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14일 문을연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유태인 대학살 (Holocaubt)의
상징입니다. 나치 점령하의 폴란드, 헝가리, 루마리아, 체코, 소련, 프랑스,
이탈리아, 심지어는 노르웨이, 와 그리스로 부터 끌려온 유태인들이 이곳에서
죽어갔습니다. 희생자중에 90 % 는 유태인 이 었지만 , 폴란드인과 집시
소련군 전쟁 포로들, 유고인, 동성 연애자들도 함께 희생되었습니다.
매일 수백명이 이곳에서 죽었고, 심할때는 하루 1000명이상이 죽은때도 많았습니
다. 대부분은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았고 첫관문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
들은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강제 노역과 기아, 그리고 시도때도 없는 처형으로 마치 파리목숨과 같은
하루 하루를 보내야 했던것입니다.
1945년 소련군의 진주에 따라 해방되었을때 이곳에서 살아남은 채 발견된
사람은 겨우 7000명에 불과했습니다.
아우슈비치가 나치 독일에 의해 건설된 첫 강제 수용소 가 건설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부터 독일 도처에 강제 수용소가 건설되었습니다.
1933년 2월 28일 히틀러의 요청에 따라 힌델부르크 대통령이 국민 기본권을
보유하는 조치를 취하고 , 이에 따라 나치당의 적들에 대한 광범위한
검거가 시작 되었다.
이조치는 기본권 유보의 기간이 특정되지 않았을 뿐아니라 , 그 범위도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제한 하고, 서신, 전화, 전보의 검열을 허용하는
무제한의 것이 었습니다.
영장 없는 가택 수색과 검문 검색이 수시로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나치당이 도입한것이 이른바 " 방어적 구금 (Schutzhaft, protective
imprisonment) 의 개념입니다.
방어적 구금 이란? 나치즘의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공공의 적대감으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 나머지 독일 사회로 부터 격리 시켜야 한다는것이 었습니다.
" 방어적 구금 " 이 필요한 사람들은 언제든지 재판 없이 투옥되어 강제 수용소로
보내 졌습니다. 이 제도의 첫 목푠ㄴ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뒤이어 사회당원들과
노동 조합원들이 붙잡혀 갔습니다.
1933년에 이미 독일에는 다하우 (Dachau), 존넬 부르크를 비롯한 50개의 수용소
가 추가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들수용소를 나치 친위대 (SS)가 관장했으나 1934년 7월 부터는
인종 청소와 수용소 관리를 위한 특별 부대가 조직 되엇습니다.
이 특별부대의 대원은 모두 친위대 중에서 선발되었습니다.
1938년 오스트리아 와의 합병이 이루어지면서 오스트리아내에 마우타우젠 수용소
가 만들어졌고,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아우슈비츠, 나츠바일러리가
등의 수용소들이 만들어졌다.
모든 수용소들에는 수백개의 공장과 탄광, 채석장, 주물공장들이 딸려 있어
수용된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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