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세 / 파스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인간은 한 줄기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자연 가운데 가장 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그를 분쇄하는 데는 온 우주가 무장할 필요가 없다. 한 줄기의 증기, 한 방울의 물을 가지고도 넉넉히 그를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우주가 그를 분쇄한다 해도 인간은 그를 죽이는 자보다 더 고귀할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죽는다는 것과 우주가 자기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주는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존엄성은 그 사고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고 자기를 높여야 한다. 우리가 채울 수 없는 공간이나 시간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러니까 잘 사고하도록 애써 보자. 도덕의 근본은 바로 여기 있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요, 금수(禽獸)도 아니다. 그런데 불행은 천사의 흉내를 내려는 자가 금수의 흉내를 내곤 하는 데서 비롯한다.
너무나 자유스럽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 것도 좋은 일은 아니다. 모든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담에 의하여 성립되고, 온갖 도덕은 사욕과 은총에 의하여 성립된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래와 같은 교훈을 주었을 뿐이다. 즉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 그들은 노예이고, 장님이고, 병자이고 불행한 자이고, 죄인이다. 나는 그들을 방해하고 빛을 던져 주고 축복하고 구제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를 증오함으로써, 또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나를 따라오는 데서 완성된다.
인간이란 분명히 생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것은 그의 존엄성의 전부이며, 또 가치의 전부이기도 하다. 그의 의무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데 있다. 사고의 순서는 우선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하고, 다음에 자신의 창조주와 자신의 목적으로 향해야 한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결코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댄스를 하거나, 현악기를 켜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시를 쓰거나, 유희 등을 생각하고, 또 전쟁을 하거나 왕이 되는 일 등만을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왕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있다.

-비참 심심풀이는 비참한 우리를 위로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심풀이는 우리의 비참 중에 가장 비참한 것이다. 왜냐 하면 심심풀이는 우리가 스스로 반성하는 것을 방해하고, 자신도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멸망시키기 때문이다. 심심풀이가 없으면 우리는 권태로워질 것이고, 이 권태는 우리에게 거기서 빠져 나갈 더욱 더 확실한 방법을 찾아 내 줄 것이다. 그러나 심심풀이는 우리를 즐겁게 해줌으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음에 이르도록 한다.
신을 직감할 수 있는 것은 이성이 아니라 심정이다. 이성이 아니라 심정에 직감되는 신, 이것이 곧 신앙이다. 신앙은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다. 우리는 그것을 추리의 선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다른 종교는 신앙에 대해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그런 종교는 신앙을 가지는 데만 추리만으로 충분하다고 하지만, 추리는 결코 거기까지 인도해 주지는 못한다.
신을 아는 것과 신을 사랑하는 것 사이에는 얼마나 먼 거리가 가로놓여 있는 것일까? 생각하는 갈대. 내가 나의 존엄성을 구하려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내 사고의 규제에서이다. 내가 아무리 많은 영토를 소유하더라도 그 이상의 것을 손에 넣었다고 할 수는 없다. 우주는 공간으로써 나를 포용하고, 하나의 점인 양 나를 삼켜 버린다. 그러나 나는 사고로써 우주를 포용할 수 있다.

-사고 인간은 사고로 인해 존엄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고는 그 본성으로 보아 매우 훌륭하며, 다른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떤 결함이 없는 한 사고는 결코 경멸 당하지 않는다. 그런데 사고는 그보다도 더 우스운 것은 찾을 수 없을 정도의 결함을 또한 가지고 있다. 본성만으로 사고를 평가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훌륭한 것인가! 그 결함만으로 평가하면 사고는 또한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

-인간의 위대성 인간의 위대성은 인간의 비참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 만큼 분명한 것이다. 왜냐 하면 동물에게는 자연스러운 것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는 비참하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오늘날 인간의 본성이 동물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고 해도, 인간이 옛날에는 인간 특유의 뛰어난 본성으로부터 타락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 왜냐 하면 폐위된 왕이 아니라면, 누가 왕이라는 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하겠는가? 사람들은 파울루스 에밀리우스가 집정관의 지위에서 물러난 것을 불행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다. 오히려 그가 집정관이 된 것을 행복한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그의 지위가 영구한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페르세우스가 왕위에서 쫓겨난 것에 대하여 매우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지위는 영속적인 것이었고, 사람들은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남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입이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눈이 세 개가 아닌 것을 결코 불행으로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눈이 하나도 없는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조차 할 수 없다.
이러한 이성과 정욕의 내면적 투쟁은 평화를 원하는 사람들을 두 파로 갈라 놓았다, 한편은 정욕을 버리고 신이 되기를 원하고, 또 다른 편은 이성을 버리고 짐승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어느 편도 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성은 여전히 정욕이 비천하고 부정한 것이라 하여 정욕에 몸을 맡긴 사람들의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며, 정욕은 그것을 버리려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두 가지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그 목적에 의한 것으로, 이 경우 그는 대단히 위대하다. 다른 하나는 다수성으로서 판단할 수 있다. 이를테면 말이나 개의 성질을, 그 달리는 것이나 도망치려는 본능으로써 판단하려는 경우와 같다.
이 두 갈래의 길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여러 각도로 판단하게 하고, 그 때문에 철학자들은 심한 논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양 편이 서로 상대편의 역설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한편은 말한다. "인간은 그런 목적을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의 모든 행위는 이에 저항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은 말한다. "인간이 그런 비열한 행동을 한다면 그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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