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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종교, 사상

[스크랩] 毛澤東 自傳에 나타난 毛澤東의 자기 소개

 

毛澤東 自傳에 나타난 毛澤東의 자기 소개

 

 

 

 

1) 소년시절

나는 1893년(12월 26일: P. 23 역주 2) 참조)에 湖南省 湘潭縣 韶山冲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이름은 毛順生(또는 毛貽昌), 어머니의 이름은 文七妹였다.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동생, 그리고 나였다. 나의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로 무거운 빚 때문에 어린 나이에 군대에 들어가야만 했다. 여러 해 동안의 군복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작은 상점과 다른 사업을 벌여 검소한 생활로 돈을 모아 저축하여 팔았던 땅을 가까스로 사서 중농이 되었다. 열 살이 되었을 때는 15무의 땅을 가지고 있어 부농 소리를 듣게 되었고, 7무를 더 사들인 후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동생이 하나 더 생겼다.

아버지는 꾸준히 살림을 늘려 중농이 되자 곡물 수송과 판매를 시작하여 돈을 모았다. ‘부농’이 된 후에도 그는 사업에 몰두하여 농장 노동자를 고용했고, 아내는 물론 자식들까지도 농장에서 일하게 했다. 나는 여섯 살이 되었을 적부터 농사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가게를 따로 가지고 있지 않고, 가난한 농부들로부터 곡물을 사들여 그것을 도시 상인들에게 팔아 넘기는 방법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겨울에 쌀을 거두어들일 때가 되면 붙박이 노동자 외에 임시 노동자를 한 명 더 고용했다. 그렇게 되면 식구가 일곱이 되었고, 식생활은 검소하게 했지만 언제나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나는 여덟 살이 되었을 때 마을 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여 열 세 살이 될 때까지 다녔다. 이른 아침과 밤에는 농장에서 일을 했으며, 낮에는 論語와 四書를 읽었다. 서당 훈장은 거칠고 엄격해서 학생들을 무섭게 다루었고 때리는 일도 흔했다. 나는 그것이 싫어서 열 살 때 그곳을 뛰쳐나왔다. 집에 가면 아버지에게 매를 맞을까봐 두려움 때문에 이곳 저곳을 쏘다니기 시작했다. 그 때 나는 자신이 마을 주위만을 빙빙 돌며 쏘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으며, 내가 다닌 모든 길이 집으로부터 고작 8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집에 돌아 왔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다소나마 인정스러워졌고, 서당 훈장은 온화해지려고 애쓰는 기색이 보였다. 내 행동의 결과는 나에게 많은 인상을 남겨 주었는데 그것은 성공적인 罷業이었다.

아버지는 내가 글자를 조금 배우자마자 장부를 정리하도록 했고, 주판을 배우도록 했다. 아버지의 강요에 못 이겨 나는 밤에 장부 정리를 했다. 아버지 엄격했고, 게으름 피우는 것을 싫어하여 정리할 장부가 없으면 농사일을 시켰다. 아버지는 화를 잘 내고, 나와 동생들을 종종 때렸다. 우리에게 한 푼의 돈도 주지 않았고, 매달 15일이면 농장의 노동자들에게 선심을 써 쌀과 계란을 주었으나 고기는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관대했고, 동정심이 많아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남에게 기꺼이 나누어 줄 만큼 친절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겼고, 기근이 들어 쌀을 얻으러 오면 그들에게 곡식을 나누어주었지만 아버지가 있을 때는 그런 일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인정을 베푸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 문제로 집안에 싸움이 흔히 벌어졌다.

집안에 두 개의 ‘파벌’이 있었는데 하나는 통치권을 쥔 아버지였고, 그 반대파는 나와 어머니, 동생들, 그리고 때로 노동자들도 우리편에 가담했다. 아버지의 반대파인 우리의 연합전선에도 의견이 일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간접 공격의 원칙을 옹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감정적인 원칙이나 집권자에 대한 노골적인 반항을 나무랐다. 그것은 중국적인 방법이 아니라고 어머니는 말했다. 열세 살 되던 해에 아버지와 논쟁할 때 나는 유교의 고전을 인용하면서 나의 주장을 강력하게 전개할 수 있는 논거를 찾았다. 아버지는 나를 불효 막심하며 게으르다고 꾸짖었다. 나는 “어른은 친절하고 사랑이 많아야 한다”는 유교 고전의 구절을 인용하여 반박했다. 내가 게으르다는 아버지의 비난에 대해 “나이 든 사람이 나이 어린 사람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나보다 나이가 세 배나 더 많으니 일도 더 많이 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면 아버지보다 훨씬 더 원기 왕성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외쳤다.

아버지는 재산 축적을 계속하여 재산이 2-3천 원으로 늘어났다. 나의 불만은 점점 심해졌고, 우리 집안은 이런 변증법적인 싸움이 계속 전개되었다. 어느 날 집에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아버지는 여러 손님들 앞에서 나를 게으르고, 쓸모 없는 녀석이라고 윽박질러 나를 몹시 화나게 만들었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에게 욕설을 퍼붓고 집을 나와 버렸다. 어머니가 쫓아와 돌아가자고 설득했고, 아버지도 돌아가자고 욕을 하면서 강요했다. 나는 우물가로 달려가서 아버지가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우물 속에 뛰어들어가겠다고 위협했다. 이런 내란을 종식시키기 위해서는 서로의 요구와 그에 대한 해결이 있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복종의 표시로 나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 숙여 사과할 것을 요구했고, 나는 아버지가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한쪽 무릎만 꿇고 사과하겠노라고 제의했고, 아버지도 이에 동의하였다. 그래서 싸움이 끝났는데 그 사건을 통해 나는 공개적인 반항으로 나의 권리를 지키려고 할 때면 아버지가 누그러지고 내가 온순하게 복종하는 태도를 보일 때는 그가 오로지 욕만 하면서 때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버지의 엄격함이 결국에는 그 자신을 패배시켰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를 미워하게 되었고, 우리 식구들은 그에 대항하는 실질적인 연합전선을 만들었다. 동시에 그것은 나를 이롭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나로 하여금 아주 근면하게 일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나는 장부를 주의 깊게 기록함으로써 아버지로 하여금 아예 나를 비난할 수 있는 핑계를 갖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에 2년 동안 서당을 다닌 적이 있었으므로 장부를 충분히 읽을 수 있었지만 어머니는 글을 전혀 몰랐다. 양친은 모두가 농부 집안의 출신이었다. 우리 집안에서는 내가 학자인 셈이었다. 나는 고전을 알고 있었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 내가 즐기는 것은 고대 중국의 전기 소설과 특히 반란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岳飛傳: 精忠傳, 水滸傳, 隋唐演義, 三國志 및 西遊記를 읽었다.
나는 나이가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법에 어긋나는 이런 책들을 싫어하여 나쁜 책이라고 말하는 늙은 선생님의 눈을 피해 가며 열심히 읽었다.

학교에서도 이런 책들을 읽곤 했는데 선생님이 옆을 지나면 고전으로 덮어 버리곤 했다. 내 가장 친한 친구도 그런 짓을 했는데 우리는 책의 줄거리를 거의 암기하며 읽었고, 자주 토론도 했다.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동네 어른들보다도 우리가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감수성이 강한 나이에 그런 책들을 읽었기 때문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는 열세 살 때 마침내 서당을 떠나 농장에서 오랫동안 일하기 시작했다. 낮에는 노동자들을 도와 함께 일하고 밤이 되면 아버지를 도와 장부를 정리했다. 나는 독서를 계속했고, 고전 이외에 내가 읽을 수 있는 모든 책을 일사천리로 읽어 나갔다. 아버지는 이런 나를 못마땅해 했다. 아버지는 내가 고전에 능통한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특히 어떤 사건 때문에 법정에 섰다가 소송 대상자가 유교의 고전을 인용해서 아버지가 소송에 패한 이후부터는 더욱 그랬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불빛을 보지 못하도록 밤늦게까지 창문을 막아버리는 일도 흔히 있었다.

나는 내가 무척 좋아하는 盛世危言*1)이라는 책을 이런 식으로 읽었다. 몇몇의 학자들은 글을 통하여 중국의 무기력함은 서방 세계의 기계들, 이를테면 철도, 전화, 전신, 기선과 같은 것들의 부족에 있다고 생각했고, 따라서 그러한 기계들을 중국에 도입하기를 원했다. 아버지는 그런 책을 읽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고, 소송에 이기는 데 필요한 고전과 같은 실질적인 것을 내가 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계속해서 고대 중국의 전기와 문학 서적을 읽어 내려갔다.

어느 날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 대해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데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는 밭을 가는 농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개의 주인공들은 무사이거나 관료이거나 아니면 학자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농부 출신의 영웅은 한 사람도 없었다. 나는 2년 동안 이러한 사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얘기의 내용을 분석해 보았다. 그리고 농부들은 밭에 나가 일을 하지 않아도 좋은 실력자, 이를테면 인민의 지배자를 찬미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지배자들은 땅을 가꾸게 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자들이 농사를 짓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렸을 적이나 중년이 되어서나 한결같이 무신론자였지만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어머니는 자식들에게도 종교적인 가르침을 주었고, 아버지가 무신론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슬프게 생각했다. 내가 아홉 살 때 나는 아버지가 믿음이 없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의논했다. 그때 우리는 아버지를 개종시키려고 여러 번 노력해 보았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버지는 오로지 우리를 욕하고 억지를 썼으므로 우리는 새로운 계획을 포기했다. 그는 신과는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었다.

나의 독서생활은 점점 나에게 더 많은 영향을 줌으로써 나도 점차로 신에 대한 회의론자가 되어 가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나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하여 걱정하게 되었고, 믿음의 필요성에 무관심한 나를 꾸짖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나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하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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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1 盛世危言: 중국 개명기의 학자인 정관응(鄭觀應: 1842-1922)의 저술. 그는 광동 출신으로 젊어서 과거에 낙방한 후 관직의 뜻을 버리고 영국 商館에 진출하여 해외 문물을 받아들인 후 이 분야에서 성공하여 광동 철로 공사 사장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청.일 전쟁의 포성을 들으며 <성세위언>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향후 商戰의 시대가 올 것임을 예언하고 부국강병을 서두르지 않으면 국가의 위기가 도래하리라고 예언했다. 이 책은 당시 중국의 개명 의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 책을 읽은 光緖帝는 2천부를 구입하여 신하들에게 나눠주어 읽도록 했다. 이 책을 쓴 정관응은 의회제도, 현대식 교육, 통신과 같은 수많은 민주적 개혁을 주장한 인물로서 戊戌政變(Hundred Days Reform)이 일어났던 1898년에 그의 盛世危言이 출판되었을 때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어느 날 아버지는 돈을 받으러 나갔다가 길에서 호랑이를 만났는데 호랑이는 아버지를 보고서는 놀라 즉시 도망을 쳤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그 기적적인 생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신에 대해 모독적인 행동을 한 일이 없는가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아버지는 불교를 믿기 시작해 가끔 향을 피우기도 했지만 나의 신앙심이 약화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아버지는 간섭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직 자신이 어려움에 빠질 때만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盛世危言>>이라는 책은 나로 하여금 다시 공부를 시작하도록 자극하여 주었고, 나는 농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는 것에 대하여 싫증을 느꼈다. 아버지는 당연히 내 행동을 반대했고 우리는 이 문제로 말다툼을 해서 나는 마침내 집을 뛰쳐나와 어느 법률 학도의 집으로 가 거기에서 6개월 동안 공부했다. 그 후 나는 나이 지긋한 중국 선생 밑에서 고전을 더욱 공부했고, 많은 신간 논문들과 몇 권의 책을 읽었다.

그 무렵 長沙에서 큰 폭동이 일어나 콩상인들이 長沙에서 돌아오는 긴 행렬을 보았다. 그 해에 심각한 기근이 일어나 長沙에서는 수천 명이 굶주리고 있었다. 주민들은 허기를 이기지 못한 채 대표자를 뽑아 縣長에게 보내어 살아갈 방법을 얘기했으나 縣長은 오만하게 대답했다.

“당신들은 왜 식량이 없소? 시내에는 식량이 풍족하게 있소. 나는 항상 충분한
식량을 가지고 있소!”

민중들은 縣長의 말을 듣고 대단히 분노해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시위를 일으켰다. 그들은 청나라 관리를 공격하고 관청의 깃대를 꺾고 관청 안으로 들어갔다. 내무 담당관인 張이 말을 타고 나와 정부는 시민들을 돕기 위해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는 자신의 약속에 충실했지만 청나라 황제는 그를 ‘폭도들’과 관계가 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워 그는 자리에서 물러나고, 縣長도 새 사람이 부임했다. 새 縣長은 즉시 폭동의 주모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하여 주동자 몇 사람이 사형을 당하고, 그들의 머리는 장대 위에 높이 매달려 叛徒들에 대한 경고로 전시되었다.

이 사건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학교에서는 여러 날 동안 이 사건에
대해 토론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반란자”들을 불쌍히 여겼지만 어디까지나 방관자의 입장에 불과했고 그 반란이 자신들의 삶과 어떤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이번 사태를 흥미로운 사건으로 관심을 표명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사건을 잊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반란자들이 우리 식구와 같은 평민이라고 느꼈으며 그들에게 내린 처사가 부당하다는 점에 대해 심한 분노를 느꼈다.

이 당시 나에게 또 하나의 영향을 준 것은 그 지방 초등학교의 급진파(急進派) 선생이었다. 급진파인 그는 불교에 반대하여 신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마을의 절을 학교로 개조하도록 종용했다. 그는 폭넓게 토론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를 존경했고 그의 견해에 동의했다. 계속해서 일어나는 이러한 사건들이 나의 가슴속에 끝없이 깊은 인상을 심어 줌으로써 나의 마음에는 이미 叛心이 싹트고 있었다.

이 시기 나는 또한 어떤 정치적인 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의 분할을 얘기한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더욱 그렇게 되었다. “嗚呼, 中國其將亡矢”(오호! 중국은 망하고 말 것인가?)라는 첫 문장이 시작되는 그 책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내용은 조선(朝鮮)과 대만(臺灣)에 대한 일본의 정복과 인도차이나, 미얀마(Myanmar), 그리고 기타의 지역에서 중국의 종주권이 상실된 것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 책을 읽은 후 나는 조국의 앞날에 대해 깊이 걱정했고, 나라를 구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국민 모두의 의무라고 자각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나는 새로 설립된 유별난 학교에 관한 소문을 듣고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 학교에 들어갔다. 새 학교는 서양의 ‘새로운 지식과 현대 교육이 변해
가는 상황에 대해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교육방법도 매우 진보적이었다.
처음에 반대하시던 아버지도 이 학교의 ‘진보된 교육’을 받으면 사회적으로도 힘을 쓰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친구들의 말에 내가 이 학교에 다니는 것에 동의했다. 이 때 나는 처음으로 집에서 50리 밖을 나가 보았는데 이 당시 내 나이는 열 여섯 살이었다.

새로운 학교에서 나는 자연 과학과 서양 학문의 새로운 과목들을 배울 수 있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선생님 중에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분으로서 가짜 변발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을 그의 변발이 가짜라고 비웃었으며, 그를 가리켜 ‘가짜 외국인 귀신(假洋鬼子)’라고 불렀다.
그 학교에서는 많은 학생들이 함께 공부했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은 지주의 아들이라 비싼 옷을 입고 있었는데, 농부들은 자식들을 그토록 고급스러운 학교에 보낼 수가 없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초라한 옷을 입고 있었고, 단 한 벌의 교복이 있을 뿐이었다. 학생들은 가운을 입지 않고, 선생들만이 교복을 입었는데 ‘가짜 외국인 귀신(假洋鬼子)’이라는 선생은 외국의 옷을 입고 있었다. 부잣집 학생들은 낡은 외투와 바지를 입고 있는 나를 멸시했다. 그러나 그들 중에서도 나는 친구를 사귈 수 있었는데 특히 두 학생이 나의 훌륭한 친구가 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1)은 작가가 되어 지금은 소련에 살고 있다.

나는 상향현 출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주변으로부터 역겨운 대접을 받았는데, 상향현 출신이라도 어느 지역 출신인가 하는 점도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상향 현에는 상류, 하류, 그리고 중류의 지역이 있었는데 하류 지역의 학생들과 상류 지역의 학생들은 순전히 지역적인 이유로 이해 끊임없이 싸웠다. 나는 그 중 어느 지역의 태생도 아니라 중립을 지켰다. 결과적으로 이 세 파벌의 모두가 나를 멸시했다. 나는 정신적으로 매우 위축되어 있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많이 성숙했다. 선생님들도 나를 좋아했다. 특히 고전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더욱 그러했다. 왜냐하면 내가 고문(古文)으로 훌륭한 수필을 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고전에 있지 않았다. 나는 康有爲*2)의 개혁 운동에 관한 책과 梁啓超*3)의 新民叢報를 가슴에 새겨질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이 때부터 나는 康有爲와 梁啓超를 높이 신봉하게 되었고 이 책을 보내 준 사촌에게 고마움을 느꼈는데 사촌은 매우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나중에 반혁명적인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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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蕭三(1896-1983): 모택동과 동향인으로 소유(蕭瑜)의 동생. 호남성립 제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모택동과 신민학회 활동을 하다가 1920년에 프랑스로 유학하여 1922년에 그곳에서 중국공산당원이 되었다. 그는 1923년에 소련으로 건너가 동방노동자대학을 마치고 1924년에 귀국했다가 1927년에 다시 소련으로 건너가 작가 활동을 한 수 1939년에 귀국하였다. 건국 후에는 문화부 대외문화연락국장을 역임하였다.

*2) 康有爲(1858-1927): 청말 . 민국 초의 정치가. 광둥성 남해(南海) 출신. 유럽의 신사조를 받아들여 대동사상(大同思想)에 입각한 변법자강(變法自疆)을 도모하였으나 무술정변에 실패한 후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싱가포르에서 불우하게 죽었다.

*3) 梁啓超(1873-1930): 청말 . 민국 초의 사상가로서 강유위의 제자. 광동성 출신. 공화주의자로서 원세개 정부에서 사법 총장을 역임. 청말의 탁월한 문장가였던 그는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康有爲(1858-1927)와 더불어 1911년의 신해혁명의 지적(知的) 대부(代父)였다. 林語堂의 말에 의하면 “양계초는 중국 언론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 ‘가짜 외국인 귀신(假洋鬼子)’ 선생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왜냐하면 그의 비인간적인 변발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일본에 대한 이야기 듣기를 좋아했다. 그는 음악과 영어를 가르쳤는데 그가 가르쳐 준 노래 중에는 ‘황해의 전투(黃海之戰)’*1)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아직까지 그 노래의 매혹적인 몇 구절을 기억하고 있다.

麻雀唱歌 夜鶯跳舞 참새는 노래하고 꾀꼬리는 춤추는데
春天裡綠色的田野多可愛 봄날의 푸른 초원은 사랑스럽기만 하네.
石榴花紅 柳樹葉綠 석류꽃은 심홍색을 자랑하고, 버들잎은 푸르르니
展現一幅新圖畵 한 폭의 새로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네

이 무렵 나는 일본의 아름다움을 알고 느꼈다. 러시아에 대한 일본의 승리를 읊은 이 노래에서 나는 일본이 가지고 있는 힘이 무엇이며, 그들의 자부심이 어떤 것인가를 느꼈다. 나는 일본이 야만의 나라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은 나라라는 사실도 또한 알았다. 이것이 내가 ‘가짜 외국인 귀신(假洋鬼子)’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것의 전부였다.

이 시기에 나는 광서제(光緖帝)*2) 자희태후(慈禧太后)*3)의 죽음에 관해 처음 알았다. 그때는 이미 새로 등극한 宣統帝가 2년 동안 집권하고 있던 때였다. 나는 아직 反君主主義者는 아니었다. 나는 대부분의 공직자와 황제는 가장 정직하고 훌륭하며, 영리한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중국 고대 통치자들의 치적에 매혹되었다. 그들은 요(堯), 순(舜), 진시황(秦始皇), 그리고 한 무제(漢武帝)였다. 나는 그들에 관해서 많은 책을 읽었다. 또한 이 시기에 외국의 역사와 지리에 관해서도 공부했는데, 나는 어떤 논문을 통하여 미국에 대해 처음으로 알았다. 그 기사는 미국의 독립혁명에 관한 것이었는데 거기에는 워싱턴(G. Washington)이 8년 간에 걸친 어려운 전쟁 끝에 승리를 쟁취하고 국가를 건설했다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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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황해의 전투(黃海之戰): 이 때는 러일전쟁이 끝나고, 포츠머드 조약(Treaty of Portsmouth: 1905)이 체결된 직후로서 일본에서 있었던 봄의 축제와 그 엄청난 기쁨을 노래한 것임이 분명하다.

*2) 광서제(光緖帝 1871-1908): 청나라 황제 愛新覺羅.. 同治帝가 죽자 1875년에 자희태후에 의해 4세에
황제에 등극하여 서세동점기의 중국의 비극을 겪은 비운의 황제.

*3) 慈禧太后(1835-1908): 西太后. 咸豊帝의 황후로 同治帝의 생모. 同治帝가 5세에 등극하자 섭정했으며, 그가 죽자 4세의 광서제(光緖帝)를 즉위 시켜 다시 섭정했다. 1898년에는 무술정변을 일으켜 진보 세력을 타도했다. 나는 또한 <<世界英傑傳>>이라는 책에서 나폴레옹(B. Napoleon), 러시아의 캐더린 황후(Empress Catherine)와 피터 대제(Peter the Great), 웰링턴(A. Wellington), 글래드스톤(W. Gladstone), 루소(J. J. Rousseau), 몽테스키외(C. Montesquieu), 그리고 링컨(A. Lincoln)에 관해서도 읽었다.


지금까지 모택동 자서전 중 소년 시절을 요약하여 정리해 보았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자기 주장이 강하고, 책을 좋아하며, 주변 정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그 후 그는 호남성 수도인 長沙로 가서 상향 사람들을 위한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정치적인 상황이 급변하여 반년 밖에 그 곳에 머물지 못했다. 그러면 長沙 시절의 이야기를 계속하여 들어 보기로 하자.

 


2) 학생 시절

나는 집에서 120리 떨어진 호남성의 수도 長沙에 가고 싶었는데, 長沙는 매우 큰 도시로 사람도 많고, 학교도 많으며 省聽도 있는 웅대한 곳이었다. 나는 장사로 가서 상향(湘鄕) 사람들을 위한 중학교에서 공부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 해 겨울에 나는 고등 보통학교 한 선생님께 내가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소개해 달라고 부탁하여 승낙을 얻어 걸어서 장사로 갔다.

마음은 설레었으나 입학이 거절될까봐 염려되고, 과연 이 큰 학교의 학생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어렵지 않게 입학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정치적이 상황이 급변하여 반 년 밖에 그곳에 머물지 못했다.

長沙에서 나는 처음으로 <<民力報>>라는 신문을 읽었는데 이 신문은 민족주의 혁명지로 호남 사람 황흥(黃興)*1)의 지도 아래 청조의 타도를 부르짖고 일어선 廣東의 봉기와 72 영웅들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나는 이 보도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으며, 이 신문은 자극적인 기사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民力報>>의 편집자는 于右任*2)으로 그는 후에 국민당의 저명한 지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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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黃興(1864-1916): 호남성 장사 출신. 1898년에 兩湖書院에 들어가 서구 자본주의에 눈뜨고 1902년에 일본에 유학한 후 귀국하여 1904년에 宋敎仁 등과 함께 (華興會)를 설립하여 회장이 됨. 이 해에 장사 起義를 도모했으나 실패하고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여 孫文과 함께 同盟會를 창립하여 청조 타도에 투신했다. 1912년에 남경 정부의 수립과 함께 육군 총장 겸 참모 총장에 취임했으며, 국민당의 수립과 함께 袁世凱와의 마찰로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916년에 귀국하여 병사했다.

*2) 于右任(1879-1964): 陝西 출신. 본명은 伯循.. 私塾에서 공부를 하다가 1906년에 일본으로 망명하여 동맹회에 가입하고 1907년에 귀국하여 <<神州日報>>를 창간하여 사장이 되고, 1909년에 <<民呼日報>>와 <<民立報>>를 창간하여 혁명을 고취했으며, 신해혁명 이후에는 남경 정부 교통 차장과 감찰원장을 거쳐 공산화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죽었다.
그 당시 나는 손일선(孫逸仙: 孫文)*1)과 동맹회*2)의 계획에 관해서도 알게 되었다.


나라는 바야흐로 제1차 혁명 前夜를 맞이하고 있었다. 나도 마음이 동요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한 편의 글을 써서 학교의 벽에 붙였는데 나의 정치적인 견해를 최초로 표명한 글이었다. 그것은 잘 다듬어지지 못하여 다소 거친 글이었다. 나는 康有爲와와 梁啓超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들에 대한 찬양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글을 통해 손일선(孫逸仙: 孫文)은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새 정부의 대통령이 되고, 康有爲는 수상으로, 그리고 梁啓超는 외무부 장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3)

이 무렵 四川과 漢口 사이의 철도 건설과 관련하여 외국 자본에 대한 배격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의회 제도를 요구하는 민중의 소리도 높아졌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淸帝國은 단지 諮政院을 설치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는 데 그쳤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한층 더 흥분해서 변발 반대를 위한 폭동을 일으켜 反淸運動을 전개했다.*4) 나와 한 친구는 변발을 잘라 버렸고, 다른 친구들은 약속만 하고 그 약속을 지키지는 않았다. 그래서 나와 내 친구는 그들 중 10 여명을 습격하여 변발을 강제로 잘라 버렸다. 이렇게 나는 이민족의 그릇된 변발의 악습을 조롱했을 뿐만 아니라 변발의 전면적 폐지를 요구하는 데까지 발전했다. 어떻게 정치적 이상이 사람의 견해를 이토록 바꿀 수 있을까? 나는 변발 문제로 법률학교 친구와 토론을 벌였고, 排淸主義에 의하여 그를 완전히 침묵시켜 버렸다. 黎元洪*5)의 주도 아래 武漢 봉기*6)가 일어난 후 호남성에서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정치적 상황은 급격히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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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孫逸仙(孫文): 중국의 혁명가. 신해혁명과 더불어 임시 대총통이 되었으나 원세개와의 투쟁을 피해 국민당을 창당하여 국부로 추앙을 받았다.

*2) 同盟會: 손일선 박사가 창설한 혁명 비밀결사로서 국민당의 전신. 회원의 대부분은 일본으로 망명하여 개명군주의자인 강유위와 양계초에 대항하여 맹렬한 筆戰을 전개했다.

*3) 나는 글을 통해 손일선(孫逸仙: 孫文)은 일본으로부터 돌아와 새 정부의 대통령이 되고, 康有爲는 수상으로, 그리고 梁啓超는 외무부 장관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에 강유위와 양계초는 보황파였고, 손문은 공화파였다는 점에서 볼 때, 손문과 강유위 . 양계초의 연립내각을 구성한다는 것은 어이없는 생각이었다.

*4) 변발 반대를 위한 폭동을 일으켜 反淸運動을 전개했다: 변발 퇴치 운동은 반유교적이라기 보다는 반청 운동이었다. 정통 유교주의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머리카락이나 손톱 등을 훼손할 수 없다.“

*5) 黎元洪(1864-1928): 호북성 출신. 天津의 北洋水師學堂을 졸업하고 해군에 복무했으며, 남경 정부의 부총통을 거쳐 원세개가 죽자 대총통이 됨. 민국정부의 수립과 함께 일본에 망명했다가 귀국하여 전진에서 죽었다.

*6) 武漢 봉기: 1911년에 일어난 이 사건은 청조를 무너뜨린 혁명의 시발이었다.


어느 날 한 혁명 대원이 우리 중학교에 나타나 교장의 허락을 받아 선동적인 연설을 했다. 7-8명의 학생이 한꺼번에 일어나 청나라를 맹렬히 비난함으로써 그를 지지했고, 그들은 공화국의 수립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람이 숨을 죽이고 그에게 귀를 기울였다. 黎元洪의 한 관리인 그 혁명적 연설가가 흥분한 학생들 앞에서 연설할 때 사방은 침묵에 싸였다.

나는 4-5일 후 黎元洪의 혁명군에 가담키로 결심하고 친구 몇 사람과 漢口로 가려고 친구들로부터 얼마간의 돈을 모았다. 漢口는 매우 漏濕하여 장화를 신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어 나는 교외에 주둔하는 한 혁명군 친구에게 장비를 빌리려 했으나 수비대의 저지를 당했다. 漢口는 매우 활동적이었고, 처음으로 총탄을 배급받은 병사들이 거리를 향하여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폭도들은 廣東과 漢口 사이의 철도를 따라 長沙로 접근해 가자 長沙 성밖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長沙 시내에서도 폭동이 일어났으며 성문은 험악한 노동자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나는 그 중의 한 성문을 통하여 장사 시내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높은 곳에 올라 전투가 벌어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官衙에 “漢”이라는 깃발이 드높이 휘날렸는데 흰 바탕에 글자를 써넣었다.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왔는데 이미 군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다음 날 군사 정부가 조직되었다. 哥老會의 두 인사가 군정장관이라고 할 수 있는 都督과 副都督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들은 焦達峰*1)과 陳作新*2)이었다. 새 정부는 省 諮問會議가 주재하던 건물에 수립되었다. 前 議長 담연개*3)가 추방되고 諮義
局은 해체되었다. 혁명군에 의해 발견된 청나라 문서 중에는 의회의 개설을 요구하는 탄원서의 복사본도 몇 통 들어 있었다. 그 원본은 徐特立*4)이 혈서로 쓴 것이었다. 그는 지금 소련정부에서 교육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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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焦達峰(1887-1911): 호남성 출신의 가로회 당원으로서 1906에 일본으로 건너가 동맹회의 회원이 되어 조사부장을 맡았다. 1911년의 무창 봉기 이후에는 湖南會黨을 조직하여 長沙를 점령한 후 호남 정부를 수립하여 도독이 되었으나 곧 피살됨.

*2) 陳作新(1885-1911): 호남성 출신. 호남 辦目學堂을 졸업하고 동맹회에 가입하여 新軍 제25 混成旅排長에 임명됨. 1911년의 무창봉기 후에 신군부에 의한 혁명을 일으켜 長沙를 점령하고 호남군정부 부도독이 되었으나 담연개에 의해 피살됨.

*3) 담연개(1880-1930): 호남성 출신. 광서 년 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호남성 한림원에서 근무하다가 1907년에 호남 政公會를 조직하여 호남 諮義局 議長이 되어 입헌파를 이끌었다. 長沙 봉기 이후에는 참의원 의장과 민정부장을 거쳐 국민당 호남지부장과 省長, 國民政府 主席, 行政院長을 지냈다.

*4) 徐特立(1877-1968): 長沙출신. 신해혁명 이후 호남성 임시 참의회 부의장과 호남제일사범학교 교사, 호남제일여자사범학교 교장을 지냄. 192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하여 남참봉기에 참가했으며, 혁명군 제25군 3師 정치부 주임을 거쳐 모스크바 中山大學에서 수학했다. 1930년 귀국하여 장정에 참여하여 중앙선전부 副副長 겸 자연과학원장을 지냈고. 중공 정권 수립 이후에는 8全代 중앙위원으로 피선됨

 

그는 진실과 결의를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손가락 끝을 잘랐다. 그의 탄원서는 “나는 의회를 열 것을 주장하는 바이며, 나의 손가락을 자름으로써 북경에 대한 省 代表의 직책에서 물러나고자 한다”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새 도독과 부 도독은 혁명 의지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었는데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 피압박 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결과 지주와 상인들의 불만을 샀다. 며칠 후 거리에는 혁명군의 시체가 뒹굴고 있었다. 담연개는 호남성의 지주와 군인을 대표하여 그들에게 대항하는 폭동을 조직하고 있었다.

학도군이 조직되어 많은 학생들이 군대에 들어갔다. 이 중에는 唐生智*1)라는 학생이 있었다. 나는 학도군의 기반이 혼란해서 싫었다. 그래서 정규군에 가담하여 혁명을 완수하는데 이바지하기로 결심했다. 청 제국의 황제는 아직 물러나지 않고 있었고, 투쟁은 얼마 동안 계속되었다. 군대에서는 매월 7원의 봉급을 받았는데 밥값이 2원이 지불되고, 물도 사먹었다. 월급의 나머지로는 신문을 사 보았는데 나는 열렬한 신문 구독자가 되었다. 우리분대는 호남성 출신 광부와 대장장이가 있었는데 나는 그들을 참 좋아했다. 나머지는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한사람만 악한이었다.

당시 혁명에 관여한 신문 중 湘江日報가 있었는데 사회주의 기사가 실려 있었다. 나는 이 신문을 통해 처음으로 사회주의라는 낱말을 알게 되었다. 사회주의라고 하지만 실제는 사회 개혁에 관해 다른 병사들과 토론했다. 나는 江亢虎*2)가 사회주의와 그 원리에 관해 쓴 작은 책자를 몇 권 읽었다. 나는 이 문제로 학급 친구 몇 사람에게 열렬한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그 중 한 사람만 공감을 표했다.
나는 학생 두어 명을 군대에 들어오도록 설득했다. 나는 소대장이나 대부분의 병사들과 매우 친하게 되었다. 나는 글을 쓸 줄 알았고, 책에 관해 여러 가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博識함을 존경했다. 나는 그들을 위해 편지를 써 주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도와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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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唐生智(1889-1970): 호남인. 1926년에 호남성장과 국민당 제4집단군 총사령을 지냄. 그 후 1927년 그는 汪精衛가 이끄는 武漢 정부의 국민군 사령관이 되었다가 왕정위와 紅軍을 모두 배신하고 호남성의 ‘농민 대학살’을 주도했다.

*2) 江亢虎(1883-1954): 강서 출신. 북경의 讀文學堂에서 공부한 후 일본을 견학했으며, 원세개 정부에서 北洋 編譯局 總辦 겸 <<北洋官報>> 總纂을 지냈다. 1910년 일본을 거쳐 유럽을 여행하고 돌아와 三無主義(무종교 . 무국가 . 무가정) 운동을 전개, 1911년에 상해에서 사회주의연구회를 조직했다. 1927년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귀국하여 왕정위 정부에서 고시원 원장을 지내다가 공산화 이후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했다.

 

청나라는 권력을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고, 국민당 내부에서는 주도권을 둘러싼 투쟁이 일어나 혁명의 결과가 분명하지 않았다. 호남성에서는 전쟁 소문이 떠돌고, 淸제국과 袁世凱*1)에 대항하는 군대가 여러 곳에서 조직되었다. 군대 중에서 湖南軍이 행동을 개시하려 할 때 孫逸仙과 袁世凱가 협정을 맺음으로써 전투 계획은 취소되고, 남과 북은 統一되었으며 南京政府는 해체되었다. 혁명이 종식되었다고 생각한 나는 6 개월 간의 군대생활에서 물러 나와 다시 독서에 열중하기로 했다.

나는 신문 광고를 읽기 시작했는데 한 경찰 학교 광고가 눈길을 끌어 그 학교에 등록했다가 입학 시험을 치르기 전에 한 비누 제조 ‘학원’ 광고를 보았다. 수업료도 필요 없고, 식사가 제공되고, 약간의 월급도 약속했다. 그것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고무적인 광고였는데 비누의 제조가 사회에 얼마나 큰 이익을 주는가 하는 점과 그것이 나라와 국민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 것인가에 관한 글이 실려 있었다.
나는 경찰학교에 가려던 생각을 버리고 비누 기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는 이 학교에 1원의 등록금을 지불했다.

이 무렵 법률 학교에서 수학한 한 친구는 나에게 자기 학교로 들어오라고 권유했다. 나는 법률 학교에 관하여 마음 끌리는 광고를 읽은 적이 있었는데 이 학교는 여러 가지 특이한 일들을 약속했다. 그 학교는 3년 동안 학생들에게 법률에 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줄 것을 약속했고, 이 기간이 끝나면 곧 관리가 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었다. 친구는 나에게 자기 학교 자랑을 늘어놓았다. 나는 결국 집에 편지를 보내어 그 광고를 통해서 약속된 모든 것을 알리고 수업료를 보내 달라고 계속 요청하였다. 나는 법률가나 관리로서의 미래에 대한 밝은 꿈을 그려 보냈다. 나는 그 법률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1원을 지불하고 집에서 소식이 오기만 기다렸다. 운명의 조화는 다시 상업 학교 광고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 나라는 경제 전쟁에 말려들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국가의 경제를 건설할 수 있는 경제학자라고 어느 친구가 나에게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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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袁世凱(1859-1916): 하남성 출신. 그는 후에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大總統이 되었으며, 1915년에는 황제가 되려다가 실패한 후 울화병으로 죽음. 袁世凱는 청조의 몇 군주 밑에서 군대의 참모장을 지낸 인물로서 1911년에 황제를 퇴위시켰다. 國父로 추앙 받던 손문이 귀국하여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남경에서 총통으로 선출되었으나 袁世凱가 모든 軍權을 장악하고 있었다. 손문은 내란을 피하기 위해 총통을 사임했고, 아울러 袁世凱는 헌법제정회의와 의회의 구성을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袁世凱는 여전히 군사 독재를 자행하였으며, 1915년에는 자칭 황제가 되자 그를 추종하던 군벌들이 그를 배신했다. 몇 달이 지나 황제 즉위의 포고령은 취소되고 한 달 후에 袁世凱가 죽자 입헌 정부는 아니지만 공화국이 부활하고 지방 군벌과 국가 분열의 시대로 돌입했다.


나는 그의 권유로 상업 학교에 등록하기 위해 다시 1원을 지불하고 입학 허가서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신문 광고에 관심을 쏟았다. 어느 날 나는 공립상업 고등학교의 매력을 소개한 광고를 읽었는데 이 학교는 정부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며 매우 광범한 課程을 개설하고 있었고, 교사들은 매우 유능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나는 상업 전문가가 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고 또 1원의 등록금을 지불하고 아버지에게 나의 뜻을 써 보냈는데 아버지는 매우 기뻐했다. 그는 상업 수완이 얼마나 이로운 것인가를 재빨리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학교에 입학하여 1개월을 다녔다. 그런데 이 학교에 문제점이 있었다. 그것은 교과과정의 대부분을 영어로 가르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파벳을 겨우 알 정도였는데 이 학교에는 영어 선생이 없었다. 나는 학교에 싫증을 느껴 한 달만에 학업을 그만 두었다. 나는 다시 신문 광고에 관심을 쏟기 시작하였다.

학교에 대한 나의 모험은 省立 第一中學校로 쏠렸다. 나는 1원을 내고 이 학교에 등록을 한 후 입학시험을 치러 수석으로 합격했다. 이 학교는 매우 커서 재학생도 많았고, 졸업생도 많았다. 한 중국인 교사가 나를 여러모로 도와 주었는데 나의 문학적 취향으로 생각할 때 그는 매우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御批通覽輯覽>>*1)을 빌려 주었는데 이 책에는 乾隆 황제*2) 聖旨와 御批(임금이 열람 . 처리한 문서)가 실려 있었다.

이 무렵 長沙의 정부 火藥庫가 폭발하고 한 달 후, 담연개가 원세개에 의해 추방되고 원세개는 공화국의 정치적 기구를 장악했다. 湯薌銘*3)이 담연개를 대신하여 원세개의 황제 즉위식 준비에 착수했다.

나는 제일 중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교과 과정이 제한되어 있어 그것이 매우 못마땅했기 때문이었다. <<御批通覽輯覽>>을 읽은 뒤에 나는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를 하는 것이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해서 6개월 후 이 학교를 그만 두고 매일 호남의 省立 도서관에서 독서를 함으로써 자신의 교육 계획에 열중했다. 나는 규칙적으로 성실하게 책을 읽었다. 이렇게 보낸 6개월이 나에게는 참 귀중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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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御批通覽輯覽: 皇帝로부터 명나라까지의 사적을 기록한 책으로 건륭제의 칙령에 따라서 1767년에 편찬된 책.
*2) 乾隆皇帝(1711-1799): 청제국의 高宗(재위 기간 1735-1795)이다.
*3) 湯薌銘(1885-1975): 호북 출신. 福州의 船政學堂 졸업. 영국에 유학한 후 해군에 입대하여 1913년에는 북양군 을 이끌고, 호남성의 2차 혁명을 진압한 공로로 호남 도독이 되었으며, 원세개로부터 백작의
작위를 받았다. 원세개가 사망한 후에는 漢奸으로 몰렸다.

 

나는 도서관 문이 열릴 때부터 매일 도서관 문을 닫을 때까지 떡 2개로 점심을 먹는 시간을 빼고는 책을 읽었다. 이 자습기간 동안 세계 지리와 세계 역사를 배웠고, 세계 지도를 보며 공부했다. 나는 스미스(Adam Smith)의 <<국부론(Wealth of Nations)>>과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를 읽었으며, 밀( J. S. Mill)의 윤리학에 관한 책도 읽었다. 또 루소(J. J. Rousseau)의 저술과 스펜서(H. Spencer)의 <<논리학(Logic)>>, 몽테스키외(C. Montesquieu)의 법률서적도 읽었다. 고대 그리스의 시와 소설 그리고 신화뿐만 아니라, 러시아 . 영국 . 프랑스와 기타 여러 나라의 역사와 지리에 관해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나는 그때 湘鄕 지방 사람들의 상인 집단 주택에서 살고 있었다. 그곳에 군인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 지방 ‘제대’ 군인들이었다. 그들은 직업도, 돈도 없었다. 상인 주택에서는 학생들과 군인들 싸움이 빈번히 일어나 어느 날은 폭력 사태로 발전했다. 군인들은 공격적이었고 학생들을 죽이려고 해서 나는 변소로 몸을 피해 싸움이 끝날 때까지 숨어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돈이 없었다. 집에서는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나에게 돈을 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더 이상 그 집에서 살수가 없어 숙식할 집을 새로 물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나의 경력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나는 교편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또 다시 광고를 읽기 시작했다. 湖南第一師範學校*1)에 관한 매력적인 광고가 눈에 띄었다. 수업료도 없고, 숙식비도 싸다는 특전에 대해 나는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친구 두 사람도 그 학교에 입학하라고 나에게 권고했다. 그들은 입학 논문 준비에 나의 도움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나의 생각을 편지로 써서 집으로 보냈더니 아버지도 나의 생각에 동의했다. 나는 두 친구를 위해 논문을 작성했고, 내 것도 썼는데 셋 다 합격했다. 나는 사실상 세 사람 몫의 합격을 한 셈이었다. 나는 그 당시 친구를 위한 대리 논문 작성이 부도덕한 행위하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단지 우정에 관한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5년 동안 이 학교에서 공부했다. 이 학교를 다니면서 나는 이렇게 좋은 학교를 두고 쓸데없는 광고에 눈을 판 데 대하여 후회했다. 나는 마침내 이 학교에서 학위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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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湖南省立 第一師範學校: 모택동이 이 학교에 입학한 것은 19세 때였다. 이 학교의 학생은 모두가 장학생이었으며, 졸업 후에는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 학교의 교훈은 인본주의로서 도덕의 함양과 신체 단련, 그리고 사회활동을 강조했고, 장사에서 유일한 서구식 건물이었다. “나는 대학이나 유학을 다녀온 적이 없다. 내 지식과 학문은 이 훌륭한 학교에서 기초를 닦았다”고 훗날 모택동은 회고했다.(Jerome Chen, Mao and Chinese Revolution, P.32(에드가 스노우 주).

 

湖南省立 第一師範學校에서 생활하는 동안 나에게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이 기간 중에 나의 정치적 이상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으며, 사회적 활동으로서의 첫 경험을 얻었다.

湖南省立 第一師範學校는 자연 과학이 필수인데 나는 사회 과학을 전공하고 싶었으므로 자연 과학 과목의 대부분이 성적이 매우 좋지 않았다. 특히 정물화가 필수 과목인 것은 질색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과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가장 단순한 주제를 가능한 한 빨리 그려치우고 강의실을 나와버리기 일쑤였다. 언젠가 ‘반은 태양이고 반은 바위’*1)인 그림을 그렸는데 직선 위에 반원을 그렸다. 또 어떤 때는 미술 시험에서 타원 모양을 그려놓고 달걀이라고 했다. 그 그림은 40점을 얻어 과목 낙제를 했다. 다행히 사회 과학의 여러 과목에서 모두 우수한 점수를 얻어 다른 과목의 열세를 만회했다.

‘텁석부리 袁’이란 별명을 가진 중국인 선생은 나의 글을 놀려대면서 언론인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내가 마음의 사표로 생각하고 있는 梁桂超를 경멸했으며, 그를 반 무식쟁이 취급을 했다. 나는 내 문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韓愈*2)의 시를 읽고 고전의 문체를 익혔다. 그 袁선생 덕분에 나는 오늘날에도 필요한 경우에는 남 못지 않게 고전적인 글을 써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에게 가장 강렬한 인상을 준 선생은 楊昌濟*3)였는데, 그는 영국 에딘버러대학(Edinburgh University)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이었다. 나는 후일 그의 생애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윤리학을 가르치는 이상주의자로서 높은 도덕적 품성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윤리학에 관한 확신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으며, 학생들에게 공명하고 도덕적이며, 덕망이 높았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사회적으로 유익한 사람이 되게 하려는 열망을 불어넣으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의 영향을 받아 蔡元培*4)가 번역한 윤리학 서적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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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반은 태양이고 반은 바위’인 그림’: 이태백의 유명한 詩句인 “半壁見海日”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2) 韓愈(768-824): 중국 당나라 시대의 문인으로서 당송8대가 중의 하나. 호는 退之.
*3) 楊昌濟(1871-1920): 湖南省 長沙 출신. 일찍이 일본 . 영국 . 독일에서 유학하고, 1912년에 귀국하여 湖南 省立 第一師範學校와 湖南 高等師範學校 및 湖南第一 女師等校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1918년부터는 북경대학 철학과 교수로 봉직했다. 훗날 모택동은 그의 딸인 楊開慧와 결혼하게 된다.
*4) 蔡元培(1868-1940): 절강성 출신. 광서 연간에 進士試에 합격하여 한림원 봉직. 청일전쟁에서 중국 패배 후 서양학에 관심. 1902년 中國 敎育會를 설립, 손문의 同盟會에 가입했다. 1907년 독일 유학. 1911년 무창 봉기 이후 귀국. 남경 정부 교육총장을 지냄. 1913-1916년 또 독일 유학. 1917년 북경대학 총장에 부임. 신문화운동 전개로 중국의 개명에 큰 업적을 남김.

 

나는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정신의 힘(心之力)이라는 글을 썼다. 당시 楊昌濟는 이상주의적 입장에서 이상주의자인 나의 글을 격찬해 주었다. 그는 나의 글에 100점을 주었다.

楊昌濟는 모택동의 어린 시절의 관심과 철학적 이상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중국의 석학들 중에서도 드물게 동서양의 학문을 두루 섭렵했다. 그의 가정은 호남의 부유한 지주 집안이어서 그에게 중국의 고전을 배우게 했고, 6년 간 일본 유학을 보냈다. 30세가 되어 그는 다시 유럽으로 건너가 4년 동안 영국과 독일에 유학했다. 그가 중학교의 敎師職을 수락했다는 사실은 그 학교가 그만큼 명문임을 의미한다. 그 후 그는 북경대학의 교수가 되어서도 모택동을 돌보아 주었다.

칸트(I. Kant), 루소, 스펜서에 능통했던 楊昌濟는 호남의 애국지사이자 실용주의 철학자이며 전사였던 王夫之*1)의 추종자였다. 왕부지가 17세기에 썼던 저술들은 모택동과 양창제와 그 밖의 제자들에게도 깊은 감화를 주었는데 蔡和森*2)도 그 중의 하나이다 양창제는 모택동에게 폴젠(Friedrich Paulsen)*3)의 <<윤리학체계(A System of Ethics)>>를 소개해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택동은 채원배 가 번역한 그 책의 판본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데 그 여백에 1만2천자를 적어 넣은 것으로 보면 수련과 극기, 그리고 의지력에 대한 폴젠의 이론에 그가 얼마나 감동했는가를 알 수 있다.(Jerome Chtn, Mao and the Chinese Revolution, P. 44 역주)

당 선생이라는 분은 『民報』의 낡은 복사판을 나에게 주곤 했다. 나는 매우 흥미롭게 이 신문을 읽었다. 나는 이 신문을 통하여 ‘同盟會’의 활동과 綱領에 관해서 알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民報』에서 중국을 횡단 여행하여 西康*4)에 있는 打箭爐에 도달한 두 중국인 학생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이 이야기는 나를 극도로 설레게 만들었다. 나도 그들처럼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만 돈이 없었다. 나는 우선 호남 지방을 여행하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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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王夫之: 明의 崇禎(1628-1644) 시대의 인물. 隱者로서 평생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은거하며 저술에 몰두하였다. 공부에 전념할 때에는 칼로 사지를 찌르며 몰두했다. 전집 324권을 남겼다.

*2) 蔡和森(1895-1931): 호남성 출신. 호남제일고등사범학교와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모택동과 함께 신민학회를 조직. 1919년 독일 유학을 갔다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1921년 강제 귀국 당하여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앙위원에 피선됨. 중국공산당 黨報 <<向導>>의 주필이 되고 코민테른의 중공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다가(1925-1927) 귀국하여 중앙선전부장에 취임. 1931년 중앙 대표로 광동성 공작을 지휘하다가 영국 관헌에게 체포, 광동군벌에 인계되어 처형됨.

*3) 폴젠(Friedrich Paulsen: 1846-1908): 독일 철학자. <<윤리학체계>>, <<쇼펜하워>>, <<햄릿>>등의 저술을
남겼다.

*4) 西康: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서부와 서장(西藏: 티벳) 自治區의 동부를 일컫는 지명.


다음 해 여름에 나는 걸어서 호남성의 횡단 여행에 나섰다. 그것은 5개 縣을 통과하는 여행이었다. 나는 蕭瑜*1)라는 학생과 함께 여행했다. 우리는 한 푼의 돈도 없이 5개 縣을 걸어서 여행했다. 농민들은 우리에게 식사를 제공했고, 잘 곳도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가는 곳마다 환영과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나와 함께 여행을 했던 蕭瑜는 그 후 당시 호남사범학교 교장이었던 易培基*2) 밑에 들어가 남경 정부의 국민당 관리가 되었다. 易培基는 남경 정부의 고위 관리가 되자 蕭瑜를 북경 고궁 박물관의 관리직에 임명했다. 蕭瑜는 그 박물관의 가장 귀중한 소장품의 일부를 팔아 돈을 챙겨 1934년에 자취를 감추었다.*3)

마음이 맞는 친한 동지 몇 사람이 필요했던 나는 어느 날 ‘애국적인 사업에 뜻을 같이 하는 젊은 청년을 구한다’ 는 광고를 長沙의 한 신문에 냈다. 이 광고에 대해 세 사람 半의 반응이 있었다. 한 사람은 羅章龍인데 그는 그 후 공산당에 가담했으나 배신했다. 다른 두 사람은 그 후 극단적인 반혁명 분자가 된 청년들이었다. 또 다른 반 사람의 반응은 李立三*4)이라는 청년이었는데 그는 가부간에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하는 말을 모두 듣고서 자신은 아무런 명확한 의견의 제시도 하지 않고 가 버렸다. 우리의 우정은 그 이상 발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무렵에 나를 중심으로 하는 학생들의 모임이 점차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세포 조직은 그 후 ‘新民學會’가 되어 중국의 제반 문제와 운명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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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蕭瑜(1894-1976): 모택동의 동향 친구. 1919년에 파리대학에 유학하여 철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北平大學과 華北大學에서 교편생활을 하다가 다시 프랑스로 돌아가 파리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으며, 우루과이에서 죽었다. 그는 <<모택동과의 무전 여행기(Mao Tse-tung and I Were Beggars, 1959)>>라는 책을 남겼다. 이 책은 같은 제목으로 월간 중앙 1976년 11월호의 별책 부록으로 한국에서도 출판되었다.
*2) 易培基(1880-1937): 호남성 장사 출신. 武昌의 方言學堂에서 공부한 후 담연개와 더불어 호남교육위원회를 조직. 廣東大學 교수와 고궁 박물원 원장을 지냈으나 말년에 수장품을 훔쳤다는 죄목으로 피소되어 불우하게 죽었다. 易培基는 지난 날 그의 제자였던 모택동에게 호남사범학교의 부속 ‘모범’ 초등학교의 교장 자리를 주선해 주었다. 그는 그곳에서 1922년까지 중국문학을 가르쳤다. 1965년 그는 당시에 교사가 되는 것 이외에 어떤 직업도 바라지 않았다고 에드가 스노우에게 말하였다.

*3) 이 도난 사건은 易培基에게 책임이 있었다. 그 도난 사건이 일어날 당시 그는 그 박물관의 관장이었고 소유는 그의 조수였기 때문이었다. 그 보물은 훗날 유럽으로 팔려 갔다.

*4) 李立三(1899-1967): 호남성 출신. 1919-1921년까지 독일 유학 후 귀국하여 중국공산당에 입당. 1927년의 남창봉기 이후 광동성위원회 서기를 지냈으나 좌경노선이라는 비판을 받고, 1931-1946년 사이에는 소련에서 활약했다. 중공 건국 후에는 노동부장을 지냈으나 문화대혁명 동안에 핍박을 받고 죽었다. 여기에서 이립삼 노선이라 함은 공산화 과정에서 도시를 거점으로 확보한 다음에 주변으로 세력을 확산해야 한다는 논리로서, 도시보다는 그를 둘러싸고 있는 농촌을 공산화함으로써 도시를 공산화시켜야 한다는 모택동의 노선에 배치되는 것이었다.(신복룡 역주) 이 사람은 후에 이립삼 노선을 주장하여 모택동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에드가 스노우)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이 모임은 진지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작은 모임이었으며 사소한 일을 논의할 시간이 없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는 어떤 목적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은 사랑이라든가 연애라든가 하는 것을 즐길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고 또 지식에 대한 욕구가 긴요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여자라든가 혹은 개인적인 문제와 같은 것을 논의할 수도 없었다.

나는 여자에 대하여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나의 부모는 내가 14살이 되던 해에 20살 되는 한 처녀에게 나를 장가보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여자와 신접살림도 꾸미지 않았으며 그 후에도 함께 살지 않았다. 나는 그를 아내로 생각한 적이 없으며, 지금도 그에 대한 생각을 거의 하지 않는다. 여성의 매력에 관한 문제는 그 나이 젊은이들의 생활에 항상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나의 동료들은 그러한 논의를 모두 접어 두고 일상 생활의 평범한 문제에 대해서도 일체 이야기하지 않았다.

언제인가 한 청년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약간의 고기를 사야 되겠다는 말을 하고서 내가 있는데서 하인을 불러 그 문제를 의논하더니 그에게 고기를 사 오라고 명령하는 것이었다. 나는 매우 불쾌한 생각이 들어 다시는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 나와 나의 친구들은 원대한 문제들, 이를테면 인간과 인간 사회, 중국․세계․우주 등의 본질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기를 좋아했다.

우리는 또한 신체 단련에도 힘을 썼다. 겨울 휴가 때에는 들판을 누비고 다니기도 하고 산을 오르내리기도 했으며, 성벽을 따라 걷기도 하고 강이나 냇물을 건너기도 했다. 비가 오면 셔츠를 벗고 빗물에 목욕을 했다. 태양이 뜨겁게 내려 쬘 때면 우리는 웃통을 벗어버리고, 太陽浴을 했다. 우리는 또한 봄바람을 맞으면서 이것은 風浴이라고 고함을 쳤다. 이미 서리가 내리고 있는데도 밖에서 자기도 하고 심지어는 11월에도 찬 강물에서 수영을 했다. 이 모든 것은 ‘신체 단련’이라는 이름 아래 행하여졌다. 이는 훗날 南中國 일대를 가로지르는 전진과 후퇴의 수많은 행진, 그리고 江西로부터 西北 邊境에 이르기까지의 長征을 수행하는 동안 그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육체를 단련해 주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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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1077-1967년의 기간에 모택동은 문화대혁명의 홍위병들에게 자신의 소년 시절에 겪은 그러한 경험을 본받아 그들 자신의 ‘작은 장정’을 떠나라고 고무했다.(에드가 스노우)


3) 新民學會 시절
나는 다른 도시의 친구나 학생들과도 광범위한 친교 관계를 가졌다. 나는 보다 긴밀한 조직의 필요성을 점차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1917년에 나는 다른 친구 몇 사람과 협조하여 ‘신민학회’를 결성했다. 회원은 70-80명이나 되었으며, 이 중에는 뒷날에 중국 공산주의와 중국 혁명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저명한 인사들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 나매(羅邁: 李維漢)*1) : 현재 당 조직위원회 비서
. 하희(夏曦)*2): 현재 홍군 제2전선에 복무 중
. 하숙형(何淑衡)*3): 중앙 소비에트 지역 최고재판소 고법판사로 있다가
蔣介石에게 被殺됨.
. 곽량(郭亮)*4): 저명한 노동 조직자로서 1930년에 何鍵*5) 장군에게 피살됨.
. 소삼(蕭三): 현재 소련에서 作家 생활을 하고 있음.
. 채화삼(蔡和森):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서 1927년에 蔣介石에게 피살됨. . 이례용(易禮容):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국민당으로 전향하여
자본주의 노동조합의 조직자가 되었음.
. 소정(蕭埩): 저명한 당 지도자로서 창당 문서에 조인한 여섯 사람 중의
하나였으나 오래 전에 병사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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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나매(羅邁: 일명 李維漢 1896-1984): 호남성 출신. 신민학회의 창립회원으로 1919-1922년에 독일 유학. 귀국 후 공산당에 가입하여 江蘇省 조직부장을 지내고 1931-1933년에 소련에 유학하고 돌아와 장정에 참가하여 지방공작부장을 지냈다. 건국 후에 중앙집행위원 . 상임위원 . 부주석을 지냈다.

*2) 하희(夏曦: 1901-1936): 호남성 출신. 1920년 중국사회주의청년단에 가입했다가 이듬해 중국공산당에 가입. 1922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공산당대회에 참석하고, 1925년 국공합작시 국민당 호남성 집행위원으로 활약. 1927년 5차 중국공산당 全代에서 중앙위원에 피선되어 남창봉기에 참가. 1932년 紅軍 제6군단 정치부 주임으로 장정에 참가했다 희생되었다.

*3) 하숙형(何淑衡: 1876-1935): 호남성 출신. 淸末 民國 초의 수재. 호남 성립 제1사범학교 졸업. 1918년 모택동과 신민학회를 창설. 湘江學校 교장을 거쳐 1926년 국민당 호남성 당부 감찰위원을 지냈고, 모스크바 中山 대학에서 수학(1928-1930). 장정에 참여한 후 복건성 전투에서 전사했다.

*4) 곽량(郭亮: 1901-1928): 호남성 출신. 1920년 신민학회에 참가한 후 1921년 중국공산당원이 됨. 1927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에 당선되어 남창봉기에 참가했으며, 국민당에 체포되어 희생되었다.

*5) 何鍵(1887-1956): 호남성 출신. 保定軍官學校 졸업. 湘軍 奇兵團長과 9여단장을 지냈으며, 1926년 국민당에 입당한 후로 철저한 반공주의자가 되어 초공 작전을 전개했고, 공산화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총통부 고문을 지냈다.


‘新民學會’ 회원 중의 대다수가 1927년의 반혁명 기간 중에 죽었다.*1) 그 당시에 결정된 ‘新民學會’와 비슷한 또 하나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것은 湖北의 ‘互助社’라는 것이었다. 그 회원 중의 많은 사람들이 후일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그들 중에는 蔣介石의 반혁명 기간 중에 죽은 지도급 인물 惲大英*2)도 있었다. 현재 홍군 사관학교 총장으로 있는 林彪*3)와 현재 白軍의 일을 맡고 있는 長浩*4)도 그 회원이었다. 북경에는 ‘做輔社’라는 모임이 있었으며 그 회원 중의 일부는 뒷날에 紅軍이 되었다. 중국의 어느 곳에나 청년 단체가 있었는데 특히 上海․抗州․漢口․天津*5) 등에는 그 당시 중국의 정치에 영향력을 나타내기 시작한 호전적인 젊은이들에 의해서 급진적인 모임이 조직되고 있었다.

이들 모임의 대부분은 陳獨秀*6)를 편집자로 하는 저명한 文藝復興誌인 『新靑年』의 영향을 다소 받아 조직되었다.*5) 나는 長沙의 師範學校를 다니는 동안에 이 잡지를 읽기 시작했는데 나는 특히 胡適*6)과 陳獨秀의 글을 읽고 격찬했다. 그들은 이미 나의 마음속에서 떠난 梁啓超와 姜有爲를 대신하여 한동안 나의 師表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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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그 밖의 회원으로는 劉小奇 ․ 任弼時 ․ 李富春 ․ 王若飛 ․ 騰代遠 ․ 蕭勁光, , 그리고 유일한 여성으로서 蔡和三의 여동생인 蔡暢이 포함되어 있었다. 훗날 이들은 모두 중국공산당의 고위직을 맡았다. 모택동이 가장 존경했고 훗날 장인이 된 楊昌濟와 長沙의 第一師範學校의 恩師였던 徐特立이 그들의 후원자였다.
*2) 惲大英(1895-1931): 호북성 무창 출신. 무한의 중화대학을 졸업하고 5.4운동에 참여. 신문화 운동과 반 자본주의 운동으로 청년기를 보냈다. 사천성의 盧州 師範學校 교사를 지냄. 1912년에 상해로 가서 중국사회주의청년단 중앙집행위원 겸 선전부장을 맡고, 동시에 상해대학교 교수와 국민당 상해집행부 선전 비서를 거쳐 황포군관학교 정치총교관으로 활약. 1919년 이후 상해에서 지하 공작을 하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3) 林彪(1906-1971): 호북성 출신. 黃埔 軍官學校 제4기로 졸업함과 동시에 중국공산당에 가입. 남창봉기에 참여한 후 紅軍 제4군 군장과 제1군단장을 지냈으며, 중․일 전쟁 중에는 팔로군 115사장을 지냄. 국공 내전 당시에는 제4야전군 사령관으로 무공을 세웠고, 건국 후에는 국방부장, 당중앙위원 부주석, 元帥를 지냄. 문화대혁명 당시에 반혁명군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비행기로 탈주하다가 몽고 상공에서 격추되어 사망하였다.
*4) 長浩(1897-1942): 호북성 출신. 1922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후 모스크바의 동방 노동대학에서 수학(1924-1925)한 후 全局總工會 상임위원을 거쳐 모스크바 주재 중국공산당 대표부에서 활약. 중․일 전쟁 중에는 팔로군 129師의 정치 위원으로 투쟁했으며 『中國工人』의 주필을 지냄.
*5) 天津: 이 당시 천진에는 覺悟社라는 모임이 있었다. 이 모임은 과격파 청년들이 이끄는 조직으로서 周恩來는 그 창설자 중 한사람이다. 이 밖의 회원으로는 주은래의 아내인 鄧潁超,(1904-1992), 馬駿(1927년 북경에서 처형됨), 담소잠(훗날 국민당 광동위원회 비서)등이 있었다.
*6) 陳獨秀(1879-1942): 안휘성 출신. 1897년 杭州의 求是書院에서 공부할 때부터 수재로 두각을 나타냈다. 1901-1903년에 도쿄(東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06-1907년에 다시 일본에 유학. 귀국하여 杭州절강육군소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신해혁명 이후 안휘고등학당 주임으로 재직하면서 1915년부터 『新靑年』을 발행하여 문화운동을 주도함. 1917년 북경대학 문과대학장에 취임한 이래 李大釗와 함께 『每週評論』을 통하여 맑시즘을 보급했고, 1919년의 5.4운동을 주도하면서 1920년 상해 공산주의 소조를 만들었고, 이듬해에 중국공산당을 창당하여 중앙국 서기에 취임했으며, 제1-5차 중앙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함. 그 후 우경화를 보이면서 당에서 배척되어 상해에 은거하다가 국민당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여 사천성에서 죽었음.

 

그 당시 내 마음은 自由主義, 民主的 改革主義, 空想的 社會主義 등의 理念이 묘하게 뒤섞인 混合體였다. 나는 19세기 自由主義, 理想主義(utopianism), 舊時代의 自由主義 등에 관해서도 다소 막연한 情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反軍國主義者였고 反帝國主義者였다.

나는 1913년*1) 湖南第一師範學校에 入學하여 1918년에 卒業했다.(역주 *1) 원문에는 1912년으로 되어 있는데 모택동의 착오이다.)


4) 師範學校 시절
長沙에서 師範學校 과정을 지내는 동안 거액의 등록금을 포함해서 나는 단지 160원을 가지고 생활했다. 나는 이 돈 중에서 1/3은 신문을 구독하는 데 썼다. 왜냐하면 정기구독을 하는 데에는 매월 약1원이나 사용했으며, 가끔 서적과 정기간행물을 구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부질없는 짓을 한다고 미워했으며 쓸모 없는 종이 쪽지를 사기 위해 돈을 낭비한다고 야단쳤다. 그러나 나는 신문을 읽는 습관을 얻었으며, 1911년부터 1927년까지 정강산에 들어갔을 때에도 북경․상해․호남의 신문을 읽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

내가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역주: 1919년10월5일), 나는 더욱 더 귀향할 의사가 없어져 그 해 여름에 북경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호남성의 많은 학생들이 ‘일하면서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로 여행할 계획을 갖게 되자 프랑스에서는 자신들을 위해 세계 대전 동안 중국의 젊은이들을 모집하곤 했다. 이러한 학생들은 중국을 출발하기 전에 북경에서 프랑스어를 공부했는데 나는 이 모임을 도와주었다. 호남사범학교 출신으로 외국으로 유학을 떠난 많은 학생들은 후에 유명한 영웅적 혁명가가 되었다. 徐特立도 이 모임에 영향을 받아 40세 때 호남 사범학교 교수를 그만두고 프랑스에 갔다. 그러나 그는 1927년까지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나는 호남 학생들과 함께 북경에 갔다. 그 당시 나는 유럽에 가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조국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의 생활이 유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에 가기로 작정한 학생들은 현재 長沙의 中法大學校長인 李石曾*1)에게 프랑스어를 배웠다. 그러나 나는 다른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공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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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李石曾(1881-1975): 본명 이욱영. 하북성 출신. 1902년 프랑스 유학. 러시아의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1845-1921)에 심취. 프랑스에서 『世界社』를 조직하고 주보로 『新世界』를 발행했으며 동맹회에 가입. 1906년 귀국.천진에 머물며 『民意報』를 창간하여 사회개량주의를 보급하고, 1915년에 北平大學 교수가 됨. 1924년 국민당 감찰위원에 피선.北平大學 학장, 북평 연구원 원장을 역임. 중․일 전쟁 기간에는 외교 활동에 종사. 총통부 資政을 맡았다. 공산화와 함께 대북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북경은 나에게 경제적으로 너무 부담스러웠다. 내가 애당초 북경에 갔을 때에도 나는 친구에게서 돈을 꿀 정도였기 때문에 일자리부터 찾아야 했다. 내가 다니던 사범학교의 윤리 선생인 楊昌濟는 이 무렵 北京大學의 敎授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직장을 구하는 데 도와 달라고 사정했다. 그는 북경대학 도서관장인 李大釗*1)에게 나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는 후에 중국공산당의 창당 요원이 되었다가 張作霖*2)에게 처형되었다. 李大釗는 나에게 도서관 사서 조수의 일자리를 주었으며, 나는 월 8원의 넉넉한 보수를 받았다.

나의 직책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를 피했다. 내 임무 중의 하나는 신문을 읽으러 오는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하는 것이었는데 그들은 나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독서하러 오는 사람들 중에서 나는 傅斯年*3)이나 羅家倫*4)과 같은 신문화 운동의 유명한 지도자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매우 관심이 많았으며, 그들과 정치적․문화적인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했으나 그들은 무척 바쁜 사람들이라 남부 사투리로 말하는 도서관 조수의 이야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용기를 잃지 않았다. 나는 대학 강의를 들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 ‘哲學會’와 ‘新文學會’에 가담했다. ‘新文學會’에서 나는 지금 남경 정부의 고급 관리인 陳公博*4)과 같은 동료 학생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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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李大釗 (1889-1927): 하북성 출신. 字는 壽昌. 號는 龜年. 1907년 北洋法政專門學校에 입학. 1913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서 수학. 귀국 후 1918년 북경대학도서관 주임 겸 경제학 교수가 됨. 진득수와 함께 『每週評論』을 발간. 5.․4 운동에 참가. 1920년 맑스주의연구회를 주도하면서 북경 공산주의 小組를 조직함. 중국공산당이 창당된 후에는 북방지국공작 활동에 종사. 1922년 국민당에 가입하여 國共合作에 참여. 1924년부터 공산당 활동을 전개하다가 張作霖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을 받았다.

*2) 張作霖 (1875-1928): 奉天 출신. 청말 遊擊馬隊에 입대한 후 軍閥로 성장하여 원세개 치하에서 27師 사장을 지냈고, 봉천 독군겸순안사(1916)와 봉천 성장과 동삼성 巡閤使(1918)가 됨으로써 軍閥로 성장했다. 1922년 동삼성의 자치보안사령이 되어 독립을 선언하고 반공 노선을 표방하며 李大釗을 살해했다. 1928년 장개석 군에게 패배하고 동삼성으로 퇴각하던 중 그의 귀환을 꺼린 관동군이 매설한 톡탄을 맞고 열차에서 피살되었다.

*3) 傳斯年 (1896-1590): 산동성 출신. 북경대학에 입학하여 新潮社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新潮』를 발행. 5.4운동에 참가한 후 영국 런던대학과 베를린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한 후 귀국(1926)하여 증산대학 문화원장과 북평대학 교수를 지냈고, 대륙이 공산화된 이후에는 대만대학 총장을 역임했다.

*4) 羅家倫 (1897-1969): 강서성 출신. 北京 大學에 入學하여(1917) 신문화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新潮』를 창간하고 5․4운동을 주도했다. 1920년 미국 유학, 영국․프랑스․독일을 돌아보고 1926년 귀국. 국민당 중앙당학교의 창설에 참여하여 부주임이 되었으며, 淸華大학장, 중앙대학 학장, 駐인도대사를 역임했으며, 공산화와 함께 대만으로 건너가 고시원 부원장과 국사관 판정을 역임했다.
후에 공산주의자가 되어 얼마 후 소위 ‘제3당’의 구성원이 된 譚平山*1)과 邵飄萍*2은 특히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新聞學會’에서 강연도 했다. 그는 아주 自由主義的이고도 열렬한 이상주의자이며,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1926년, 張作霖에 의해 살해되었다.


내가 도서관에서 일하는 동안 현재 소비에트 정부의 부주석인 張國燾*3), 후에 캘리포니아주의 KKK(Ku Klux Klan)에 가입한 康白情*4), 그리고 현재 남경 중부의 교육부 차장인 殷錫朋*5)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楊開慧*6)을 만나 사랑하게 되었다. 이 여자는 젊었을 때 나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그 후 북경에서는 나의 동지가 된, 지난날의 윤리선생인 楊昌濟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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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譚平山(1886-1956): 광동 출신. 1920년에 중국공산주의 小組 창건에 참여한 후 제3․4차 全代 중앙 위원에 선출되고, 제1차 國共 합작 기간에는 국민당 집행위원이 됨. 남창 봉기를 주도. 1948년 국민당 부주석. 공산화 이후 民革 중앙 부주석이 되었다.

*2) 邵飄萍(1886-1926): 절강성 출신. 1908년 절강 高等學校를 졸업하고 『議民日報』를 창간하여 원세개 정권에 항거하다가 세 차례 투옥된 후 일본에 망명(1914-1916). 귀국 후 『時事申報』주필과 『京報』 사장을 역임하면서 맑시즘 보급에 노력했고, 1924년에 공산당에 가입했다가 봉천 군벌에 의해 피살되었다.

*3) 張國燾(1897-1979): 강서성 출신. 1919년 北京大學 입학. 5․4운동에 참여. 북경학생연합회 주석이 되어 일찍이 촉망을 받았다. 1920년에 北京 共産主義 小組의 창설에 참여한 후 1921년 중국 공산당 창당 대표가 되었으며, 1922년에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極東 被壓迫民族大會에 중국 대표로 참가했다. 1924년부터 국민당으로 옮겨 중앙 집행위원이 되고, 군벌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공산당에 들어가 정치국 상임위원이 됨. 장정에 참여한 후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에 올랐으나 당의 북상 방침에 반대하고, 남진하여 중앙군을 지휘함으로써 홍군의 분열을 초래했다. 1937년 감숙성 변구 주석이 되어 반공으로 선회한 후 국민당에 입당하여 참정회 참정원이 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캐나다에 이민하여 그곳에서
죽었다.

*4) 康白情(1896-1945): 사천성 출신. 1916년에 北京大學에 입학하여 『新潮社』운동에 참여했다.
*5) 段錫朋(1897-1948): 강서성 출신. 北京大學에 입학하여 5․4운동 당시에는 학생간사회 총무를 맡아 활약했고, 전국학생연합회 회장을 지냈다. 1920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영국․프랑스․독일을 거쳐 1925년 귀국. 무창대학․중산대학의 교수를 거쳐 육․해․공군 총사령부 당무처장, 교육부차장, 국립정치대학 교육장을 지냈다.

*6) 楊開慧: 楊昌濟의 딸. 아내 楊開慧에 대한 애정은 모택동의 친필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친필은 그의 자작시를 쓴 것이다. 모택동이 그토록 사랑했던 楊開慧가 1930년 내전 중에 국민당에게 처형당한 후 5년이 지난 1933년 그의 오랜 동지인 중국공산당 湖南省委員會 委員이며, 湖南省 農民會 비서였던 柳취씬(Liu Chi-hsun)이 내전에서 전사한 후 그의 아내 李淑一이 남편이 죽은 후에도 모택동의 보살핌을 받았다. 1957년에 李淑一이 남편을 생각하며 한 편의 詩를 써서 모택동에게 보냈고, 모택동은 그에 대한 답으로 이 시를 써서 보냈다. <나는 아름다운 버들가지를 잃고, 그대 또한 버들가지를 잃었구려. 버들가지 가볍게 날아 하늘로 올라 갔누나. 묻노니 오강아, 그대는 무엇을 주려는가? 그들에게 한 잔의 가화주를 대접하네. 적막한 항아는 넓은 소매 펼치고. 만리장공에 충혼의 춤을 추노라. 인간에게는 화란이 있다고
홀연히 말하니 비 오듯 쏟아지누나.(我失驕楊君失柳. 楊柳輕颱直上重霄九. 問讅吳剛何所有. 吳剛捧出桂花酒. 寂寞嫦娥舒廣柚. 萬里長空且爲忠魂舞. 忽報人間曾伏虎. 淚飛頓作傾盆雨) 이 詩중의 吳剛은 중국의 전설적인 인물로 달나라의 계수나무를 꺾었다고 하며, 항아는 달에 산다는 선녀를 일컬음. .

 


정치에 대한 나의 관심은 계속 깊어져서 나의 마음은 더욱더 혁명주의로 전향하게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혁명에 대한 배경을 얘기했지만 아직도 내가 이야기해야 할 방향에 대해 이처럼 혼동하고 있다. 나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안내서를 읽었고 이런 것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나를 종종 찾아오던 朱謙之*1)라는 학생과 함께 무정부주의와 중국에서의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 토론했다. 그 당시 나는 그러한 무정부주의의 제안에 매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북경에서의 생활 상태는 매우 비참했다. 그런데 그와는 대조적으로 옛 수도의 아름다움은 활기가 있어서 나의 비참한 생활을 보상해 주었다. 나는 다른 7명과 함께 三眼井이라는 곳의 조그마한 방에서 기거했다. 우리가 저녁도 먹지 못한 채 짐짝처럼 구들장을 베고 누울 때면 숨쉴 여유도 없었고, 돌아누울 때면 옆 사람에게 미리 알리곤 했다. 그러나 고궁과 공원에서 나는 북녘지방의 봄을 맞이했고, 北海*2)에 얼음이 아직도 얼어 있을 무렵, 나는 하얀 매화 꽃송이도 보았고, 수정같이 얼음이 매달린 북해의 버드나무를 보았다. ‘千樹萬樹梨花開’라고 노래한 당나라 시인 岑參*3)의 묘사를 연상하게 하는 것들이었다. 북경의 수많은 나무들의 생동은 나에게 호기심과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1919년 초에 나는 프랑스로 가는 학생들과 함께 상해로 갔다. 나는 天津으로 가는 차표밖에 없어서 더 이상 갈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중국 속담에 ‘하늘은 여행자를 머무르게 하지는 않는다(天無絶人之路)’ 라는 말이 있듯이 동료 학생에게 10원을 운 좋게 빌렸다. 그는 북경의 꽁뜨학교(Comte School: 孔德學校)에서 얼마간의 돈을 벌어 둔 것이 있었다. 나는 가까스로 포구까지 가는 차표를 샀고, 남경으로 가는 길에 曲埠에 들러 공자묘를 찾았다. 나는 공자의 제자들이 발을 씻던 시냇물과 아이들처럼 집을 짓고 살던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 그는 현재 그의 사당이 있는 곳 가까이에 유명한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나는 그곳을 둘러보고, 역시 공자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顔回가 한 때 살았던 강도 돌아보았고, 맹자의 출생지도 돌아보았으며, 山東省의 聖山인 泰山에도 올라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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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朱謙之(1899-1972): 복건성 출신. 北京大學에 입학하여 5․4운동에 참가했으며, 1924년에 아모이(廈門)大學 교수 가 됨. 1929-1931 일본에 유학. 中山大學 교수로 재직하다가 1952년부터 北京大學 哲學敎授로 생애를 마쳤다.
*2) 北海: 이 북해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나오는 海(sea)란 바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날 紫禁省 안에 있던 인공 호수를 의미한다.
*3) 岑參: 당나라의 시인. 진사시에 합격한 후로 杜甫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라 嘉州刺史에 올랐으나 벼슬을 버리고 주유천하를 하다가 蜀나라에서 客死했다.

 

泰山은 馮玉祥將軍*1)이 隱退하여 그의 愛國的인 글을 남긴 곳이다. 그러나 포구에 도착했을 때 나는 기차표도, 돈도 없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빌려 줄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아 나는 이 도시를 떠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도둑이 나의 신발을 훔쳐 가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를 어쩔 것인가! 그러나 다시 ‘하늘은 여행자를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天無絶人之路).’ 나는 철도 역 밖에서 湖南으로부터 온 옛 친구를 만나는 행운의 기회를 얻었다. 그는 하늘에서 내려온 ‘착한 천사’임이 분명했다. 그는 나에게 신발 한 켤레를 살 돈과 상해까지의 표를 살 돈을 빌려주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새 신발만을 바라보며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 상해에 도착해 보니 프랑스에 갈 학생들을 도와 줄 금액이 상당히 모금되어 있음을 알았다. 나는 오히려 그들의 도움으로 호남으로 돌아갈 차비를 마련했다. 나는 기선에서 친구들과 헤어진 후 長沙로 떠났다.

그것이 나의 첫 번째 북부 여행이었다. 나는 北海의 얼음 위와 洞定湖를 거닐고 保定府 성벽과 『三國志』에 나오는 저 유명한 徐州와 역사적으로 유명한 南京省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泰山에 올라가 孔子墓도 방문했다. 이러한 사실들은 湖南의 旅行을 더욱 의미 있게 해준 것들이었다.

長沙로 돌아온 나는 政治에 좀 더 직접적인 역할을 했다. 5․4 운동*2) 이후 나는 학생 운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바쳤고, 中國 大陸 南部 地方의 學生 運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湖南 學生誌 『湘江評論』의 編輯人이 되었다. 나는 長沙에서 현대의 문화와 정치적 경향을 연구하는 文化書社의 설립을 지원했다. 文化書社와 新民學會는 당시 湖南의 督軍*3)으로서 악명이 높던 張敬堯*4)에 격렬히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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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馮玉祥將軍(1882-1948): 안휘 출신의 군벌. 일찍이 군에 투신하여 북양군에서 복무했고, 1924년 국민군 총사령겸 제1군 군장이 되고, 1926년 국민당에 가입 제2집단군 총사령이 됨. 1928년 이후에는 장개석의 반대편이 되었으나 국공합작 이후에는 동맹군 총사령이 됨. 1936년 남경 정부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거쳐 6전구 사령관으로 항전했으며, 중공 정권의 부탁을 받고 國共 화해에 노력을 기울임. 黑海에서 선상 화재로 사망함.

*2) 5․4운동: 1919년 5월 4일에 북경 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 운동. 1919년 1월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소집된 파리 회의에서 중국의 군벌에게 21개조의 요구안을 제시하고 군벌이 이를 비준한 데 대한 분노와 같은 해 3월에 한국에서 3․1운동에 자극된 北京大學 학생들이 ‘취소 21개조’, ‘外爭國權’, ‘內懲國賊’을 외치며 시위에 들어가자 이에 대한 군벌의 탄압이 시작되었고, 이어서 상해․남경․천진․抗州, 무한 등지에서 정치적 파업이 일어난 사건.

*3) 督軍: 1916-1923년 사이에 존재했던 지방의 군단장으로서 지방 장관을 겸했다.
*4) 張敬堯(1880-1933): 안휘성 출신. 保定 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북양군에 입대하여 군단장, 旅長, 南昌鎭守使를 거쳐 1918년 湖南 도독 겸 省長이 되어 학정을 자행하다가 1920년 인민 폭동으로 쫓겨나 張作霖의 부하로 있다가 국민당 특무조에 의해 암살되었다.

 

 

우리는 張敬堯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의 학생운동을 전개했고, 북경과 그 당시 孫文이 활동하고 있던 南西 지방에도 張敬堯의 추방을 선동하는 대표를 파견했다. 학생들의 반대 운동에 대한 보복 조치로 張敬堯는 『湘江評論』을 탄압했다.

그후 ‘新民學會’를 대표해서 북경에 갔을 때 나는 反軍閥運動을 조직했다. ‘新民學會’는 張敬堯의 반대 운동을 反軍閥 운동으로 확대시켰으며, 나는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통신사의 編輯長을 맡았다. 湖南에서의 運動은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張敬堯는 담연개에 의해서 전복되고, 새로운 정권이 長沙에서 탄생했다. 이 무렵 ‘新民學會’는 左․右翼으로 갈라졌는데 좌익은 대폭적인 사회적․경제적․정치적 개혁을 주장했다.

나는 1920년(본문은 1919년. 모택동의 착오인 듯)에 두 번째로 上海로 가서 陳獨秀*1)를 다시 만났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北京大學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누구보다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그 당시 湖南 學生 運動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호적을 찾아가서 만난 적이 있다. 나는 상해에서 陳獨秀와 더불어 ‘改造湖南聯盟’의 組織을 위한 計劃을 상의했다. 그 후 나는 長沙로 돌아와 이 연맹의 조직에 착수했다. 나는 ‘新民學會’에서 활약하는 한편 長沙에서 敎鞭을 잡았다. 이 무렵 ‘新民學會’는 湖南省의 독립을 위한 계획을 수립했는데, 이는 사실상 湖南의 自治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경 정부에 혐오를 느낄 뿐만 아니라, 만약 북경으로부터 해방되면 湖南은 더 빨리 근대화될 수 있다고 믿은 우리 연맹은 湖南省의 分離를 위한 煽動을 전개했다. 나는 그때 미국의 몬로주의(Monroe Doctrine)의 열렬한 支持者이며 門戶開放主義者였다. 담연개는 湖南의 ‘自治 運動’을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려던 趙恒惕*2)이라는 군벌에 의해 湖南에서 逐出되었다. 담연개는 湖南의 자치를 지지하는 것처럼 假裝하고 ‘中國聯省自治’를 擁護했다. 그러나 그는 權力을 爭取하자마자 큰 힘으로 民主化 運動을 抑壓했다. 우리 연맹은 남녀 평등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代表政府制와 부르주아 民主制를 위한 政綱의 전반적인 승인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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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陳獨秀는 1879년 안휘성에서 태어났다. 그는 저명한 학자요, 문필가로서 ‘중국문예부흥의 요람지’라고 할 수 있는 국립 北京大學에서 여러 해 동안 문학부장을 지냈다. 그의 『新靑年』은 죽은 文言에 대신하여 白話를 채택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李大釗와 함께 중국에서 맑스주의의 연구를 주도한 인물인 동시에 중국 공산당의 창립자이자 추진자였으며, 후에는 극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는 1933년에 국민당에 의해 체포되어 ‘터무니없는 재판’을 받고 지금은 남경에서 오랫동안 유수되어 있다. 그는 魯迅과 함께 그 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문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2) 趙恒惕(1880-1971): 호남성 출신. 어려서 武備學堂에서 공부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 동맹회에 가입했고, 1906년 귀국. 광서성에서 군인으로 복무. 신해혁명 후에는 제1사장과 호남수륙군 총사령을 지냈으며, 1920년에 연성자치를 선언하고 호남성장 겸 상군 총사령으로 호남 농민 폭동을 진압했다. 공산화후에는 대만으로 건너가 총통부 자정을 지냈다.


우리들은 기관지인 『新湖南』을 통하여 이러한 개혁을 공개적으로 옹호했고,大地主와 軍部에 의해 임명된 귀족으로 구성된 지방 의회에 대한 공격을 유도했다. 이러한 투쟁은 허구와 과장된 표현으로 가득 찬 구호로 끝났다. 의회에 대한 공격은 湖南에서 큰 문제로 여겨져 統治者들을 놀라게 했다. 그렇지만 趙恒惕은 권력을 잡자 자신이 이전에 지지했던 모든 사상을 버렸으며, 특히 그는 민주화를 위한 모든 요구를 억압했다. 따라서 ‘新民學會’는 그에 대해 투쟁에로 화살을 돌렸다.

나는 1920년에 있었던 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우리 ‘新民學會’는 러시아의 10월 革命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示威를 조직하다가 경찰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그때 그들은 示威 중에 ‘紅旗’를 흔들려고 했지만 그것마저도 경찰에 의해 禁止되었다. 그들은 당시의 憲法12조에 의거하여 국민들이 集會․결사․언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개의치 않았다. 경찰은 헌법의 내용을 교육받은 바 없고 통치자 趙恒惕의 명령을 수행할 뿐이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나는 大衆 運動을 통해서 보장받은 統治 權力만이 거대한 革命의 實現을 保障할 수 있다는 確信을 더욱 더 갖게 되었다.

1920년 겨울, 나는 처음 정치적으로 노동자들을 결성하여 맑스理論과 러시아 革命의 歷史的 敎訓에 따라서 이들을 이끌어 나갔다. 두 번째로 北京을 訪問하는 동안 나는 러시아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관한 책을 耽讀했고, 당시 중국에서는 쉽게 얻어 볼 수 없는 공산주의 문헌들을 열심히 찾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 권의 책은 나의 가슴속 깊이 새겨졌다.

나의 마음속에 맑스主義의 교리가 확립되었고, 그것으로부터 나는 정확한 歷史 解釋을 받아들였으며, 이후로 나의 思想은 동요되지 않았다. 세 권의 책이라 함은 陳望道*1)에 의해 중국에서 처음 출판된 『共産黨宣言』(Communist Manifesto)과 카우츠키(K.Kautsky)*2)의 『階級 鬪爭』(Class Struggle), 커커프(T. Kirkupp)*3)의『社會主義史』(History Of Socialism)였다. 1920년 여름까지 나는 이론과 행동에서 맑스主義者가 되었고, 이 때부터 나는 자신을 맑스 主義者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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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1) 陳望道(1890-1977): 절강성 출신. 어려서 일본에 휴학. 1919년 귀국. 맑시즘보급에 진력. 1920년 중국에서 최초로 『共産黨宣言』을 번역. 상해 공산주의소조 결성. 『新靑年』을 편집 발행. 1923년 이후 상해대학 교수로 봉직. 항일운동 전개. 안휘대학․광서대학․복단대학 교수로 활약. 건국 이후 복단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면서 『辭海』를 主編했다.

*2) 카우츠키(K.Kautsky: 1854-1938): 프라하 출신의 독일 사회주의자. 1881년 엥겔스(F. Engels)의 비서가 되어 『자본론』의 유고를 정리했으며, 수정주의에 반대하여 정통 맑시즘을 고수. 1934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시민권을 얻었으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자 네델란드로 망명하여 구호금을 받으며 불우하게 생애를 마쳤다.
*3) 커커프(T. Kirkupp: 1844-1912): 영국의 경제학자. 주로 사회주의 경제학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

 

출처 : 중국근현대사16조

출처 : 목련꽃이 질때
글쓴이 : 어린왕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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