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테마 종교, 사상

[스크랩] 종교의 왜곡과 편견

            왜곡과 편견

  설 연휴가 끝났습니다. 지난해 성탄절은 주일과 성탄이 같은 날이라 외국의 유명한 몇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건너 뛴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경우는 이런 일은 생각하기도 힘들고 어려운 일 일겁니다. 이미 우리의 생각 속에는 주일은 인간을 위하여 있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날로 인간을 제한하고 억압해도 좋은 날로 왜곡해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자발적인 왜곡 때문에 이번 설에 고향을 찾지 못하고 혹은 친척들과 1 년의 한번 만남을 놓친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일에 대한 편견과 오류를 고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런 편견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이미 프랑스혁명에서도 실패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종교의 병폐를 고친다고 한 주일을 10 일로 했지요 그러나 결국은 어떤 망나니의 신격화로 종교의 제한은커녕 더 기세가 등등해졌고 종교개혁도 해보지 못하고 종말을 고했습니다. 결국 종교개혁은 이 실패를 거울삼아 신을 비하한 망령 같은 것을 만드는 일은 결국 실패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평신도의 종교개혁의 환상은 더 멀어졌습니다. 종교의 병폐를 고친다는 명목으로 종교대신에 혁명가들이 종교이상의 권위를 가지려 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입니다. 이를 종교인들은 신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에 실패한 것으로 치부합니다. 이렇게 종교는 고치기 힘듭니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만든 종교 왜곡 현상은 고치기도 힘들고 고치려 들다간 더 큰 병폐를 낳고 실패하게 된다는 생각들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만큼 종교를 고치려면 바른 생활태도를 지녀야하는데 그 바른 생활이 자칫하면 사람을 억압하기 때문에 좋은 효과를 가져 오기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억압은 하루아침에 당하면 견디기 힘들지만 오랜 세월동안 생활화 되면 그저 생활이기 때문에 억압인지도 모르게 됩니다. 반면에 급작한 개혁은 생활의 변화를 단시일 내에 요구하기 때문에 규제와 억압으로 당장 비쳐 집니다. 개혁도 그래서 서서히 이뤄져야 합니다만 갑자기 변화하면 억압이 되고 탄압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화근입니다. 종교 생활도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쉽게 고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많은 편견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활하는 한두 가지로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 한국교회가 그렇게 싫어하는 술을 봅시다. 기독교는 술과 무척 밀접한 관계를 가졌습니다. 예수의 첫 이적은 잔칫집에서 술을 만드시는 것이었고, 성찬식도 술로 합니다. 물론 예수가 아니더라도 디모데전서 5:23 에는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위장과 잦은 병을 생각해서 포도주를 조금 쓰라는 권고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술과 밀접한 종교를 마치 술과 가까이 하는 것만으로도 죄악시한다는 것은 성경과 전혀 다른 전통입니다.


  또 다른 글에서는 헌금의 사용처며 빈부의 격차를 해소하는 법등이 자세히 나옵니다만 지금의 교회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닙니다. 즉 자신의 교회에 있는 가난한 자를 헌금으로 어떻게 도울 것인가라는 구체적인 글들도 많이 나오지만 지금 어느 교회에서 자신의 교회 내의 가난한 이를 위하여 헌금을 몰아줍니까? 적어도 우리는 같은 교단의 미자립 교회 목회자 월급도 도와주지 않는 판에 말입니다. 그런가하면 주인과 종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봐서는 이 제도도 인정되고 있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 과부의 문제 창녀의 문제도 많이 다루고 있고 이들과 공존하는 방법도 자연스럽게 제시합니다. 즉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삶이 중요한지를 역설하는데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은 구체적인 생활은 사라져버리고 종교는 친목장소로 단체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형식 외에 사라져 버렸습니다. 진지한 제사는 인간의 설교로 대치되고 제물은 흔적도 없어지고 기도는 욕심에 불과한 요구로 기득 차있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말씀은 덧붙여지는 인간의 말 뒤로 숨겨져 있습니다. 이 같은 코메디는 목회자가 코메디안이 되기도 하고 코메디안이 목회자가 되는 세상을 만들어 갑니다.


  기독교인의 생활 규범은 주고받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이웃에게 주는 것만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의미하는 생활 규범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에는 주는 것만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도와달라고 하면 도움을 주는 것은 누구든지 하는 일이랍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달라고 하지 않아도 도움을 주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이용하여 기독교인이 도와달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이웃에게 손을 내밀라는 말은 또 없으니까요. 그것은 불신자나 이방인이 하는 것이랍니다. 그저 달라고 하든 말든 주십시오. 이렇게 나누는 삶이 신앙생활이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기보다 복을 달라고 하고 더 잘살게 해달라고하고 더욱 많이 축복받는 것이 신앙생활이라고 삶을 왜곡했습니다. 내 자녀와 경쟁으로 찌든 이웃의 자녀에게 건강을 빌어주어야지 하는 것이 신앙생활인데 내 자녀만 잘되게 해달라면 100 일기도를 해야 하는 것은 어디서 온 신앙일까요? 이 욕심 같은 것들은 적어도 신앙생활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기독교가 2 천이 되다보니 너무 많은 왜곡이 되어 편견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경도 마음대로 편리한대로 같다 붙여서 마치 믿지 않으면 범죄를 한 것처럼 바꾸어 버렸습니다. 불신앙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저 그런 것이지요. 예수를 믿지 않으면 예수 곁으로 못 간다는 것이지 범죄 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이웃을 괴롭힌 것도 아니요 누구에게 피해를 입힌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반대로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괴롭힌다든지 지옥에 간다든지 하면서 겁을 주고 위협하는 것이 공갈 협박죄가 되는 것이지요. 예수의 정신을 제대로 신앙화하고 생활화 했다면 누가 당신과 같은 신앙생활을 안 할까요? 예수의 사랑이 정말 좋은 것이라면 몸소 실행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다 같이 편안해지고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로 가길 원해야 합니다. 물론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논쟁이나 신학논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기껏 자신들의 사고 안으로 축소하여 교리를 만들고 틀을 만들어서 여기에 맞지 않으면 불신앙이요. 안 맞으면 다르다는 말을 쉽게 하는 좁은 사고 속에 이제 우리의 후손들을 가둬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나는 우리의 후손들이 자유로운 사고로 신앙생활 하길 바랍니다. 적어도 왜곡된 교리를 통하여 욕심을 드러내는 일이 기도로 미화하는 신앙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함께 사는 사회   송 세준 씀

출처 : 칼럼
글쓴이 : 친구여 반가워요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