최고 持位와 權力을 公式的으로 장악했다.

 

 연안 도착이후 1936년 初부터 1937년 7월의 中日戰爭의 발발을 사이에 두고 1938년 10월에 中共 第6次 中國共産黨 全國代表大會 召集과 武漢의 陷落에 이르기까지 약 3년간은 中國의 정치상황이 급격하게 변화하여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기 위한 기본 형태가 나타나는 시기다.

 

 모택동은 西安事變이 일어나던 시기에 抗日문제의 政治的,軍事的 側面에 대해 그 자신이 전략을 체계화 하는 노력을 정력적으로 밀고 나간다.
 독자적인 철학적 기초를 중국 공산당에 부여하여 독자적인 정책 방향을 갖게하려는 毛澤東의 시도는 대부분 연안시기에 형성되는데 1936년부터 시작되는 延安時機중에 수 篇의 마르크스 철학에 관한 중요한 소련 책자들이 중국어로 번역되어 毛澤東은 처음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延安에서 공산주의 지식인들 중 훈련된 철학자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소련 사상의 傾向을 알리면서 그들 자신의 著書를 내기 시작했다.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들이 세계 共産主義 운동에 있어 응당히 지도자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毛澤東 자신도 몇편의 논문을 썼다.

 

 1937년 7,8월에 행한 긴 연설을 통해서 그는 [實踐論], [矛盾論]이라는 제목으로 1950년,1952년에야 일반에게 배포를 위해 출판된 글을 내었다. 毛澤東은 [實踐論]에서 心理와 論理의 통일을 주장하고 감각과 지각으로부터 槪念과 判斷, 推理를 거쳐 결국에는 實踐을 위해 奉仕해야 함을 강조하면서 실천을 진리의 표준으로 삼은 辨證法的 唯物論에 立脚한 認識論을 내세웠다. 그는 이 철학적 認識論 가운데서 특별히 직접 경험과 知行統一을 강조하여 “지식을 가지고 싶다면 변혁을 통한 실천에 참가하고 배(李)의 달콤한 맛을 알고 싶다면 직접 먹어 보아야 한다.”라든가 “전쟁을 통해 전쟁을 배운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毛澤東은 또 [矛盾論]을 통해 주요 모순과 모순의 중요한 측면을 말했는데 이는 앞에서 말한 [中國革命戰爭의 戰略問題] 가운데 특별히 강조했던 關鍵的 문제에 대한 결정이라는 생각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 두편의 글에서는 공산주의하에서도 끝없는 변화를 예상하는 論理를 反映하여 흥미를 끌고 있으며, [永久革命論]에서는 이것이 더욱 明確히 드러난다. 그러나 嚴格한 哲學的 견지에서 본다면 그것은 初步者의 것이다 . 3년 후 즉 1940년 초에 毛澤東은 또다른 理論的 論文인 [辨證法的 唯物論]을 썼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 맥없는 것이었으며 소련 哲學冊을 그대로 번역한것 같아, 두번 出版후 出版 中止를 결정했다. [實踐論],[矛盾論],[辨證法的 唯物論]이 毛澤東을 마르크스 철학자로서 資格을 부여하는 전부였다.

 

 아마 그는 많은 중국 사람들이 그를 이론가로 허풍떠는 것보다 스스로의 한계를 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또, 毛澤東의 偉大함이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中國共産黨에게 중국의 조건에 근거한 그의 戰略傳家를 提示했고 중국역사나 중국고전의 문체를 이용하여 共産主義를 中國人民들이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毛澤東의 哲學思想에 있어서 마르크스주의는 中國的 현실과 결합한 산물이며 동시에 마르크스주의의 中國化이기도 했다. 또, 모택동의 유물론 철학은 결코 역사를 해석하기 위한 唯物史觀이 아니라 現實鬪爭에 직접 참가하고 거기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실천의 철학이었다.

 

 이점에서 毛澤東의 辨證法 철학은 또 헤겔이래의 不正에 대한 不正이라는  문제를 핵심으로 하는 철학과 완전히 다르며 오히려 중국의 전통적인 老子, 孫子와 더 관계가 밀접한 철학이었다.

 

 결국 모택동의 辨證法과 認識論은 思辨的 論理나 觀念的 體系와는 거리가 멀고 生活, 實踐, 自覺, 經驗등과 緊密하게 연결되어 있는 철학이었다고 하겠다.

 

 中國的 마르크스주의 또는 마르크스주의의 中國化라는 觀點에서 볼때 黨風,學風,文風 3풍에 대한 整風運動은 가장 中國的 特色을 지니는 중국 共産黨만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整風運動을 시작하면서 毛澤東은 全體的으로는 黨의 形式主義를 批判하고 個別的으로는 ‘外國의 型式主義’를 猛烈히 非難하였다.

 

 思想史的 側面에서 볼때 주의할 점은 毛澤東이 理論과 實踐의 두 방면에서 다 자각적 能動性을 强調함으로써 도덕주의적 정신을 鼓吹시키고 倫理的 觀念을 浮刻시켰다는 점이다.

 

 思想改造라는 문제가 항상 중국공산당의 주요 문제로 浮刻되었던 상황은 이로 인한 것이었다. 思想改造란 처음 提起되던 當時에는  주로 黨幹部와 革命的 知識人에 대한 말이었다.

 

 그러나 中國 建國이후 思想改造, 道德主義는 全人民에 대한 것이 되었다. 建國으로부터 근 30년동안 中國人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毛澤東의 이론은  그야말로 特異한 중국적 産物이었고 中國化된 마르크스주의의 標本이었으며 極度로 高揚된 道德主義 그 自體였다.  道德主義는 생사를 건 中國革命鬪爭 가운데서 용감히 자기를 희생했던 사람들의 崇古한 정신에 대한 讚揚이었으며 동시에 살아있는 勞動者, 農民, 知識人들의 汚染된 정신에 대한 批判이었다. 

 

 이처럼 毛澤東이 要求했던 思想改造는 생활뿐만 아니라 精神的 領域에까지 미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2년에서 1944년에 이르는 整風運動이 끝날무렵에는 그들 자신의 政治問題를 中國的인 脈絡에서 보게 만드는 習慣을 共産主義者들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1944년까지 중공이 전개한 政治, 經濟, 社會, 軍事의 각 領域에 관한 몇가지의 대운동은 이렇게 하여 중국의 공산주의운동을 그때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단계로 이끌었던 것이다. 旣存의 體制를 철저하게 再編成하고 해방된 大衆에너지를 統合하여,  1942년 말에는 2년 동안의 심각한 困境으로부터 起死回生하는 自立化의 길을 발견했다.   1943년 6월에 “指導方法”에 대한 槪念을 完成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위 “大衆路線”이었다. 毛澤東은 1945년의 “聯合政府論”속에서 “人民戰爭”의 槪念을 軍事的 政治的,經濟的,文化的 脈絡에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毛澤東의 政治槪念의 中核으로 定立되기에 이른 “人民戰爭”의 개념은 이 시기의 특수한 狀況에서의 경험을 기초로 하여 만들어 졌다. 1943년은 毛澤東의 指導權의 완전한 勝利를 확정한 해였다. 抗日根據地 內에서의 毛澤東의 정치지도에 의한 정력적인 大衆動員의 다양한 政策이 效果를 나타냄에 따라 근거지는 차차 심각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中共黨내에서의 革命運動의 象徵化는 한편으로 더욱 廣範圍한 國內的,國際的 環境의 변화에 의해서 促進되었다. 國共關係의 惡化는 毛澤東으로 하여금 점차 스스로를 蔣介石에 대한 세력으로 강하게 의식케 했던 것이다.
1945년 봄에 개최된 中共 제7차 全國代表大會는 이렇게 하여 延安時期를 통해 毛澤東이 염원해 온 黨의 建設過程의 長征을 보여주게 된다.

 


2. 第2次 國共合作의 決裂과 國民黨 瓦解

 

 1937년에서 1946년까지 약 10년간 지속되었던 第2次 國共合作은 國?共間의 대립과 반목, 그리고 共産黨의 國民黨 瓦解 戰術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두 차례에 걸친 國?共合作의 결과 共産黨은 방대한 세력과 조직을 갖추게 된 반면, 國民黨은 관리들의 不正腐敗, 軍의 士氣低下, 國民黨政府에 대한 民心離反, 그리고 國?共內戰에서의 敗北등으로 말미암아 부득이 대륙으로부터 臺灣으로 遷都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이후 中國을 둘러싼 다양한 攻勢는 동북을 중심으로 하여 緊迫感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특히 蘇聯軍의 東北 撤收문제와 함께 國共 兩軍의 分爭도 擴大되고 있었다. 毛澤東의 (新民主主義論)이나(聯合政府)를 이론적 支柱로 하는 共産黨은 國民黨의 獨裁政權을 解體하고 제3勢力도 포함한 民主聯合 政府의 수립에 의해 정치의 民主化를 圖謀할 것을 戰後의 國家建設의 基本理念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국민당이 주장하는 범주에서의 國民大會 開催와 憲政移行에 대해서는 中共 뿐만 아니라 民主同盟의 進步的인 제3세력의 사람들로 격렬히 反對하였다. 毛澤東을 중심으로 하는 中國指導部가 내전을 유리하게 전개시키는데 있어서 대중의 지지를 기초로 하는 “意志”의 鬪爭에 최대의 力點을 두었다.

 

 1946년 5월 4일 (土地問題에 관한 지시)는 오히려 대중운동의 과격한 측면을 境界하고 土地改革의 推進에 있어서 富農,中農을 포함한 廣範圍한 대중의 “진정한 도움과 지지”를 얻는다는 中共 중앙의 애매하기는 하나 周到綿密한 배려의 일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國民政府는 전국 각 주요도시에서 일고 있는 市民運動을 정부의 土臺를 어지럽히는 위기로 보고 “社會秩序維持變法”을 공포함과 아울러 彈壓政策을 취하여 그것에 대처했다. 중공군의 군사적인 優勢가 현실화 되자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정치적 사회적 혁명의 하나가 된 中國革命에 對抗할 수 밖에 없었던 국민당의 입장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 國民黨의 敗北는 자신이 뿌린 씨앗을 거두는 通治能力의 限界를 이 시점에서 확실히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지만 그것은 또한 中國現代史의 敎訓的인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毛澤東은 “黨活動의 中心을 차차로 農村으로부터 도시로 이행할 것”을 주장하고 있어, 中共革命路線의 중요한 轉換을 時事하고 있다. 中國共産黨은 국민당 支配하의 대도시를 계속해서 占領하고 전국적인 統一事業에 착수하고 있었다.

 


3. 革命의 勝利와 中華人民共和國의 樹立

 

 國共內戰이 발발한지 1년 반이 조금 지난 1948년 1월부터 國富軍은 攻勢에서 防禦로 轉換하였다. 예상외로 빠른 國富軍의 崩壞로 대륙을 席卷하게 된 중공은 49년 9월 21일-30일 까지 北京에서 人民政治協商會議를 열고 “中華人民共和國 中央政府組織法”과 “人民政治協商會議 共同綱領”을 採擇하고 國旗(五星旗)와 國歌(의용군 행진곡)를 정한다음, 중앙인민 정부 위원회 주석 毛澤東을 비롯하여 6명의 부주석과 56명의 정부위원을 선출함으로써 建國의 준비를 마쳤다.

 

 그리하여 1949년 10월 1일 毛澤東이 北京 天安門 광장에서 “中華人民 共和國 中央 人民政府”의 成立을 宣布함으로써 중국은 毛澤東을 首班으로 한 “人民民主主義 獨裁”의 국가로 탄생하였다. 1949년 10월 中華人民共和國의 수립 이후 40년간에 걸친 中國의 政治過程은 專과 紅 또는 穩健路線과 强硬路線間의 循環反復過程이었다.

 

 이 過程에서 발생한 黨內 權力鬪爭은 中國社會主義 건설에 전면적인 영향을 미침으로써 中國 社會 전체에 충격적인 변동을 초래하였다. 정권수립후 중국이 당면한 主要課題는 革命과 內戰으로 인해 파괴된 國家 經濟를 부흥시켜 新民主主義革命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政治 權力 强化를 위해 中共은 臨時制度의 운용과 群衆動員의 이중전략을 採擇하였다. 이러한 臨時기구의 기초적 整地作業은 52년 말까지 대체로 完了되었으나 새로운 국가 기구는 1954년에 가서야 비로소 마련되었다. 또한 중공 지도자들은 새로운 제도가 마련되기 전에 정치적 강화에 대한 지지를 불러 일으키는 강력한 大衆動員과 예비적 社會改革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中國에서는 1950년 부터 52년 사이에 일련의 大衆運動이 全國的으로 빠른 속도로 계속 전개되었다.

 

 대내적으로는 1950년 6월 土地改革法의 公布이래 52년 말까지 전국적으로 실시된 土地改革 運動으로 地主의 재산을 몰수한 데 이어 1951년 1월에는 새로운 婚姻法을 공포하고 婦人團體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보급운동을 전개하여 傳統的 結婚制度와 사회생활에 있어서의 남녀 不平等의 打破를 시도하였다. 또한 1950년-1953년에 걸친 韓國動亂 중에는 “抗美援助”운동을 벌여 밖으로 反美感情을 鼓吹함으로써 內部的 結束의 方便으로 삼았으며, 이어 1951년에 愛國增産節約運動을 벌이고, 反革命運動, 思想改造運動등을 통해 知識人에 대한 억압과 대규모 肅淸을 단행하였고, 그리고 1951년 겨울부터 52년까지 公務員과 資本家를 겨냥한 三反(공무원의 汚職. 浪費. 官僚主義에 대한 반대), 五反(資本家의 賂物 供與. 脫稅, 國家資財의 截取, 材料 속이기, 國家情報의 截取에 대한 반대)운동을 각각 광범위하게 추진함으로써 정권 수립 이후 갑자기 증대된 공무원의 기강을 세우고 私的利益에 토대를 둔 자본가의 消滅을 준비하였다.

 

 이러한 대중동원 운동은 전체적으로 대중단체의 增加, 정부선전망의 확립, 새로운 적극분자와 당원의 모집, 반혁명분자들의 제거, 그리고 새로운 사회관계의 도입등을 가능케 하였으며,그러한 결과는 또한 중공 정권이 사회주의로 이행하기 전에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당시 중공의 대외노선이 무엇보다도 毛澤東이 표방한 向蘇一邊倒 정책에 따라 소련과의 友好關係 樹立을 최대 목표로 하였다. 그를 위하여 1949년 12월 毛澤東은 스스로 중공 대표단을 인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스탈린과 會談했으며, 다음해(1950년) 2월에는 蘇聯과 相互援助友好同盟條約을 체결하여 이를 자국의 安全保障과 經濟發展의 밑거름으로 삼았다. 한편 政治力 强化와 社會改革, 그리고 經濟 再建의 과업이 어느정도 달성된 1953년 후반부터 中共은 본격적인 국내 건설에 착수하였다. 중공은 경제 건설을 계획하기 위한 제1차 5개년 계획을 이때에 立案하였으며 동시에 憲法 초안의 기초도 추진하였다.

 

 그리고 53년 10월에는 毛澤東의 (過度基의 總路線에 關한 指示)가 발표되어 국내 건설의 기본 방향이 되었으니, 이는 중국의 工業化와 社會主義化를 장기간에 걸쳐 漸進的으로 착실히 성취한다는 溫乾한 路線이었다. 第1次 5個年 計劃은 소련의 원조를 기초로 하고 소련의 경험을 모델로 重工業 우선과 國營企業의 工業力 强化를 특징으로 하였다. 같은 시기에 工業化 정책과 병행하여 중공은 農業 集團化를 추진하였다.

 

 그 결과 初級合作社가 급증하여 56년 말까지 中國의 거의 모든 農家가 集團化 되었다. 第1次 5個年 計劃의 成果는 대체로 刮目할 만한 것이었다. 급속한 경제 발전과 더불어 이 기간에는 정치의 制度化도 함께 推進되었다. 1953년 1월에 착수된 헌법 초안이 1954년 9월 第1期 全國人民代表大會에서 정식으로 “中華人民共和國”의 憲法으로 採擇되었으며, 새 헌법에 따른 고도로 중앙집권화된 黨과 정부기구가 마련되었고 또한 점진적인 社會主義建設의 기본 방침으로서 “過渡期의 總路線”이 채택되었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부터 중국은 소련의 경제건설 방식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獨自的인 社會主義建設路線을 추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중국의 새로운 社會主義建設路線은 1956년 2월에 개최된 第20次 蘇聯共産黨大會에서의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비판으로 가속화 되었다. 스탈린 格下運動으로 인해 자신의 唯一體制 및 思想의 絶對性에 위협을 느끼게 된 毛澤東은 1956년 黨次元에서 學問,藝術,言論 등의 분야에 대한 일종의 자유방임정책인 百花齊放 百家爭鳴運動(一名 雙百運動 또는 鳴放運動)을 전개하였다. 百花齊放 百家爭鳴運動은 毛澤東이 자신에 대한 복종심이 강하고 反官僚的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한 知識人들로 하여금 國家政策에 대한 비판을 받고자 전개한 운동으로서 毛澤東은 이를 통해 人民大衆이 그를 지지해줄 것으로 기대했으나 결과는 오히려 그 반대로 나타났다.

 

 즉, 1956년 9월에 열린 中國共産黨 8전대회에서는 毛澤東사상을 黨의 지도이념에서 삭제시키고 鄧小平을 당총서기에 선출하는 등 毛澤東의 黨에 대한 영향력 제거를 시도하였다. 이처럼 白花齊放 百家爭鳴運動이 毛澤東의 당초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權力 및 思想에 대한 批判 운동으로서 전개되어나가자 중국공산당은 1957년 6월을 기해 이 운동을 反社會主義의 毒草를 제거하기 위한 反右派鬪爭으로 轉換하여 수많은 知識人,政治家,藝術家들을 肅淸하였다.

 

 한편, 1957년 10월 초순 第8期 三中全會에서 정식으로 채택되어 58년 5월 第8期 全體大會 第2次 會議에서 全黨的으로 확인됨으로써 本格化된 大躍進運動은 정책의 기본방향으로 ‘總路線, 大躍進, 人民公社’라는 이른바 “三面紅旗”가 결정되었다. “보다 많이, 보다 빨리, 보다 훌륭히, 그리고 보다 경제적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다”는 구호를 내걸고?15년 이내에 工業生産高에서 英國을 추월한다?는 높은 목표가 제시되었다. 대약진정책의 실행단위는 주지하는 바 人民公社로서, 중국농민은 사상 未曾有의 크기로 철저히 조직되었으며 같은 논리는 도시에도 적용되어 노동시간의 연장과 노동 강화가 농촌과 도시에서 다같이 일반화 되었다.

 

 대약진정책에 대한 비판은 당 내에 일찍부터 있었으며, 그러한 비판은 대약진정책의 실패에 따라 彭德懷 사건으로 露呈되었다. 당시 국방부장 彭은 1959년 7월 廬山회의에서 軍 近代化 論爭과도 관련시켜서 毛澤東의 急進政策을 비판, 정책 전환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중공은 毛澤東의 주장에 따라 59년 8월 중공 8기 8중 전회에서 彭德懷를 국방부장에서 파면하였으나 대약진운동은 정책상 수정이 불가피하였다.

 

 또한 대약진 정책의 실패는 그 추진자인 毛澤東으로 하여금 國家主席을 사임, 그 지위를 劉少奇에게 물려주고 본의 아니게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이는 후에 毛澤東이 文化革命을 일으켜 奪權 鬪爭을 하게 되는 실마리가 되었다.

 

 大躍進期에는 국내의 급진정책이 대외정책에도 반영되어 强勁外交 路線으로 치달았다. 중공의 강경외교자세와 당시의 소련 지도자들과는 다른 毛澤東의 ‘世界 認識’은 中?蘇분열로 발전하여 중국경제를 더욱 곤란하게 하였다.

 

 대약진정책으로부터의 후퇴는 1961년 1월에 개최된 9全大會에서 公式化되었으며, 대약진정책의 실패에 대한 調整? 回復정책을 담당한 것은 국가주석 劉少奇, 당총서기 鄧小平, 북경시장 彭眞 등 이른바 黨權派(實權派)였다. 새로운 경제조정정책의 기조는 농업을 기초로 하여 공업을 발전시킨다는 ‘農業基礎論’으로서 농업 부문의 위기를 治癒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1959-62년 사이에 吳?의 “海瑞罷官” 같은, 毛澤東을 은연중 빗대어 비판한 문예작품이 나왔으며, 물질적 자극에 의한 생산회복 정책에서 毛澤東은 “資本主義 復活”의 위험을 의식하여 새로운 사상 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65년 1월 毛澤東은 이른바 “23개조”를 발표, “금번의 운동(社會主義 敎育運動)의 중점을 당내의 資本主義의 길을 걷고 있는 ‘黨權派’를 청소하고, 도시.농촌의 사회주의 진지를 일층 강화?발전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여 社會主義 교육 운동 속에 이미 文化大革命의 씨가 있음을 암시하였다.

 

 

 Ⅴ. 文化革命으로 나타난 體制葛藤과 毛澤東 思想의 再評價

 

 조정기 후반에 재등장한 毛澤東의 급진적 정치노선은 급기야 1966년에 들어와 中共 史上 가장 중요한 사건인 ‘프롤레타리아 文化大革命’으로 급진전 하였다. 그 정치?사회적인 의의와 영향, 그리고 혼란이 너무도 컸기 때문에 ‘동란의 10년’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문혁 기간은 1949년 중공 정권 성립 이후 중공 내의 많은 기본적인 문제와 모순, 그리고 중공 정치의 특성을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文革의 발단은 1965년 11월 毛澤東의 측근이며 上海市黨委員會 書記인 文藝批評家 姚文元이 “신편 역사극 ‘海瑞派官’을 평함”이란 논문을 上海의 “文涯報”에 발표한 데서 비롯하였다. 이 논문은 “海瑞派官”의 저자 北京 부시장 吳?에 대한 비판뿐만 아니라 조정정책을 주도한 劉少奇, 鄧小平 등 黨 중앙실권파에 대한 極左派의 공격의 시작이었다.

 

 吳?에 대한 비판은 같은해 5월 실권파의 아성으로 불리는 黨 北京市 委員會의 指導層에 확대되었으며, 그 犧牲者 가운데 가장 저명한 인물은 北京市長이며 당 北京市委員會 第1書記인, 劉少奇.鄧小平의 측근 彭眞이었다. 같은 달 (5월) 이러한 급진적 文革을 지도하기 위한 조직으로 당중앙 文革小組가 조직되었고, 6월부터 문혁은 교육기관으로 확대되어 학생을 중심으로 한 직접적인 대중행동의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와 같은 움직임을 촉진하기 위하여 毛澤東은 66년 8월에 개최된 당8기 11中全會에서 “나의 大字報-司令部를 폭격하라”를 발표하였으며, 같은 회의는 “프롤레타리아 文化大革命에 관한 決定”을 채택함으로써 문혁의 타도 대상이 “資本主義의 路線을 걷고 있는 實權派”임을 분명히 하였다. 그리고 이 회의를 계기로 林彪는 毛澤東의 後繼者로 浮上했으며, 急進 左派가 정치적 주도권을 帳幄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8월 18일 “四舊打破”,“破舊立新”,“造反有理”를 외치면서 북경 가두에 나타난 “革命的 靑少年”무리, 곧 이른바 “紅衛兵”도 “16개조”의 산물로서 짧은 시간 내에 전국적으로 擴散, 組織되어 그후 文革 群衆運動의 主動的 勢力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10월이 되자 劉少奇와 鄧小平도 결국 自我批判을 면할 수 없게 되었으며, 紅衛兵의 無政府主義的 自行은 경제의 沈滯와 社會的 大混亂을 惹起시켰다. 홍위병을 중심한 街頭鬪爭 단계의 文革은 67년에 들어서자 실권파 타도를 위한 본격적인 奪權 鬪爭으로 轉換하였으며, 그것이 농촌과 기업, 정부와 당기관으로 확산되면서 문혁은 더욱 고조되었다. 이때의 특징은 造反組織이 청소년 대신에 광범한 노동자 계층에 의해 이끌어진 것이다. 이들 노동자 계층의 이용은 밑으로부터의 탈권 전략으로서의 지방의 당기관과 조직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행해졌다. 그러나 실권파의 저항도 강하였기 때문에 造反노동자와 지방당 및 정부관리들 사이의 투쟁은 각지에서 武鬪로 발전하여 사회는 극도의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毛澤東은 67년 1월 林彪 麾下의 ‘人民 解放軍’으로 하여금 좌파 편에서 탈권 투쟁에 개입할 것을 지시하였다.

 

 67년 3월부터 새로운 권력기구로서 革命幹部, 軍 代表, 革命的 群衆組織 代表로 이루어진 이른바 “三結合”에 의한 革命委員會가 형성되어 기존 정부와 당위원회를 대신하였다. 이와같은 三結合에 의한 혁명위원회는 1968년 9월에 가서야 전국적인 조직이 완료될 수 있었다. 그만큼 文革 중의 혼란과 실권파의 抵抗이 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때쯤 文革은 이미 수습단계에 들어섰다. 毛澤東과 江靑등 文革主義者, 林彪를 비롯한 軍, 그리고 國務를 보던 周恩來 등 모두가 文革의 수습을 바랬다. 紅衛兵을 煽動하여 이용한 毛澤東 자신이 홍위병의 학교와 가정으로의 복귀를 명했으며, 문혁파의 이론가 姚文元도 “노동자 계급이 모든 것을 지도하지 않으면 않된다”고 하여 중공의 조직 재건을 명백히 시사하였다.

 

 文革의 수습과 좌파의 득세를 획하는 것은 1969년 4월에 열린 제9차 全國代表大會였다. 이 9全大會를 계기로 毛澤東의 권위는 절정에 올라 毛澤東思想이 절대화 되고 毛澤東 個人崇拜가 정착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林彪가 毛澤東의 後繼者로 지명되어 林彪界 軍人과 文革 極左派의 세력이 크게 浮上하였다.

 

 이시기의 특징은 문혁기의 혼란을 수습하는 가운데 문혁의 정신과 이념을 구현하려는 것이었다. 毛思想의 핵심요소인 自力更生, 群衆路線, 繼續革命, 政治優先, 그리고 平等主義등이 중공 사회의 모든 면에서 시행되었다. 구체적으로 관료조직이 단순화되고 육체노동의 경험이 중시되었다. 거의 모든 大學生과 中學生이 일정 기간 동안 下放을 통해 기업체나 농촌에 가서 육체노동을 해야 하였다.

 

 위와 같이 文革理念 구현을 위한 표면상의 노력과 합의의 이면에는 文革 이후 득세한 새로운 지도층 내 당파 간의 치열한 정권 투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 결과 발생한 것이 1971년 9월의 “林彪사건”이었다. 결국 林彪의 실각 후 1973년 8월에 열린 중공 10全大會에서는 후일 4인방으로 불리는 江靑,姚文元,王洪文,張春橋 등 문혁 극좌파가 毛의 후광을 배경으로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동시에, 周恩來의 溫乾 路線의 影響으로 1973년 4월 鄧小平을 비롯, 文革 중 실각했던 실용주의적 관료와 당간부가 많이 복직되었다.

 

 그러나 毛澤東體制 아래 새로운 지도층 내에서는 문혁 좌파와 실용주의 관료파 사이에 角逐이 점차 치열해 가고 있었다. 周恩來,鄧小平 등 實用主義派가 1975년 1월 第4期 全國人民代表大會 第1次 會議를 계기로 ‘農業, 工業, 國防, 科學技術의 現代化’곧 이른바 ‘4個 現代化 計劃’을 文革 이후의 政治方向으로 설정한 것에 대해 文革派는 ‘프롤레타리아독재 이론학습’운동을 강화하는 것으로 대항했으며, 이러한 와중에 1976년 1월 周恩來가 사망하자 文革派는 같은해 4월 鄧小平을 ‘天安門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몰아 다시 실각시켰고, 총리직은 권력 기반이 약한 문혁 우파에 속하는 華國鋒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鄧小平의 肅淸으로 양파 간의 투쟁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같은 갈등이 1978년 9월 毛澤東의 사망과 함께 공개적인 투쟁으로 폭발한 것이 10월의 이른바 ‘北京政變’이라 불리는 ‘4인방(江靑, 王洪文,張春橋,姚文元)’의 電擊的 逮捕였던 것이다.

 

 중국공산당 第11期 第6次 全體會議에서 채택되었던 “建國이래의 黨의 약간의 문제에 관한 歷史的 決議”중 毛 再評價 부분인 “文化革命의 10年”에 보면 이렇게 쓰여있다.

“문화대혁명 이라는 이같은 전국면적이고 장기간에 걸친 좌경의 중대한 과오에 대해서는 毛澤東 동지에게 주요한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毛澤東 동지의 착오는 따지고 보면 한 위대한 무산계급 혁명가가 범한 잘못이다. 毛澤東 동지는 언제나 우리의 당내와 국가 생활 중에 존재하고 있는 제반 결점을 극복할 필요성을 꾸준히 강조하였지만 만년에 이르러서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서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文化大革命”속에서는 시비를 가리지 못하고 敵과 我를 혼동하였다. 그는 중대한 착각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여러차례에 걸쳐서 전체 당원에게 마르크스-레닌의 저술을 진지하게 학습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면서도 始終一貫 자신의 이론과 실천을 마르크스-레닌주의적이며 따라서 무산계급 독재에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였으니, 여기에 그이 비극이 있었다.

 

그는 전체적 국면에서는 “文化大革命”의 과오를 꾸준히 견지하였지만 몇가지 具體的 過誤는 이를 시정하거나 制止하였고, 일부 지도적 당 간부와 당 외의 지도적 인사들을 보호함으로써 그들 간부가 새로이 중요한 지도적 지위에 복귀할 수 있는 공도 세웠다. 그는 林彪등의 反革命集團을 분쇄하는 투쟁을 영도하였고 江靑, 張春橋 등에 대해서도 역시 중요한 비판과 폭로를 계속함으로써 최고 領導權을 탈취하려는 그들의 야심을 저지하였다. 그와같은 역할은 훗날 우리 黨이 “4인방”을 무난히 분쇄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그는 만년에도 우리나라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에 날카로운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社會帝國主義의 壓力을 물리쳤다. 올바른 대외정책을 집행하고 각국 인민의 정의의 투쟁을 지원하는 정책을 견지하였음은 물론, 3개의 세계의 구분에 관한 정확한 전략과 우리나라가 영원히 覇權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사상을 제기하였다. “文化大革命” 기간 중에도 우리 黨은 깨어짐이 없었을뿐더러 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국무원(行政府)과 人民解放軍은 여전히 필요한 활동을 진행할 수 있었고, 각 민족과 각 분야의 대표인사들이 참석한 제4기 전국人民代表大會(國會)를 開會하여 周恩來와 鄧小平 동지를 領導的 核心으로 하는 國務院 人選을 확정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 社會主義의 制度的 기틀은 변함없이 보존되고 있으며, 사회주의 경제 건설 또한 진행 중이다. 우리의 국가는 변함없이 통일을 지켜나갈 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중요한 영향을 행사하고 있다. 이와같은 중요한 사실들은 모두 毛澤東 동지의 雄大한 業績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이모든 사실들로 말미암아서, 그리고 특히 그의 혁명 사업에 있어서의 오랜 세월에 걸친 위대한 공헌으로 말미암아서, 중국 인민은 始終一貫 毛澤東 동지를 자기들이 敬愛하는 偉大한 敎師로 여기는 것이다.”(이영희 편저, 10억인의 나라-모택동 이후의 중국대륙, 서울: 두레, 1985.)

 

 

 한편 反擊과 後退, 分裂과 調和, 反亂과 平定의 曲藝로 點綴되었던 毛澤東體制의 屈曲많은 政治史의 한 斷面인 文化大革命期間을 中心으로해서 發生한 “天下大亂”을 사회학자 짐멜(Georg Simmel)과 코우저(Lewis A.Coser)의 葛藤理論으로 追跡해 보면 다음과 같다.

 

 

“ 毛澤東의 체제와 권력에 대하여  洗鍊된 均衡感覺은 權力鬪爭에서 발생한 矛盾과 葛藤을 毛澤東式 문제해결의 스펙트럼(Spectrum)을 通해 劇的으로 解決,權力의 均衡을 回復할 수 있었다. 社會主義建設段階가 빚은 共産主義體制가 志向하는 革命的 이데올로기의 追求를 바탕으로 하는 目標文化(goal culture)와 近代化(工業化)目標間의 葛藤과 緊張은 路線鬪爭을 産出 급기야는 權力鬪爭으로 激化되어 갔다.
 路線鬪爭과 權力鬪爭이 꼬리를 물고 惡循環하는 가운데서 이른바 資産階級司令部인 “劉登司令部에 대한 砲擊”이 加해진 以來로 黨一軍關係의 葛藤과 矛盾은 中共體制의 지렛대인 黨이 銃을 支配하는 黨絶對領導의 體系的 秩序를 危機로 몰고 갔다. 群衆路線에 依해 發動한 紅衛兵과 革命的 群衆의 亂動으로 모택동의 奪權意圖가 挫折되었을 때 紅衛兵과 極左勢力을 牽制하고 法과 秩序를 維持하기 爲해 中共政治에 介入하게 된 人民解放軍은 林彪의 指揮아래 政治의 領域으로 깊숙히 끌려들어 갔다.

 

 이러한 中共軍部의 華麗한 政治的 入場은 銃이 黨을 支配하는 黨에 對한 軍優位의 理想政治 秩序를 誕生시켜 毛澤東은 이 激化된 不均衡狀態를 回復하기 爲해 周恩來와 聯合,軍內의 穩健派와 過激派를 結合시켜 林彪肅淸을 斷行 黨優位體系로의 復歸를 可能케 했다.

 

 毛澤東은 權力을 葛藤이 尖銳化되어 權力의 均衡이 破壞되었을 때는 또하나의 葛藤을 創出, 葛藤은 葛藤으로 對處해 나가는 그의 精巧한 葛藤戰略에 依해 體制의 單一性을 回復할 수 있었으며 그 基盤을 더욱 鞏固히 했던 것이다. 文化革命期間의 葛藤의  軌跡을 따라가며 適用된 그의 奪權戰略을 葛藤理論을 통해 照明해 보면 確實히 毛澤東體制 속에서 發生한 葛藤은 체제를 더욱 확고하게 構築하는데 肯定的機能을 했다고 볼 수 있다.”(이대우, 모택동 체재에 있어서의 갈등의 역할, 부산대학교 법학연구 제21권 1호, 정치학 석사 논문 p278~279)

 

 

 

Ⅵ. 結   論

 

 文化大革命 終熄과 더불어 약 반세기에 걸쳐 혁명 중국을 지도하여 왔던 毛澤東의 죽음은 中國 內?外에 커다란 反響을 일으켰으며,그 와중에도 鄧小平이 정권을 잡기까지 혼란스런 정국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中國은 세계의 강대국 사이에 그 存在를 뚜렷이 드러내 놓고 있다. 毛澤東 사후 鄧小平의 改革開放政策으로 文革時期의 후퇴를 말끔히 씻고 刮目할 經濟成長을 이루었다. 이처럼 變貌한 現 社會主義 中國을 이해하는데에는 먼저 기나긴 역사를 通한 情緖文化와 思想, 그리고 現代中國의 역사속에서 나타난 近代化의 몸부림이란 요소를 파악하는 것이 기반이 되어야 할 것같다.

 

 예를들어, 毛澤東 思想에 의한 통치의 시도는 전통적인 중국의 法이나 制度보다는 統治理念과 道德律에 따라 이끌어져 왔다는 중국의 政治文化와 관계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毛澤東이 마르크스?레닌주의의 中國化를 주장한 基底에는 중국 전통의 思想이 깊고 심오한 때문이기도 한것이다. 더우기 20세기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중국의 젊은 知識層들이 마르크스 主義를 동경하게 된것은 阿片戰爭以後 계속되어온 西歐帝國主義 勢力의 挑發에 따른 反作用에도 根據하고 있다고 하겠다.

 

 毛澤東 思想은 革命運動에 있어 顯微鏡이라고 중국은 주장해 왔다. 현재의 문제를 파악하는 실체이자 미래를 설계하는 望遠鏡이라는 말이다. 또한 毛澤東 사상은 道이다. 毛澤東 思想을 정확히 이해하고 활용함으로써 모든 애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지게 했던 것이다.

 

 원래 中國의 사회는 西歐의 法秩序 같은 정치에의 현실성이 약했다. 오히려 宗敎와 政治가 분리되지 않은채 存在해온 것이 중국의 政治文化에 있어 特徵이라 하겠다. 따라서 中國의 政治는 현실법률보다는 오히려 道德律에 비중을 크게 두고 있었다 그리고 중국의 社會意識은 個人主義라기보다는 集團主義였다. 그러나 그 집단은 血緣과 氏族을 중심으로 하는 小數集團이었다는데 그 特徵이 있는 것이다. 바로 이같은 政治風土는 毛澤東사상의 씨를 뿌릴 만큼의 여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毛澤東에 대한 崇拜가 그의 人間에 대한 것보다 그 思想에 대해서 强調되어 왔기 때문에 毛澤東 死後에도 그 사상문제는 심각한 指導理念의 論爭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이다. 毛澤東思想이 革命과 通治의 과정에서 행한 積極的인 역할과 그 속에 담긴 肯定的인 요소들은 黨員과 人民을 지목하고 또 中國的 마르크스주의를 전전하기 위하여 계속되어야 하지만,다른 한편에 있어서는 毛澤東 사상이 그의 個人崇拜와 絶對化를 돕고 급기야는 權力鬪爭의 道具化되고 있다는 사실은 毛澤東이 죽은 후 整備해야 할 문제였던 것이다.   즉, 曖昧하고 體系없는 毛澤東 사상이 그가 죽은 후에 여러 갈래의 해석을 낳을 수 있고, 이것이 權力鬪爭과 관련되는 思想論爭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毛澤東 死後 毛澤東 思想은 사뭇 弱化되어 이제는 하나의 歷史的 사실로 여겨질 뿐이다. 사상이 사라진다면 중국의 傳統的인 政治文化를 형성해 왔던 指導思想은 어떻게 될 것인가? 毛澤東 死後 毛澤東의 指導理念을 역사적 사실로 돌리면서 長征과 延安의 經驗,解放戰爭을 겪어온 長老政治가 이어져 왔으며 그 求心力은 鄧小平 으로 대체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얼마전 중국은 毛澤東 이후 강력한 지도자였던 鄧小平을 잃었다. 鄧小平이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잃어버린 중국의 진로를 展望하는데 있어서 그동안 중국전문가들이 내놓은 각종 假說과 시나리오를 살펴보자면 현재 중국 국가주석인 江澤民체제로 안정성장을 계속하거나 江澤民이 相對的優位일때는 集團體制의 政治體制를 維持할 수 있고 强硬派가 나설땐 毛澤東 시대로 회귀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또 다른 가설은 사회불안이 계속될땐 軍部가 등장하고, 천안문 사건으로 逐出되었던 온건파 趙紫陽이 복귀하면 공산당이 몰락할 수도 있다고 보았는가하면 內部 權力 鬪爭으로 天下大亂이 발생할수도 있는 등 다각도로 중국의 미래가 점쳐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으로서는 여러상황이 모두 예측가능한 進行時期이기 때문에 일부 불안요소들이 과대평가되어 나타날 수도 있지만 중국의 미래가 그처럼 비관적인 상태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全般的인 생각이다.

 

 毛澤東 사상이 구현하고자 했던 중국식 사회주의의 의미도 모든 인민의 평등하고 안락한 삶의 추구였다고 볼 때 그후의 鄧小平이 이룩하고자 했던 진정한 社會主義 社會를 구축하기 위한 社會主義 初級段階로 본 현대 중국의 경제성장 정책 또한 그 脈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이는 毛澤東의 平等追求 思想과 鄧小平의 改革開放을 통한 利潤追求 思想이 전혀 별개라고도 하지만 그것은 방법상의 차이일뿐 궁극적으로는 전체 중국의 사회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목표에 다름아니다. 이제껏 중국의 역사상 통치자들은 수많은 思想의 바탕아래 그것을 종합하고 확대하여 권력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삼아왔다. 이것이 현대에 이르러 中華人民共和國이 설립되고 지금의 중국으로 발전해오면서부터는 開國의 아버지 毛澤東과 改革의 아버지 鄧小平이라는 두 統治者에 의해 새로운 사상으로 정립되면서 舊思想과는 다른 중국적 특색을 갖춘 면모를 보여준다.

 

 鄧小平은 생전에 자신이 文革期間동안 毛澤東으로부터 받았던 핍박이 심했었지만 권력 복귀후에도 毛에게 복수하지 않았고 뿐만아니라 그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자신의 권력유지에 逆으로 이용했다. 지금도 北京天安門에는 毛澤東의 초상화가 높이 걸려있는데 이또한 人民의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개인적인 보복감정을 우선하지 않았으며 아직도 毛澤東을 떠받드는 인민의 정서를 현대화 과업의 에너지로 집결하는 經綸을 발휘한 것이다. 鄧小平이 大汎한 정책으로 毛澤東과 그의 통치시기를 수용했다고 하지만 어찌됐든 毛澤東이 이루어낸 한 시대의 歷史 또한 그 과오를 떠나서 없어질수 없는 실제이다.

 

 이제 中國은 또다시 새로운 統治者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상황은 전과는 판이하게 다를 수 밖에 없다. 일례로 이전의 지도자들은 전체 권력을 左之右之하던 카리스마적인 면모가 있었다. 現 中國은 黨總書記 江澤民이 집권함으로써 開放의 가속과 漸進的으로 民主化가 진행되겠지만 그에게는 중국 통치에 필수인 카리스마가 형성되어 있지않아 그 앞날이 얼마나 순조로울지는 좀더 두고봐야 알것같다.

 

 長期的으로 中國은 經濟 大國으로 등장할 수 있는 충분한 潛在力을 갖고 있지만 中國이 그 潛在力을 現實化하는 과정에서는 現 過渡期에서 中國經濟가 안고있는 구조적인 문제 즉 經濟成長 政策과 安定爲主 政策이 社會主義 中國의 共産黨 獨裁體制와 얼마나 잘 融合發展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들을 풀어나가야 하는 課題가 남아있다고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Ⅰ 단 행 본
  1. 국내서적
   건국대학교 중국문제연구소 편. 『현대 중국론』. 서울:희성 출판사, 1989
   이영희 편저. 『10億人의 나라:모택동 이후의 중국대륙』. 서울:두레 1985
   張琢 著/ 오재환 편역. 『중국의 개혁, 개방사』. 서울:신서원, 1996
   이병주 편. 『현대 중국론』. 서울:청담 논단
   히메다 미쓰요시 외/ 김순호 옮김. 『20세기 중국사』. 서울:돌베게, 1995
   히메다 미쓰요시 외/일월서각 편집부 옮김. 『中國 近現代史』. 서울:일월서각, 1984
   김충렬,공기두. 『毛澤東思想論』. 서울:일월서각, 1985
   S.슈람 / 김동식 역. 『모택동』. 서울:박영사, 1977
 
 Ⅱ 논 문
   1. 국내논문
    이대우. 「毛澤東體制에 있어서의 葛藤의 役割」.
    부산대학교 법학연구 제21권 1호

 

Ⅲ 신문 자료
   1. 『조선일보』2월 21일자, 22일자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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